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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04 18:40 수정 : 2014.09.04 18:40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닉슨이 내세운 데탕트는 전세계가 냉전으로부터 정상화되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베트남전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히스토리채널 <바이오그래피-리처드 닉슨>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8) 닉슨 긴장완화의 이면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1968년 11월 미국은 닉슨을 선택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의 선택이었다. 닉슨은 앨저 히스(Alger Hiss) 사건으로 유명해진 보수적인 반공 정치인이었다. 앨저 히스 사건은 1948년 전 <타임>지 편집인이었던 휘터커 체임버스가 히스 등 전직 국무부 관리들을 소련의 간첩이었다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된 매카시즘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고, 이 사건으로 스타가 된 닉슨은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물을 먹었지만, 1968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일약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의 한 진보적 역사학자는 한국전쟁이 미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부작용은 닉슨이 유력한 정치인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지적할 정도로 그는 강력한 보수적 반공주의자였다. 그러한 반공주의자가 베트남에서 전쟁을 ‘명예로운 평화’와 함께 끝내겠다고 약속하고, 공산주의 중국의 문을 열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아니 어쩌면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만났을 수도 있었다. 그를 아는 미국 시민사회의 누구도 그를 제5열로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종결’은 공약이되 철학은 아니었다

전쟁에도 지쳤지만, 히피 문화와 반전운동에 지친,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중산층이던 ‘침묵의 다수’는 닉슨의 가장 중요한 지지층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닉슨은 성경의 이사야서 제2장 4절의 말씀으로 선서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베트남 문제를 두고 총과 칼이 아닌 경제로 돌아가겠다는 정책은 이미 존슨 행정부 말기에 시작되었다. 존슨 행정부는 1968년 말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는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닉슨은 존슨 행정부의 정책을 계승하지는 않았다. 마치 2001년 시작된 부시 행정부가 에이비시(ABC: Anything But Clinton) 정책을 통해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원점으로 돌려놓은 것처럼.

닉슨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한 것은 그의 공약이었지만, 그의 철학은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피한 조처였다.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곳간이 비었다는 것이었다.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4.7%로 한국전쟁 이후 가장 높았다. 존슨 행정부에서 복지정책을 확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너무나 많은 전비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국방비의 과다한 증가는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를 가져왔다. 닉슨으로서는 정부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통화팽창을 막고 인플레이션을 잡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불가피하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국방비의 과도한 증가로 인해
재정적자와 함께 인플레이션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흔들리자
미국은 수입관세를 만들었다
한국경제는 결정타를 맞았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는
닉슨의 대통령 취임사는
전쟁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미국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재정과 경제에서의 위기는 반공주의자이던 그가 베트남에서 철수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1953년 백악관에 들어온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국방비 증가, 재정적자,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뉴룩’(New Look) 정책을 실시했던 것과 동일한 과정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계획’(Ever-ready Plan)을 입안하면서까지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은 공히 군사비를 줄이기 위하여 해외에 있는 미군의 재편을 추진했고, 주한미군 감축을 실시했다.

닉슨 행정부의 재정 문제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보다 더 심각했다. 1950년대 초 한국에서보다 1960년대 중반 베트남에서 미국은 더 많은 돈을 썼다. 한국전쟁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에서 더 큰 규모의 재정적 지원을 해야만 했다. 유엔군을 모두 포함하여 120만명(미군 48만명 포함)이 동원된 한국전쟁과, 미군과 한국군만으로도 300만이 동원된 베트남 전쟁은 그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남베트남 군인들의 해외전투수당까지 미국이 지급했다.

게다가 존슨 대통령의 안보 담당 고문이었던 월트 로스토는 남베트남에 심리전의 측면에서 전략촌을 만들어 반정부 게릴라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사회·경제적 지원을 해야만 했고, 동맹국 중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한 한국에 대해서는 군사원조뿐만 아니라 특별 경제원조를 실시하였다.

통킹만 사건 이후 의회로부터 모든 권력을 허용받은 존슨 행정부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했고, 1970년 의회는 베트남 전쟁에 사용된 돈을 조사하기 위해 사이밍턴 위원회를 구성했다. 미국 정부가 적절하게 사용했는가에 대한 조사가 우선적인 것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돈으로 파병을 했던 아시아 동맹국들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돈을 적절하게 썼는가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필리핀, 타이(태국) 등 아시아 파병국에 대한 사이밍턴 위원회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보고서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 정부가 얻은 이득은 일본보다는 적었고, 타이완(대만)보다는 많은 액수였다. 청문회에서는 한국이 그렇게 많은 이익과 군사적 원조를 받았음에도, 인구수도 남한에 비해서 적고 경제력도 우월하지 못한 북한에 대해서 스스로의 방위를 담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의하기도 했다.

미국 내 경제위기는 세계적 경제위기로 상승작용을 했다. 우선 전쟁 물품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전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운송비를 줄일 수 있는, 베트남에 가까운 지역에서 가능한 한 값싼 제품을 구매해야 했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존슨 정부가 1950년대처럼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을 고수했다면, 정부의 재정 상태가 안 좋아졌다 하더라도, 미국 내 경제적 상황은 좋아질 수도 있었다.

‘바이 아메리칸’을 고수할 수 없는 상황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상황이 그랬다. 정부의 재정은 군사비 증가로 안 좋아졌지만, 대부분의 군수품을 미국에서 조달함으로써 미국 기업들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부를 일본에서 조달했지만, 전쟁 패망으로 산업시설이 거의 다 파괴되었던 일본과 이제 막 식민지에서 해방된 주변국으로부터 대규모 군수물자 조달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는 가능하면 가장 싼 군수품을 구매하고자 했으며, ‘더 많은 깃발’(More Flag)에 동참해서 파병해 준 동맹국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은 한국전쟁과 1950년대를 통해 아시아 최고의 경제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고, 동남아시아의 동맹국들은 1950년대 말 일본으로부터 전쟁 배상금과 기술원조를 받으면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국은 승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1965년에 가서야 배상금이 아닌 청구권 자금을 받았지만, 1960년대 초 케네디 행정부의 경제개발원조에 힘입어 공업화를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의 개발도상국 동맹국 중 베트남 주변의 타이와 필리핀이 파병에 동참했고, 한국은 동맹국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해 준 상태였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던 영국이나 프랑스가 파병을 외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파병 요청을 수용한 이들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군수품 조달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 존슨 행정부의 사정이었다.

필리핀은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매년 5%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타이의 경우 1965년부터 1969년 사이 실질성장률이 12%에 달했다. 파병을 하지 않았던 대만도 1964년부터 1973년 사이 11.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7년부터 1971년 사이 한국의 성장률은 9.6%였다. 한국의 경우 1969년부터 부실기업 문제에 부딪혔던 점을 고려한다면, 닉슨 행정부의 긴축정책이 시작되기 이전인 1967년과 1968년 집중적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파병한 동맹국들이 성장하고 있는 동안 미국의 경제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이제 브레턴우즈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시작된 이래로 전세계는 달러라는 기축통화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달러만이 금과 교환될 수 있는 화폐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졌다. 금 1온스는 35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세계 무역과 환율은 모두 달러의 가치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무역적자로 인해 금이 계속 유출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달러의 가치가 점점 떨어졌다.

1968년 3월 금의 이중가격제가 시작되었고, 달러의 가치 하락은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에 인플레이션의 확산을 가져왔다.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이 흔들리자 국제통화기금(IMF)은 부족한 달러와 금 대신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 SDR)을 발행하여 달러나 금 없이도 국제무역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세계 무역량이 커지면서 더 이상 달러가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던 측면도 있었지만, 달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1969년이 되면서 국제통화기금은 전세계 회원국들한테 재정안정계획을 적용하도록 하였고, 신규 외화 대출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어떤 조처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미국 경제의 위기를 막을 수 없었다. 1970년 말 온스당 37달러에서 1971년 7월 말에는 42달러로 급증했다. 여기에 더하여 무역수지 적자로 인해 미국의 자산이 145억달러인 데 반해 해외 채무 잔고가 206억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의 무역수지는 적자로 가고 있는데, 서독과 일본의 국제수지 흑자폭은 더욱 확대되고, 외환 보유액마저 급증하였다.

이에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되었음을 선언했다. 달러의 기축통화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아울러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미국의 대외원조액 10% 삭감, 향후 90일 동안 임금 및 물가 동결, 관세 부과의 대상이 되는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의 수입부가세 부과를 선언했다. 또한 소비 진작을 위해 자동차 구입 때 부과되는 10%의 소비세를 철폐하고 향후 1년 동안 투자 촉진을 위한 세금 중 특혜 10%를 산업계에 제공하도록 결정했다. 연방예산 지출액 47억달러 삭감과 연방정부의 고용자 5% 감원 역시 이 선언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닉슨의 결정은 한국 경제에 결정타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가장 큰 수출대상국이었다. 그런데 닉슨 행정부에 와서 수입부가세가 신설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 예외조항을 주었던 면직물 수출에 대해서도 쿼터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 한-미 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문제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면직물 쿼터 시스템의 도입 역시 주한미군 문제 못지않은 중요한 현안이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 수출에 집중했던 한국으로서는 이제 새로운 분야의 수출 품목을 찾아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1969년의 부실기업 위기와 1972년의 8·3조치 역시 미국발 경제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도 미국의 무역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케인스 밀려나고 신자유주의 시대로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세계 경제를 호령하던 미국이 아니었다. 베트남 개입은 무소불위의 미국을 치사한 호랑이로 만들었다. ‘자유무역’을 세계질서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주장하던 미국은 수입관세를 만들어야 했고, ‘개발의 10년’이라고 하면서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을 호언장담했던 미국은 이제 사라졌다. 개발도상국이 발전해야만 선진국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외쳤던 미국한테 이제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장’이 모든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케인스는 뒷방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는 선언을 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평화를 위해서 무기를 생산도구로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너무나 깊이 빠져버렸던 미국이 치를 수밖에 없는 비용이었다.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내세운 데탕트(긴장 완화)와 ‘레알 폴리틱’(현실주의 정치)은 전세계가 냉전으로부터 정상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위기로 인한 불가피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베트남화’가 베트남에서의 ‘명예로운 철수’를 위한 방안이었다면, 데탕트와 ‘레알 폴리틱’은 경제위기로부터 ‘명예로운 탈출’을 위한 간판이었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후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이길 때 했던 말을 되새겨야만 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보습과 낫을 만들 닉슨이 아니었다. 일단 칼과 창을 휘둘러서 보습과 낫을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고자 했다. 막상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한 닉슨 행정부 시기에 와서 반전 시위가 더 거세게 일어난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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