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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8 18:23 수정 : 2014.08.09 14:51

상대국 해안에 다가가 무선통신을 가로채 정보를 수집하던 매덕스호. 의회가 존슨 대통령에게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통킹만에서의 북베트남 어뢰정에 의한 매덕스호 공격은 명백하게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위키피디아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6) 통킹만 사건 50돌

50년 전 8월7일은 미국 역사상, 그리고 세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1964년 8월7일 미국 의회는 존슨 대통령이 의회 동의 없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있도록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동남아시아 결정’(또는 ‘통킹만 결정’)이 그것이다.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미국 정부는 유엔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으로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동맹국한테 베트남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이후 10년 동안 미국은 모든 국력을 베트남에 쏟아부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2차 세계대전과 같이 전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음에도 의회가 행정부에 대한 스스로의 견제권을 포기하고 대통령에게 전권을 위임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만큼 중대한 위기가 있었던 것인가? ‘동남아시아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그 5일 전 발생했던 통킹만 사건이었다.

미국의 신문들은 1964년 8월2일 베트남 연안에서 정찰 중이던 미국의 매덕스(Maddox)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미국 해군은 북베트남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이로 인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파괴되고 1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미군은 부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틀 뒤인 8월4일 존슨 행정부는 매덕스와 터너조이(Turner Joy)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두 구축함은 북베트남 연안으로부터 12해리(22㎞) 이내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매우 궂은 날이었고 주위에는 북베트남 함정이 하나도 없었다. 북베트남으로부터 실제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미국의 구축함들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중음파탐지기와 무선 신호를 발견했다.

매덕스호 장교·선원들과
항공기조종사, 국방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공격은 불명확
“2차 공격은 명백히 없었다”는
2005년 하뇩 보고서로 일단락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처럼
발생하지도 않은 공격 빌미로
통과된 50년 전 통킹만 결의
그로 인해 수많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베트남인들이 고통을…

의회, 존슨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 위임

미국의 구축함에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국방부에 전문을 보냈다. 매덕스호의 헤릭(John J. Herrick) 대령이 보낸 마지막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매덕스호에 가까이 있는 북베트남 함정으로부터 어뢰가 발사된 것 같다. 그러나 소리만 있었지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매덕스호의 어뢰 관련 보고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매덕스호 자체의 엔진 소리를 (어뢰 공격으로) 잘못 탐지한 것 같다.’

마지막 전문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존슨 대통령은 전면적인 보복 공격을 지시했다. 당일 저녁 존슨 대통령은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국의 함정들은 공해상에 있었다. 미국의 함정들은 방어적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남베트남 국민과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지원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그의 연설로부터 1시간 40분이 지난 뒤 미국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에 접근했고, 북베트남 연해의 어뢰정 기지와 원유저장고를 폭격했다. 의회에서는 곧바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의회의 동의 없이는 미국의 대통령도 자기 마음대로 전쟁에 개입을 확대할 수 없었다.

오리건 출신의 웨인 모스(Wayne Morse) 상원의원은 이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매덕스호의 전문을 재조사하고자 했지만, 전문은 제공되지 않았다. 주요 신문들도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정부의 발표만 주워담기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전쟁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결의안이 의회에서 8월7일 통과되었다. 모스 의원과 알래스카 지역구의 어니스트 그리닝(Ernest Gruening) 의원 둘만의 반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치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상황이 재연되는 것 같았다. 북한의 남침 후 사흘 만에 백악관에서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고, 일본에 있는 미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동시에 유엔군의 조직과 파병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의 불참 속에 미국은 전 과정을 주도하였다. 마치 북한의 남침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전쟁에서의 결정들이 3일 만에 이루어졌다면, 통킹만 결의안의 처리 과정은 5일 안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나?

통킹만 사건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의혹이 제기되었다. 먼저 정황상에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이미 10년 전인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선이 17도선 이북의 북베트남으로 확대되지 않았을 뿐이지, 게릴라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이 지원하던 남베트남 정부는 힘겹게 버텼지만 1963년부터 연속적으로 일어난 몇 차례의 쿠데타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도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도 높아만 갔다. 1960년부터 남베트남 게릴라에 대한 북베트남으로부터의 지원이 강화되면서 남베트남 정부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다.

제2기가 시작된 존슨 행정부는 북베트남으로부터의 지원을 차단하지 않고서는 반정부 게릴라들의 활동을 막을 수도 없고 남베트남 정부의 안정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1964년 5월부터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포함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다.(미국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NIE 50-2-64)’ 참조) 따라서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위해 미국 쪽이 의도적으로 통킹만 사건을 이용했거나 또는 고의로 일으켰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의회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인 1964년 8월14일 <타임>지는 정부 안에서 통킹만 사건의 상황에 대해 어떠한 논의도 없었다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미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했던 1973년에 가서야, <거짓의 정치>라는 책에서 존슨 대통령이 통킹만 사건 직후 대국민 성명을 발표할 때 그 자신은 물론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도 북베트남의 공격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2003년 공개된 존슨과 맥나마라의 전화 통화 녹음에도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격에 대한 정보만 있고, 공격했다는 내용은 없다.” 비밀해제된 통킹만 공격에 관한 비밀문서들. 박태균 제공
푸에블로호와 같은 임무 맡은 매덕스호

통킹만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는 사건으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관련자들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해군 항공기 조종사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의 회고록(1984년)에 따르면, 그는 비행 중 매덕스호의 보복 공격을 목격했는데 그 근처에는 어떠한 북베트남의 해군 함정도 없었으며 단지 검은 바다와 유령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터너조이호에서 매덕스호를 향해 무엇인가를 발사하는 것 같았다.

통킹만 사건 후 30년이 지난 1994년 또 다른 폭로가 잇따랐다.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존슨 대통령이 사석에서 ‘우리의 해군이 고래를 쏘았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매덕스호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에 관한 전문을 보냈던 헤릭 대령은 북베트남 해군의 매복이나 공격에 대해서 전혀 확신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전문을 분명하게 국방부에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오히려 미군 쪽이 남베트남 해군 및 라오스의 공군과 함께 북베트남을 공격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매덕스호에 승선하고 있었던 정부 관료들과 선원들도 이와 유사한 증언을 했다. 또한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반대했던 존슨 행정부 내의 핵심 관료 중 한 사람인 조지 볼(George Bowl)은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통킹만 사건이었다고 밝혔다. (Tonkin Gulf and the Escalation of the Vietnam War. 1996)

매덕스호의 임무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매덕스호는 1968년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던 푸에블로호와 같은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아직 인공위성에 의한 정보활동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정보함에 의한 무선통신 가로채기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정보함의 경우 최대한 상대국의 해안에 다가가야만 했다. 또한 무선통신의 가로채기를 위해서는 적을 자극해서 더 많은 무선통신이 사용되도록 해야 했다. ‘치고 빠지기’ 방식의 공격이 있었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매덕스호가 북베트남의 공격을 유인해 냈을 가능성도 있었다.(Body of Secrets, 2002)

사족을 하나 달자. 매덕스호의 정보함으로서의 임무를 고려한다면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북한이 얼마나 큰 위협을 느꼈을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미국 정보함의 활동은 푸에블로호가 처음이 아니었다. 1967년 12월에도 북한에 의해 미군의 정보함이 나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조선일보> 1967년 12월26일치) 푸에블로호 사건은 통킹만 사건과 너무나 유사했다. 실제로는 보복 공격도, 전면전으로의 확전도 없었다. 북한이 푸에블로호에 타고 있었던 미국인 선원 70여명을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베트남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존슨 행정부의 ‘학습효과’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북한은 국방비를 획기적으로 늘렸고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북한 경제의 침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시 통킹만으로 돌아가보자. 2003년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의회에서 ‘동남아시아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1964년 8월4일의 공격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장군은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촉발시키기 위해 정보함을 북베트남 인근에 파견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매덕스호는 북베트남이 경계로 설정했던 12해리 이내로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으며, 당일 북베트남의 어선을 공격했다.

이러한 논란은 2005년 10월 <뉴욕 타임스>에 국토안보국 소속의 역사담당관 하뇩(Robert J. Hanyok)의 보고서 일부가 보도되면서 명백한 문서들에 대한 조사로 일단락되었다.(“스컹크, 국적불명기, 조용한 사냥개, 그리고 날아다니는 물고기: 1964년 8월2일부터 4일까지의 통킹만 미스터리”) 이 보고서는 원래 2001년에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이라크 전쟁 문제와 연계될 수 있을 가능성 때문에 5년여 동안 공개가 거부되었다. 1964년 통킹만 당시의 문서를 조사한 하뇩은 1차 공격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의회 결정의 결정적 계기가 된 2차 공격은 명백히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하뇩 보고서가 일정하게 ‘세탁’되어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은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해인 2008년이었다.

2008년 1월 중동의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의 해군 함정과 미군 함정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국무부 산하 국가정보평가(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보고서 팀 소속이었던 한 요원은 이라크에서의 대량살상무기 논란과 통킹만 사건의 경험을 상기하였다.(http://www.consortiumnews.com/2008/011108a.html) 하나의 조작된 사건이 이후 미국을 어떠한 구렁텅이에 빠뜨렸는가?

1970년대에 ‘한국전쟁의 기원’ 출간된 사정

영화 <그린 존>(2010)은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개입한 미군의 이야기를 그렸다. 결국 대량살상무기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미군이 철수하기는커녕 더 깊이 개입하였다. 50년 전 오늘. 발생하지도 않았던 공격을 빌미로 통과된 통킹만 결의는 250만여명의 미군, 그리고 50여만명에 달하는 한국군을 전선에서 고통받도록 했다. 그 기간 동안 전쟁터에 있었던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냉전시대엔 국가의 결정에 대해 어떠한 토도 달기 어려웠다. 이데올로기라는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토를 달면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국가안보에 관한 한 언론들 역시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국가의 결정이나 극단적인 사람들의 주장은 어떠한 검증도 받지 않은 채 그냥 사실이 되었다. 매카시즘, 통킹만 사건, 이라크 전쟁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최근 무죄 선고가 다시 내려지고 있는 과거사 사건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리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과 관련된 문서들이 창고 안에 묻혀 있거나, 아니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 정부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음에도, 통킹만의 진실을 밝혀줄 문서들을 공개했다. 미국 시민들은 감정적으로만 반전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든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 1970년대 반전운동 당시에는 베트남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그때 공개되었던 1940년대 주한미군정의 문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의 사례를 통해서 베트남의 사례를 읽으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되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모든 사건의 진실은 밝혀진다. 문서를 통해서,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언론의 협조 속에 왜곡된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치러야만 하는 비용은 무엇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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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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