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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13 18:26 수정 : 2014.06.14 15:54

1965년 10월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왼쪽)이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파견되는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 부대는 베트남에 파병된 외국 군대로서는 미군을 제외하고 유일한 전투부대였다. 보도사진연감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2) 한국군을 괴롭힌 것들

베트남에서 미군이 겪던 문제는 한국군 역시 그대로 겪고 있었다. 특히 전투부대의 경우 미군보다도 더 많은 고충을 겪었다. 남의 집에서 살림을 하는데, 그것도 단독으로 세를 얻은 것이 아니라 세 들어 사는 공간에 얹혀사는 모양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국군의 파병은 공식적으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1965년 10월22일 수도사단이 맹호사단으로 재편성되어 남베트남의 꾸이년(퀴논)에 상륙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의 첫 전투부대였고, 베트남에 파병된 외국 군대로서는 미군을 제외하고 유일한 전투부대였다.

파병 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한국군이 싸워야 할 베트콩은 남베트남 사람들한테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남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충원되었다. 어디에서건 베트콩이 없는 마을이 없었다. “전체 월남의 3분의 2는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베트콩이 “월남의 100%를 장악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채명신 사령관의 판단이었다.

맹호사단과 함께 처음으로 베트남에 도착한 제2해병여단은 각각 꾸이년과 깜라인(캄란)에 상륙했고, 이후 청룡부대가 오면서 베트남의 동쪽 해안을 따라 송까우, 푸깟, 빈케, 쭐라이, 호이안 등으로 주둔지가 확대되었다. 이 지역에서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베트콩들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과 정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베트콩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한국군은 해안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오작교 작전을 통해 베트남의 주축 도로인 1번 도로를 정상화하였고, 이 과정에서도 도시의 시민들을 항시적으로 대해야 했다. 이후 한국군의 주둔지였던 꾸이년에는 한진상사가 오고, 다낭에는 대한통운이 진출했다.

미군은 파병 초기 한국군이
베트콩과 전투 않는 것에 불만
해안선 따라 한국군 배치되자
“해변에 놀러온 것이냐” 비난
한국군 장성과 언쟁 벌이기도

대대 민사장교 두자는 건의나
범죄사병 차출 말라는 요청 등에
본국 군 수뇌부는 비협조 일관
채명신 사령관 1969년 귀국엔
이러한 갈등이 작용했을 수도

‘용병’ 비난과 독자적 작전지휘권 사이

한국군은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고려를 해야만 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이 남북 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베트남 내부의 내전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채택한 전술은 평정전략이었다. 즉, 베트콩들이 마오쩌둥의 전략, 즉 남베트남 사람들이 물이라면 베트콩이 물고기인 게릴라 전략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베트콩과 남베트남 사람들을 서로 분리하고자 한 것이다.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이러한 전략이 한국전쟁 시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회고했지만, 평정작전은 한국전쟁 시기 후방-제주도와 지리산 지역-에서 수행되었던 빨치산 토벌 작전과 유사했다. 빨치산들과 주민들을 서로 분리함으로써 보급을 끊고 더는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고립시키는 전술이었다. 베트콩도 주민들과 분리될 경우 보급은 물론 더 이상의 게릴라 충원 역시 어려웠다.

한국군의 평정전략은 당시 베트남 전쟁의 본질적인 성격을 잘 파악한 것이었다. 베트콩과 주민들을 분리하지 못한다면, 북베트남의 지원을 끊는다고 해도 베트콩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며, 선전포고도 없었던 전쟁은 끝도 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남베트남군과 미군, 그리고 한국군이 전략촌을 설정하고,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동시킨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전략이 베트남 사람들과의 접촉면을 넓힌다는 점에 있었다. 평정작전이 베트남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전략이 되겠지만, 베트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반발한다면, 한국군의 희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군에게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게다가 당시 한국군 사령부에 있었던 한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1967년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까지는 희생자를 최소화하라는 한국 정부의 지시는 또 다른 딜레마였다.

한국군에게는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이미지가 너무도 중요했다. 한국군의 월급을 포함한 모든 전쟁 비용을 미국 정부가 지급했고, 브라운 각서(1966)를 통해 파병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특별원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의 용병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조건은 충분히 조성되어 있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권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했다. 한국에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이 겸임)에게 있었지만, 베트남에서도 안 된다는 것이 한국군 지휘관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미군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한국군의 투입을 통해 미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필요했다.

“미군들은 백마부대를 가장 치열한 전투 지역에 투입하여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백마부대의 1개 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할하여 미군들이 가지고 있는 나짱(나트랑), 깜라인만(캄란베이), 판랑 등의 전략기지의 시설경계 임무를 맡기고, 나머지 2개 연대는 주로 중부전선 쁠래이꾸(푸레이크)와 같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지역에 배치하여 준동하는 베트콩들의 기선을 제압하여야 하겠다. 따라서 최소한 4~5개 대대는 기동 타격대로서 자기네들이 요구할 때에는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되겠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손장래 증언, 1968년,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미군은 애초에 맹호사단 2개 연대를 17도선 부근으로 보내려고 했다. 17도선은 남북 베트남을 가르는 선이었고, 북베트남의 정규군과도 교전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다행히 한국군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사이공에 있는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독자적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기로 합의되면서 미국의 계획은 일부 수정되었다.

물론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국군에게는 독자적 정보 수집 능력이 없었다. 또한 미군의 탄약 및 포탄의 지원뿐만 아니라 공군의 지원 없이 정글에서 독자적 활동이 불가능했다. 베트남 정규군 및 미군과 공동 보조를 맞추어야 했으며, 때로 공동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에 3국 합동 작전회의와 실무자회의가 정례적으로 가동되었다.

미군은 파병 초기 한국군이 베트콩과 전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고, 동부 해안선을 따라 한국군 부대의 배치가 이루어지자 ‘한국군이 해변에 놀러 온 것이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한국군의 한 장성은 미국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우리의 한국군 장병이 죽는 것을 당신들은 개나 돼지가 죽는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미군 장성에게 따지기도 했다.

“적들은 맥주 깡통으로 부비트랩 만드는데…”

한국군의 중대기지 전술에 대해서도 미군과 이견이 있었다. 미군은 대대 규모를 주둔지에 둔 상태에서 정찰대를 내보내는 방식이었지만, 한국군은 중대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지역을 확대하는 전략을 썼다. 양군 간의 전략이 달랐기 때문에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작전을 할 때 양자 간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효율적 작전 수행을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되었다.

“미국 사람들 하는 것을 보아 가지고, 그대로 따라서 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예를 들어 스피아관이나 플라스틱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한 번 쓰고서 내버려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물자를 내버리면 군대 망하는 것입니다. … 스피아관을 버리는 것은 지휘관의 잘못이니까 지휘관이 변상하라. 이렇게 했습니다. 마대까지도 실어서 갔습니다. 맥주 깡통까지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적들은 OB맥주 깡통을 가지고 부비트랩을 만들어 썼습니다. 적은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만들어 쓰는데 너희들이 물자를 버려서야 되겠느냐고 교육시켰습니다.”(채명신 장군 증언, 1969년,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주월한국군사령부의 또 다른 고민은 한국에 있는 한국군과의 협조 문제였다. 베트남 파병은 국가적 대사였고, 한국 정부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지원했다. 그러나 실무자 선에서는 서로 간에 이견이 있었다. 주월사령부의 제안이 서울에 있는 한국군 수뇌부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간인들의 접촉이 많아지면서 대대 단위에 민사장교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의가 있었으나 한국군 수뇌부는 이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결혼한 사병이나 독자, 그리고 범죄 가능성이 많은 사병들을 차출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한 것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과의 협의 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협의 담당자의 승진을 요청했을 때에도 본국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해외 원정군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군의 지휘자로 있는 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한국군과의 공조에 중요한 구실을 한 미군 장교에 대한 훈장 품의도 본국에 의해 무시되었다. “미국 군대가 강할 수 있고 해외에 나가서 큰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전쟁을 뒷받침해주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채명신 사령관이 1969년 귀국했던 것은 ‘임기’가 끝났기 때문이었겠지만, 본국과의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초기 파병 과정에서 보급지원도 문제였다. 채명신 장군의 방에 처음으로 에어컨이 설치된 것은 1967년 3월이었다. 그러니 다른 병사들의 조건은 어떠했겠는가? 한국군은 베트남의 뜨거운 날씨와도 싸워야 했다. 다른 보급품들도 제때에 조달되지 않았다. 물자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근해에 배가 30~40척씩 대기하고 있어도 이를 내릴 수 있는 항만 시설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탄약도 내리기 어려웠고, C-레이션도 없어서 오키나와에서 긴급 공수해 와야 했다.

남베트남 정부군과의 협조 역시 쉽지 않았다. 미군은 남베트남 군대한테 자신들의 작전을 알리지 않았다. 작전을 알리는 즉시 그 내용이 베트콩에게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은 가능한 한 베트남군에 작전 내용을 알렸다.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군이 아니라 베트남군이 주인이기 때문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 한국군 사령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 작전참모부장은 “한국군의 지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쪽의 요구에 의해 한국군의 증파를 요청한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전사자 등 국방부 공식통계 믿을 수 있나

물론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 장교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파월 한국군은 8년간 5000여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이는 국내의 안전사고에 의해서 사망한 숫자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지휘관이 있는가 하면, 전적을 높이기 위해 적 사상자 수와 노획 무기 수를 늘리고, 아군의 안전사고를 전투 사고로 보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국방부의 공식 통계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사령관과 지휘관 사이에 견해 차이가 불거지기도 했고, 연대장과 중대장 사이에서도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작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에 대해 야전 지휘관과 연대장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곤 했다. 그래서 아군 1명 전사에 대해 적 10명을 사살했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감찰 조사를 하겠다는 견해가 한국군 내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한국군 장교들은 사명감을 갖고 전투에 임했지만, 현장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까지 미군은 한국군 지휘관들을 높이 평가했다. 부상자들에 대한 과학적 판단으로 한국군 피해를 줄이려고 했던 이명호 장군도 그 한 사람이었다. 채명신 사령관에 대한 미군의 평가 역시 주목된다. 공조 관계를 둘러싼 이견이 있었음에도, ‘한국군의 뛰어난 작전 수행의 정점에는 채명신 사령관이 있다.’ 채명신이 사령관직을 이임한 직후 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의 회고(1969년 8월)도 주목된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채명신 사령관은 군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압니다. … 그 양반이 생각하는 것이 멀리 내다보고 보통 스마트한 것이 아니에요. 그분은 주먹구구식으로 안 합니다. 참모들이 일하는데 막연한 얘기 하다가는 혼나지요. 숫자를 대야 됩니다. … 외유내강입니다. 보기 드물게 지·인·용을 겸한 분입니다. 엄격하지만 엄벌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재생해서 쓰려고 하고 부하들을 잘 활용하시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발탁된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돌보아 주십니다.”

채명신 장군은 유신에 대한 반대로 인해 대장 진급도 탈락했고, 1972년 유신 직전 군복을 벗었다고 한다. 이후 대사를 역임하기는 했지만. 사령관이 이런 대우를 받았다면, 국가의 부름으로 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했던 다른 군인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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