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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2 18:28 수정 : 2014.08.24 11:21

해병대에 지원하여 베트남전쟁에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입은 뒤 반전운동에 참여한 론 코빅의 실화를 원작으로 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7월4일생>의 한 장면. 통킹만 사건으로 본격화된 베트남전쟁은 채 3년도 되지 않아 반전운동의 벽에 부닥치기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7) ‘구정 공세’와 반전운동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음모로 시작된 전쟁은 곧 벽에 부닥쳤다. 통킹만으로 본격화된 전쟁이 채 3년도 되지 않아 미국 사회에서 ‘신뢰 갭’(credibility gap)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발표와 실제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적 움직임으로 확산되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7월4일생>의 주인공과 미국 현대사를 풍자적으로 그린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이 베트남전쟁을 다녀와 맞닥뜨린 현실은 반전운동의 물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환호 속에 귀향했던 그들의 선배들과 달랐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조용히 귀국했던 선배들과도 달랐다.

1969년 어느 날 베트남에서의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필리델피아 공항에 내린 한 병사는 한 손에는 콜라, 다른 한 손에는 맥주를 든 채 한 여성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기분이 어때요?” 그들의 일부는 좌절했고, 다른 일부는 오히려 반전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7년 5월 전쟁에 대한 반대를 선언했다. 그는 존슨 행정부의 ‘빈곤과의 전쟁’ 프로그램으로부터 희망을 찾고자 했지만, 그가 찾은 것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다. 빈곤한 흑인들이 넘쳐나던 남부 조지아와 할렘가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자유를 찾겠다고 8000마일이 넘는 곳에 가서 죽어가는 형제들이 있을 뿐이었다.

반전운동에는 소집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군 소집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적극 나섰다. 그들은 어머니, 누나, 연인, 부인의 이름으로 그들의 아들, 남동생, 연인, 그리고 남편이 전쟁터에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의 여성들은 전쟁과 징집에 반대하는 것을 합법으로, 징집을 통해 젊은 세대를 전쟁에 몰아넣는 정부의 정책을 범죄로 규정했다.

54㎏ 이하면 군대에 빠졌기에
젊은 미국 청년들이 살을 뺐다
군의관이 “자살 고민” 물으면
흔쾌히 “그렇다”고 답했다
대학 가거나 소집영장 불태웠다

1968년 구정공세는 베트콩 실패
미국에선 반전운동이 확산됐지만
닉슨을 뽑는 악수로 이어졌다
위기는 기회, 기회는 곧 위기
한국의 1997년이었다고나 할까

한국전쟁 빨치산 오류 되풀이한 베트콩

베트남에 가기 싫었던 젊은이들은 대학에 들어갔다. 일정 기간 연기가 가능했다. 징병소에 간 젊은이들은 어떻게든 빠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몸무게가 54㎏ 이하가 되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살을 뺐다. ‘자살을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군의관에 질문에 대해서는 흔쾌히 ‘그렇다’고 말했다. 그래도 안 되면 소집영장을 불태웠다.

참전 군인 중 하나였던 케리는 1971년 4월 상원 청문회에 섰다. 그는 베트남에 다녀온 모든 참전 군인들을 대신하여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700년 전에 있었던 칭기즈칸의 정벌에 비교했다. 싹쓸이였다. 베트남에서의 상황 중 미국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그들이 한 일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범죄적 위선이었다.

미국 사회 내에서 처음부터 반전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결정적인 전환은 1968년의 구정공세(Tet Offensive)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음력설을 쇠는 베트남에서 베트콩의 구정공세가 있었던 시점은 한국에서 청와대 습격사건에 이은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발한 지 일주일 후였다.

베트콩은 주요 도시와 남베트남군, 미군, 한국군 기지에 대해 총공세를 펼쳤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사이공도, 미국대사관도 공격을 받았다. 전쟁에 지친 것은 미군이나 한국군뿐만 아니라 베트콩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전세 역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더 가다가는 전쟁에 지친 남베트남 사람들의 인심이 베트콩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베트콩은 총공세를 펼쳤다. 밀림과 농촌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베트콩들은 대도시를 공격, 장악함으로써 전황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보고자 했다.

연휴 기간 동안 휴전을 하자는 합의를 어기고 기습적 공격을 감행했음에도 결과는 베트콩의 대패였다. 일시적으로 대도시의 일부를 장악했지만, 그들은 곧 물러나야 했다. 게릴라 전투는 소부대를 중심으로 싸워야 했고, 활동 지역에서 친베트콩 민간인들의 지원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베트콩을 지지했던 민간인들의 활동은 비밀조직을 통해 운영되었다. 게릴라들의 군사전략도 때로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도시를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는 이와 달랐다. 대부대가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또한 외부에서의 공격에 호응하기 위해 민간인들의 비밀조직이 공개적으로 활동해야 했다. 이러한 공격이 성공하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상황은 100%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로 재편성된 게릴라들은 도주하거나 은폐하기가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베트콩의 공격에 호응했던 민간인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그대로 노출했다.

베트콩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범했던 오류를 그대로 반복했다. 빨치산은 게릴라 부대였다. 소규모로 이동하면서 주변 민간인들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북한의 노동당은 빨치산 부대를 남부군이라는 거대한 부대로 개편할 것을 지시했다. 대부대는 대규모 작전을 하기에는 유리했지만, 대부대의 이동은 자신들을 숨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다시 소부대로 재편을 위한 지시가 전달되었을 때에는 이미 남부군의 대부분이 괴멸된 상태였다.

베트콩들은 또한 대공세 시기에 대도시에서 베트콩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고 남베트남 군대가 총구를 돌릴 것으로 예상했다. 대규모 봉기는 없었다. 군대 내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1950년 봄 스탈린을 만난 북한의 지도부는 북한에 의해 남침이 시작되면 남한에 있는 20만 이상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어떠한 폭동도 발생하지 않았다. 1946년의 이른바 ‘대구사건’, 그리고 1948년의 ‘여순사건’ 등을 통해 비밀조직들은 이미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1949년 이후 광범위하게 진행된 좌익 숙청과 농지개혁으로 인해 남한에서 북한의 남침에 호응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TV로 자식들 죽는 모습을 지켜보다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과 미국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구정공세의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 베트콩을 반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 구정공세를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이 티에우의 판단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구정공세로 전체 베트콩 중 최소한 5분의 1이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은 만약 20만명의 전투병들이 더 투입된다면, 미국이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가왔다고 판단했다. 만약 미국에서 더 이상 차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한국에서 차출해야 한다는 것이 미군 사령관의 요청이었다.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베트콩과 북베트남은 ‘전례없는 성공’을 이루었다고 자평했다. 마치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남베트남 부대의 3분의 1, 미군 부대의 5분의 1이 전멸되었다고 평가했다. 대도시 장악이라는 원래 목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농촌에서 지배력이 확대되었으며, 남과 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구정공세 두 달 뒤인 1968년 3월에 나온 공산주의자들의 이 보고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더 많은 적을 전멸시키지 못했고, 정치적으로는 더 조직화된 힘이 부족하였으며, 많은 이들을 사상전향시킬 리더십도 부재했다. 우리는 견고함이 부족하였으며, 우리의 계획은 너무 단순하고, 우리의 조직은 조잡했다. 전선으로부터의 보고와 전투부대에 대한 중앙의 요구는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다.’

구정공세의 결과가 베트콩의 의도와는 반대로 미군의 승리를 가져왔다면,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구정공세를 계기로 더 확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월 미군 사령관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전쟁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왜 베트남전쟁의 빠른 종결을 주장했던, 공화당의 닉슨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존슨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 요원이었던 로버트 코머는 구정공세로 게릴라들의 핵심이 파괴되었다고 회고했다. 코머에 따르면 구정공세는 하노이에 의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도박’이었고, 마오의 농촌전략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트콩들의 구정공세는 워싱턴을 패닉 상태로 만들었다. 미국의 지도부들이 전쟁에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코머는 이것을 ‘구정 쇼크’(Tet Shock)라고 명명했다.

1967년 말 베트남에 있는 미군 장성들이 ‘1968년은 성공적인 해가 될 것’이라고 했던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1967년까지 워싱턴으로 가는 보고에는 미군의 빛나는 승리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렇게 괴멸적 타격을 입은 적들이 어떻게 40개가 넘는 도시와 마을을 동시에 습격할 수 있을까? 여기에 더해 구정공세 직전에 있었던 북한에 의한 푸에블로호의 70여명에 이르는 미군 선원 억류는 워싱턴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남베트남 사람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전투가 진행되더라도 대도시는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졌다. 티에우 대통령은 구정공세를 통해 남베트남 사람들의 지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지만, 티에우 정부의 버팀목이었던 대도시에 거주하는 특권층과 중산층마저도 더 이상 티에우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

1968년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이자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암살당하기 직전 구정공세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 그 핵심을 찔렀다. 베트콩들은 분명 퇴각할 것이지만, 그들은 남베트남의 어느 누구도, 어느 곳도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고 선언할 것이다. 이제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 군인들이 용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본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맥나마라의 후임으로 취임한 클리퍼드 국방장관도 흔들렸다. 그는 20만 병사가 더 있으면 승리의 팡파르를 울릴 수 있다는 주월미군 사령관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적들도 똑같이 병력을 증강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에 들어가는 예산을 증가시킨다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단지 국제수지 악화와 물가 상승과 세금 인상, 그리고 임금 동결을 야기할 것이다. 클리퍼드 장관은 스스로 자문했다. ‘지난 4년 동안 베트남에 엄청난 양의 폭격을 했다고 해서 적들의 의지가 반감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구정공세를 티브이(TV)를 통해 지켜본 국민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동네 청년들, 옆집 총각, 친척 조카,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구정공세 시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시민들은 더 이상 늪 속에 젊은이들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전운동은 더 힘을 받았고, 깊숙한 개입을 결정한 지도자들은 이제 무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2006년 북한 핵실험 때처럼 하노이를 인정

존슨 대통령은 1968년 4월15일 하노이의 호찌민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북베트남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만들어낼 때 베트콩과 그들을 돕는 북베트남은 단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들이 대화의 상대가 된 것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북한 정부를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던 부시 행정부가 2006년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했던 것과 같이 너무 많은 비용을 치른 뒤에야 협상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시기와 공간을 너무나 많이 뛰어넘는 비약이 되는 걸까?

협상을 제안하면서도 존슨이 잊지 않았던 것이 있다. 만약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엄청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 그러나 물러선 것은 호찌민이 아니라 존슨이었다. 존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시민들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했다. 다음 대통령은 전쟁을 빨리 끝낼 사람이어야 한다.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가 사회적 분위기와 정책 결정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고,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패배였다는 주장도 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악수를 두었다. 닉슨을 선택한 것이다.

구정공세는 베트콩의 실패였다. 그러나 역으로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고, 정권이 교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기는 기회이고, 기회는 곧 위기로 다가온다. 1997년 위기는 한국 경제 구조를 건강하게 재조정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양극화와 비정규직이라는 또 다른 위기를 가져왔다. 구정공세는 반전운동의 고조라는 위기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미국이 베트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인간이 만드는 역사가 그렇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국 내에서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면서 다시 한 번 한국전쟁의 망령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최대한 명예롭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적을 어떻게 압박해야 할 것인가? 닉슨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지도자였을까? 베트남전쟁의 종결을 공약으로 내건 닉슨이 취임한 지 4년이 지나서야 미군의 전면 철수를 지시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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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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