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구정대공세 직후인 1968년 3월16일 꽝응아이성 선미촌에서 발생한 이른바 ‘밀라이 학살’의 희생자들. 이 사건은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미군의 가장 대표적인 대량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밀라이 전쟁 박물관
|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1) 1968년 밀라이 학살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에서의 승리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남베트남 정부 지역에서 베트콩과 그들을 지원하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을 축출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들이 도망가지 않는다면, 이들을 죽여야 했고, 더는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게릴라들의 활동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이동시켜야 했다.
문제는 반정부 게릴라들을 몰아내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릴라들은 지역민들로부터 충원되었고, 지역민들은 게릴라들을 지원했다. 게릴라들에 의한 살해와 납치가 끊이지 않았지만, 이들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1970년대 초 사이공에서 나온 통계에 따르면 1957년에서 1972년 사이 베트콩은 3만6725명을 암살했고, 5만8499명을 납치했다. 이 중 1968년부터 1972년 사이의 통계를 보면 피해자 중 20%만이 정부 관료, 경찰, 지방자치군이었고, 나머지 80%는 민간인이었다.(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1978, 272~273쪽)
베트콩에 의한 피해자 수가 결코 적지 않았음에도 게릴라들은 지방민들에게 로빈 후드였다. 암살과 납치의 대상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지역의 부패한 관리들과 지주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게릴라들의 활동은 기자들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공개적으로 보도되지 않았다.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군의 활동이 서방 기자들에 의해 보도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그 결과 베트남의 미군들은 적들뿐만 아니라 악화된 여론과도 싸워야 했다. 게다가 게릴라와 일반 주민들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주민들은 게릴라를 숨겨줬고, 게릴라는 주민들로부터 충원되었다. 정글에서나 마을에서나 게릴라는 갑자기 튀어나왔다. 저격수에게 걸리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선에 있었던 한국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다. 피의 보복이 발생한 것이다. 그 대표적 사건이 구정공세 직후인 1968년 3월16일에 있었던 밀라이 학살이었다. 밀라이 학살이 일어난 선미는 한국군이 활동했던 다낭으로부터 160㎞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선미는 미군의 지형도에는 밀라이로 지칭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지금도 선미 학살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 노근리가 있었다면 베트남에 밀라이가 있었다
400여명이 죽은 이 학살엔
26명의 군인들이 관여했지만
한 사람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 사병은 학살 벌어진 다음날
부비트랩 밟고 다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밀라이에서 한 일 때문에
신이 나를 벌하고 있구나”
“살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요” “우리는 아침 일찍 착륙지점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밀라이로 날아갔다. 우리는 마을 밖에 있는 가뭄으로 말라 있는 논 위에 내렸다. 동네로부터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동네에는 무장한 적들도 없었다. 우리는 일렬로 줄지어 마을을 향했다. 마을 밖에서 한 늙은이가 베트남말로 인사를 하고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다가 첫 번째로 죽었다. 메디나(중대장)나 캘리 둘 중에 한 사람이 그를 죽이라고 했고, 백인 병사 하나가 그를 죽였다. 나는 그 병사의 이름을 모른다. 이것이 첫 번째 살인이다. 그 병사가 베트남 사람을 죽인 직후에 한 여성이 마을로부터 나왔고, 누군가가 그녀를 때려 눕힌 다음 메디나가 그녀에게 M16 소총을 발사했다. 나는 그로부터 30~40m 정도 떨어져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이 여자에게 총을 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미첼, 콘티, 미들로, 스탠리, 그리고 나머지 분대원들이 이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살인이다. 그 후 분대와 예하부대가 마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도 마을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마을 안으로 65~85m 들어간 지점에서 우리는 15명 이상의 베트남인 남자, 여자, 아이들을 끌어모았다. 메디나가 외쳤다. ‘모두를 죽이고 아무도 서 있지 못하도록 하라.’ 우드는 M60 기관총을 들고 거기에 있었고, 메디나의 명령으로 그들에게 기관총을 발사했다. 미첼 하사도 거기에 있었는데 M16 소총으로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위드머는 M16으로 마무리를 했다. 메디나 자신은 그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사격 이후 메디나는 물소와 함께 가고 있었던 17살 내지 18살 정도 된 소년을 멈추게 했다. 메디나는 소년에게 뛰어가라고 했지만, 소년은 뛰지 않았다. 그래서 메디나는 M16 소총으로 그 소년을 죽였다. 나는 50~6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중략) 문: 나는 당신에게 경고하는데 당신이 증언한 내용들은 매우 심각한 내용들이다. 나는 분명히 하고 싶은데 당신은 오직 사실만을 말하고 있으며,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인가? 답: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며, 법정에서 메디나와 대질신문을 해도 그것이 사실임을 맹세할 수 있어요. 이것은 사실이에요. 문: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답: 우리는 계속해서 마을을 지나갔어요. (중략) 마을 안에서 군인들은 사람들을 둘러쌌어요. 미들로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몇몇 다른 병사들이 미들로와 함께 있었어요. 캘리가 올라와서 그들 모두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바로 그 근처에 있었어요. 이번에는 25명이었어요. 미들로와 위드머가 M16을 자동으로 놓고 이들에게 발사했어요. 카우언도 거기에 있었고 그 역시 그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지만, 그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 사람들에게 총을 쏜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 캘리는 이번에는 두 명의 베트남 사람을 데리고 가서 M16을 자동모드로 해서 죽였어요. 나는 이 살인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서 멀리 떨어졌어요. 이러한 살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요. 이들은 주로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몇몇 늙은이들이었어요. 그들은 탈출하거나 공격하려고 전혀 시도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살인이었어요. (중략) 문: 그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답: 우리는 마을을 지나갔고 또 다른 살인행위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주로 스탠리와 있었어요. 나는 스탠리와 앉아 있었는데, 위드머가 와서 다시 내 권총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나는 그에게 주었고 한 작은 소년이 부상한 것을 보았어요. 아마도 팔을 다친 것 같았어요. 위드머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내 권총을 쏘았습니다. 위드머는 ‘내가 이 개자식에게 쏘는 것을 보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중략) 문: 밀라이에서 몇 명 정도가 죽었다고 생각하나요? 답: 100명이 넘을 겁니다. 몇 명이 죽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밀라이 학살에 대한 허버트 카터의 1969년 증언, My Lai: A Brief History with Documents, 1998) 10대 여성 윤간 뒤 죽을 때까지 총을 쏘다 “1. 바나도 심슨이 선서하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자 한다. 다음날 우리는 밀라이로 갔습니다. 나는 두 번째인가 세 번째에 섰습니다. 또 다른 소대, 즉 C중대의 제1소대가 우리 앞에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 분대, 즉 2소대 3분대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소대는 브룩스 소위가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내 분대의 리더는 라크루아 하사였고, 소대의 리더이면서 선임하사는 뷰캐넌이었습니다. (중략) 우리가 마을로 들어간 직후에 나는 5명의 베트남인 체포자와 함께 있는 우드와 스탠리를 만났습니다. (중략) 그들은 이 사람들에게 베트남말로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로셰비츠가 나에게 와서 모든 사람들을 죽일 거라고 말했고 나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로셰비츠는 나의 M16을 뺏어서 자동모드로 놓고 거기에 서 있던 모든 베트남 사람들을 쏴 버렸습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답: 나는 마을로 들어가서 오두막 옆의 우물에 한 소년이 총에 맞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기를 안은 여성도 울면서 오두막에서 나왔습니다. 로셰비츠, 라마르티나, 그리고 라크루아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라이트, 후토, 그리고 허드슨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브룩스 소위(소대장)도 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소대장은 나에게 여자를 죽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여자와 그의 아기를 쐈습니다. 저는 사진들을 보았고 여기에 관련하여 내가 쏜 적이 있는 여자와 아기의 사진을 확인했습니다. 나는 아기의 얼굴을 쏜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답: 아직도 오두막에는 4~5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대부분 아이들이었습니다. 후토, 라이트, 그리고 허드슨이 오두막으로 들어갔고, 허드슨이 아이들에게 기관총을 쐈습니다. 나는 그때 오두막에 들어갔고 아이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긴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오두막에는 작고 오래된 구멍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곳이었습니다. 라이트는 누군가 거기에 숨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 구멍에 수류탄을 까 넣었습니다. 문: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답: 우리가 마을로 들어가면서 많은 총소리를 들었고 소대 앞에 25~30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왔는데,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우리는 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막 일어났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메디나(중대장)는 우리가 거기로 갔을 때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를 목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같은 날 다른 처형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밀라이에서 사람들의 시체가 쌓여 있는 구덩이를 발견했습니다. 문: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답: 우리는 왼쪽으로 가서 오두막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나는 그날 8명쯤을 죽인 것 같아요. 나는 도망가는 두 명의 늙은이를 쐈습니다. 또한 몇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쐈습니다. 그들이 오두막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숨으려고 했습니다. 문: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을 봤는가? 답: 네. 라이트, 후토, 허드슨, 러커(후에 사망), 그리고 모어가 오두막에 들어가서 17에서 18살 정도 된 여자애를 강간했습니다. 나는 문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일을 마친 뒤 M60, M16, 캘리버 45 권총을 꺼내서 그녀가 죽을 때까지 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사라졌고, 그녀의 뇌가 사방에 퍼졌습니다. 나는 강간이나 살해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문: 이 사람들이 후토, 라이트, 허드슨, 러커, 그리고 모어이고, 이들이 그 소녀를 윤간했는가? 답: 네, 그들이 그랬습니다. 문: 다른 살해 장면도 목격했는가? 답: 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많은 혼란이 있었고, 나는 내가 본 모든 살해 장면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400명 정도가 밀라이에서 죽었습니다. 모두들 메디나의 명령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바나도 심슨의 1969년 증언, My Lai: A Brief History with Documents, 1998) 영관급 장교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아 한국에 노근리가 있었다면 베트남에 밀라이가 있었다. 이 사건에는 모두 26명의 군인이 관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중 한 사람(윌리엄 캘리 소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을 뿐이었다.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국가는 정상적으로 전투를 할 수 없는 곳에 군인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전혀 책임지지 않았다. 학살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가해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들이었다. 가장 가혹한 피해자는 억울하게 죽은 베트남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가해자인 군인들 역시 피해자였고, 베트남전 이후에도 트라우마를 앓았다. 카터의 증언에 나오는 한 사병은 학살 다음날 부비트랩을 밟고 다리 하나를 잃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밀라이에서 한 일 때문에 신이 나를 벌하고 있구나.”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