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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25 18:25 수정 : 2014.07.26 13:55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파월장병지원위원회를 1966년 설치한 뒤 전국 2637개의 지방위원회를 조직해 전국민적 동원체계를 확립했다. 대중들은 자주 파월 장병들의 환송행사에 동원되었다. 맹호부대 파월 장병들의 환송식 모습. 보도사진연감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5) 전 국민적 동원

1967년 10월31일 베트남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는 험프리 부통령을 만났다. 이 만남은 매우 중요했다. 1965년 이후 대규모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과 미국은 가장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1966년 말부터 한반도의 안보위기가 심화되면서 한-미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더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 정부를 진정시킴으로써 한반도의 안보위기가 또 다른 한국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미국 반전시위자들을 받아
사상 개조하겠다며 험프리에게
큰소리를 친 정일권 총리
한국인들도 사상 개조가 안돼
유신체제 아래서 시위했는데…

베트남 파병 기간의 변화는
현 한국사회의 원형을 제공
주민등록시스템 통한 국민통제
강화된 병역과 예비군 제도
병영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험프리: 한국 정부의 북에 대한 보복 행동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일권: (이에 대한 대답 없이) 한국 정부가 요청한 구축함 3대 중 2대에 대한 원조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고 들었다. 전투병 추가 파병 얘기가 나오면 한국의 야당이 이 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다. 반침투 전술을 위한 레이더와 통신수단을 언제까지 지원해 줄 수 있는가?

험프리: 만약 우리가 지원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한국의 정규군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정일권: (놀라서 한발 물러서며) 주한미군의 계속된 주둔에 감사한다. 지프나 트럭 같은 운송수단의 지원을 원한다.

험프리: 전투병의 추가 파병을 원한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정일권: 한국은 베트남에서 승리할 때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런데 반전시위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을 한국에 보내면 모두 전향시킬 수 있다. 다음 베트남 참전 7개국 회의 때는 20만명을 보내서 반전시위를 침묵시키겠다.

험프리: 그건 그렇고, 남한은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돌발 행동을 할 것인가? 대통령에게 미국의 뜻을 전해 달라.

정일권: (이에 대한 답변 없이) 한국의 수출을 좀 도와달라. 미국의 보호장벽이 너무 높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싸우고 온 군인들 중 실업자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트남에 파견될 수 있도록 해 달라.

험프리: 지금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이 검토 중이다. 베트남에서 새로 정부가 들어서서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 채명신 장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1967년 10월31일자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 전문 1630Z)

코묻은 위문성금에서 연예인 파견까지

당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서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군의 추가 파병은 양국 정부가 모두 일치하는 정책이었지만, 서로 목적은 달랐다.

정일권 총리는 험프리 부통령의 일침에 주춤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정 총리는 한국인들을 파견해서 반전시위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반전시위자들을 모두 한국에 보내면 이들을 모두 교육시켜서 생각을 바꾸겠다고까지 말했다.

반전시위에 대한 정 총리의 이러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반전시위가 전혀 없었고, 한-미 동맹이 하나의 성역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베트남 전쟁 시기를 통해 박정희 정부는 한국 사회에 대한 통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베트남 파병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했다.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힘들었다.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지 못해서 다른 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까? 한국의 상황이 그랬다.

파병을 위해 사회적 동의를 얻고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를 위해 군대를 파병하고자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야 했던 마오쩌둥은 그 전선에서 아들을 잃었고, 전쟁포로의 일부가 귀환을 거부함으로써 중국군의 동원이 자발적 동원이 아니었음이 만찬하에 밝혀지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웃 국가로의 파병도 이렇게 어려웠는데,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그것도 너무나 생소한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는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불과 10여년 전에 전쟁을 경험했던 한국 사회는 동원하기에는 좋은 조건을 갖고 있기는 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사회 운영의 기본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1963년 16.3%, 그리고 1965년 14.5%에 이르는 도시 지역 비농가의 높은 실업률은 전쟁 동원을 위한 중요한 토양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상황이 한국의 안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지역에 파병을 하기 위해서는 전국민적 동원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함께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윤충로 교수의 글(“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의 전쟁 동원과 일상”)은 전국민 동원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파월장병지원위원회를 1966년 5월6일 설치하였다. 각 시·도·군·읍·면 단위로 2637개의 지방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 이 위원회는 파월 장병 사기 앙양, 가족 지원, 파병에 관한 홍보·계몽, 전상자 원호대책과 함께 파월 기술자에 대한 행정적 조치도 함께 수행했다.

위문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위문사업을 위해 조성된 성금은 총 1억4천여만원이었고, 위문품은 1900여만점에 이르렀다. 1969년 발행된 주택복권의 당첨금이 300만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성금 총액은 집 40채가 넘는 엄청나게 큰 액수였다. 군대 파견을 결정한 것은 정부인데, 전투수당은 미국에서, 위문성금은 세금이 아니라 국민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

예컨대 동아일보 1969년 12월25일치를 보면 서울 고척국민학교생 일동이 5420원, 인천 한독실업고등학교 학생 일동이 8370원을 성금으로 납부했다. 코흘리개의 주머니를 털었다. 게다가 위문편지를 위한 엽서를 1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비싼 가격에 판매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초·중·고등학생들에 의한 600만통이 넘는 위문편지는 기본이었다.

돈과 물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파월장병 환송국민대회(1회, 1966년 백마부대), 파월개선장병 환영국민대회(7회, 청룡부대), 파월교체장병 환·송영행사(120회)에도 동원되어야 했다. 이외에도 파월 장병 가족을 돕기 위한 보리밭 노력 봉사, 부상병을 위로 봉사하기 위한 여학생 봉사단 활동 등도 이루어졌다. 1966년에는 ‘파월 장병 가족 돕기 운동의 달’이 지정되기도 했으며, 자산가들과 파월 장병 극빈가족 간의 자매결연 맺기 운동도 전개되었다.

군인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방법은 연예인 공연단의 파견이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연예인 공연단은 83차례에 걸쳐 1160명이 파월되었고, 모두 2922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영화 <님은 먼 곳에>(2008)에서 잘 보여주는 것과 같이. 또한 예술인과 종군 작가단의 파견은 마치 1940년대 초 태평양 전쟁 당시의 위문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징병기피자를 형사고발하기 시작

원호와 위문이 동원을 설득하기 위한 기제였다면, 정부한테는 동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회통제를 위한 메커니즘도 필요했다. 우선 한국 정부에는 더 많은 군인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징병제를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워야 했다.

1965년부터 본격적인 파병이 시작되자 한국군의 수는 60만에서 62만3천명으로 늘어난 데 반하여 1965년 이후 입대해야 하는 1945~1950년 사이의 출생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적었다.(조선일보 1967년 1월12일치) 국방부는 아직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던 21살 이상 30살 이하의 제1국민역 청년들에 대한 대대적인 징병 작업에 들어갔다.

1967년부터는 징병기피자를 모두 형사고발하기 시작했다. 과거와는 달리 형사고발 후 입영시키는 강경한 방침이었다. 또한 부산, 대구, 광주에 징병서가 신설되어, 거주지를 중심으로 근무소집, 검열, 점호 등이 실시되었다. 1969년 2월까지 전국에 상설 징병서가 설치되었다.

1968년부터는 대학생들에 대한 징집이 강화되었다. 징집 연기가 가능했던 24살 이상의 학생들에 대해 징집이 실행되었고, 장기휴학자들에게도 징집영장이 발부되었다. 새로운 조치에 의해서 징집영장을 받을 대상자는 2만여명에 이르렀다. 공군의 경우에는 1963년 이후 제대한 예비역을 재입대시키기도 했다.

1968년 예비군의 창설 역시 군을 통한 사회통제의 중요한 방식이었다. 1968년의 안보위기가 예비군 창설의 중요한 이유였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예비군 제도가 쟁점화된 것도 사회통제의 역할 때문이었다.

징병제도의 강화가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특정 세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주민등록법은 전국민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원래 주민등록법은 5·16 쿠데타 직후인 1962년 5월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 제1067호로 입법되었지만, 본격적인 실행은 베트남 파병 기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전투부대의 파병이 시작되는 1965년, 간첩을 단속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등록법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허위 기재를 처벌하고, 시·도민증을 항상 휴대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에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시·도민증의 항시 휴대가 가능했을까? 간첩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간첩들이 위조한 시·도민증을 갖고 활개치도록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주민등록 제도가 본격적으로 작동한 것은 1968년이었다. 1967년부터 계속된 남북 간의 충돌이 1968년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자 주민등록 제도는 비로소 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8년에도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0월 중순이 되면 전국적으로 94.6%의 국민들이 주민등록을 신고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남북 간의 충돌 심화, 그리고 이로 인한 안보위기로 더 이상 주민등록에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징병제의 강화와 주민등록 제도의 본격적 실행을 통해 사회적 동원과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월16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뜬금없이 ‘제2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물질적인 ‘제1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에 걸맞은 정신적 측면에서 ‘제2경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신면의 후진성’을 제거하는 정신 ‘개조’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그 맥락이 유사했다.

1972년 유신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1968년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국민을 성공적으로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동아전쟁과 한국전쟁 시기에 등장했던 애국적 어머니를 다시 만들어갔다.

“중대장님의 투철한 전투지도에서 승전의 열매를 못 맺고 전사했으니 중대장님께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허무하기 짝이 없으나 자유 월남전선에서의 승전을 보는 것이 아들을 곁에 둔 것보다 더한 기쁨으로 여기겠습니다.”(조선일보 1966년 3월24일치. 윤충로의 글에서 재인용)

베트남 파병 기간에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변화는 현재 한국 사회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특히 주민등록 시스템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고, 강화된 병역 제도와 예비군 제도를 통해 언제든지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병영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국민들에 대한 통제의 강화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비록 많은 국민들이 유신체제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베트남 파병 기간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통제 시스템을 통해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 의사를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그럼에도 모든 과정이 성공적이었는가에는 의문이 남는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침묵시켰지만, 1967년 부정선거 규탄 시위, 1969년 삼선개헌 반대운동 등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1971년 대학가를 휩쓴 교련 반대운동은 박정희 정부에 큰 위기로 다가왔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에 휴교를 선언하고, 1971년 12월 긴급사태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학생과 시민들의 움직임은 유신체제 아래 강력한 사회적 통제 속에서도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한국 사람들도 완전히 개조시키지 못한 한국 정부가 미국의 반전시위자들을 받아서 사상을 개조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게 자신이 있었다면 1969년 3선 개헌에 반대 서명을 한 미국의 평화봉사단원들도 ‘사상 개조’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반전시위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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