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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래툰>의 한 장면. 주인공 크리스는 영화 속에서 말한다. “되돌아보건대, 우리는 적들과 싸우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싸웠던 것은 우리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적들은 우리 안에 있었다. 그 전쟁은 지금 나에게는 끝난 것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있을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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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9) 미군 병사들의 붕괴
안녕 코니 누나,
내가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편지를 써. 120일간 계속된 임무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데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해줘. 아래에 쓰는 내용은 앞으로 11개월 동안 내가 할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이 편지를 보이지 말아줘.
먼저 6일 동안 장대비가 쏟아졌어. 난 진흙투성이가 되었어. 내 손은 상처투성이야. 정글에는 수천마리의 거머리와 모기들이 있고, 내 몸 전체를 물어뜯었어. 난 두명의 죽은 노랑이들(황인종) 시체를 보았어. 냄새가 고약하더라고. 난 좀 아프기도 했어. 사고로 서너명이 다쳤어. 단지 두명이 노랑이들을 쫓아가면서 쐈을 뿐이야.
실제로 전투는 아직 그렇게 심하지 않지만, 우리가 아샤우(아서우) 계곡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소문이 있어. 등에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오르내리고 있어.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 실제로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어. 전에 있었던 무언가 더 좋았던 일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는 거야. 나한테 틀렸다고 하지 마. 나는 불평을 털어놓는 것도 아니고 동정해 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가 원하는 거는 내가 하고 있는 걸 주목해 달라는 거야. 다시 말하는데 내가 야전에서 빠져나와서 힘들게 일하지 않고 있다고 엄마에게 말해줘.(사병 살바도르 곤살레스가 1969년 2월19일 그의 누이에게 쓴 편지. 1968년 55만명에 육박한 미군
신념이나 기술은 의미가 없었다
시체의 수를 세는 게 중요했다
북베트남군과 접전을 원했지만
한번도 그걸 경험할 수 없었다
싸움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개인의 안전을 지킬 수 없었다
미군 병사들의 극도의 스트레스는
약물중독, 인종주의, 양민학살,
상관살해 사건으로 나타났다
‘저 앞에 있는 것은 지뢰인가 풀잎인가’ 부비트랩(booby trap)도 조심해야 했다. 적들을 대상으로 미군이 설치했던 부비트랩(지뢰)은 베트콩들에 의해 재설치되었고, 이는 다시 정글에서 수색작전을 하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기가 되었다. 부비트랩에 의한 미군의 피해는 전체 전사자의 11%, 부상자의 17%에 이르렀다. 이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사상자 6명 중 1명은 부비트랩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군 제25보병단 소속의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스스로 묻는다. ‘저 앞에 있는 작은 것이 지뢰인가 아니면 그냥 풀잎 세 개인가?’ 오른발이 왼발 앞으로 움직일 때 내 마음속에서는 갈등이 생긴다. 저 자갈돌 위로 발을 디뎌야 할까? 그 앞이 좋을까? 아니 그 옆으로 해야겠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한다. 자갈돌 옆으로 걸음을 내딛기로 결정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지? … 내 앞에 있는 녀석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내 앞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서 걷고 있다. 앞사람 가까이에서 걸으면 녀석이 화를 내지. 내가 지뢰를 밟을 경우에 그도 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Good Morning Vietnam)의 라디오 방송 진행자 에이드리언은 매일 아침마다 외쳤다. ‘어제 죽지 않고 오늘 베트남에서 좋은 아침을 맞이하셨나요?’ 1995년 출간된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기록(My American Journey)은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어떠한 방식으로 분출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미군들이 처음 베트남에 갈 때에는 원칙과 신념을 갖고 갔다. 그러나 베트남의 전선에서는 신념이나 발달된 기술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체의 수를 세는 것이었다. 북베트남군과 접전을 하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베트남 미군의 심리 치료를 담당했던 로버트 하이늘(Robert D. Heinl Jr.) 대령은 미군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약물중독, 인종주의, 양민 학살, 병영에서의 도둑질과 일반범죄 등으로 나타났다고 회고했다. 1966년 해군은 170명의 마약사범을 퇴역시켰으며, 3년 후인 1969년에는 3800명, 1970년에는 5000명으로 증가했다. 육군의 경우 1970년 마약으로 인한 퇴역 병사가 1만7000명을 넘어섰다. 1970년 육군에서 탈주병은 6만5643명에 달했다. 정글에서 베트콩 저격병에 의해 죽거나, 부비트랩에 걸려 죽거나, 병에 걸려 죽는 것보다는 병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1000명당 52.3명의 비율이며, 한국전쟁의 1000명당 22.5명의 갑절을 넘어서는 비율이었다. 이는 또한 1966년의 1000명당 14.7명이었던 탈주병 비율의 3배가 넘어선 수치였다. 1968년에서 1975년까지 총 9만3000여명이 탈영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군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래그 인시던츠(frag incidents) 또는 프래깅(fragging)이라는 상관과 동료를 살해하는 행위였다. 규율에 너무 엄격하거나 공격적인 장교들에 대한 살해 사건은 미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69년 96건, 1970년 209건이 발생했다. 미 육군의 자료에는 1969년에서 1970년 사이 프래깅이 563차례 있었으며, 이로 인해 1970년에서 1972년 사이 프래깅을 심리하는 군법회의가 363번 열렸다. 제25보병사단의 사병 미겔 레무스의 증언이다. 파티 시간이었다. … 그런데 한 장교가 영웅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 90명 전원을 현행범으로 체포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참호를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그들이 그 장교를 총으로 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참호 밖으로 시신을 내던지고 다시 기관총으로 쏴 버렸다.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누군가가 무선으로 본부에 대장이 베트콩의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 그것을 본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 <플래툰>에 나오는 수색 중 상관 또는 동료를 살해하는 행위는 공식적으로는 프래깅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투 중 상대방이 아닌 아군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처음 경험하는 전투에서 교본이나 훈련에서 배운 대로 사격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상적인 전투를 불가능하게 했다. 하이늘 대령은 1971년 베트남 주둔 미군의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면서 “군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Armed Forces)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쩌면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의 철수는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 변화 때문이 아니라 미군이 스스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곳에는 노르망디와 인천의 영광이 없었다 영화 <플래툰>의 주인공 크리스는 영화 속에서 말한다. “되돌아보건대, 우리는 적들과 싸우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싸웠던 것은 우리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적들은 우리 안에 있었다. 그 전쟁은 지금 나에게는 끝난 것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옥이 상식 자체가 불가능한 곳(impossibility of reason)이라면, 그 지옥은 바로 베트남이었다.” 실제 수기를 영화화한 <7월4일생>에서 불구가 된 코빅은 이 전쟁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고 회고하면서 반전운동에 나선다. 전쟁에 나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무엇.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했던 시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냉전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미국 정부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었다. 수만리나 떨어져 있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막으면 미국의 안보가 지켜질 것이라고 믿었다. 막상 베트남 전쟁터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노르망디의, 인천의 영광도 없었다. 그저 정글에서 살아남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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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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