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프놈펜의 킬링필드 전시관. 1985년 만들어진 영화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의 잔인함을 고발했지만, 막상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는 배경에 미국의 폭격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역사적 배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9) 닉슨의 욕심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닉슨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국가안보 연구 비망록 제1호, 1969년 1월21일)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 초 일주일에 300명의 미군이 베트남 전선에서 희생되고 있었다. 1954년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돕자고 주장했고, 존슨 대통령의 점진적 전쟁확대 전략에 대해서 비판했던 닉슨이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전쟁을 끝내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1970년에는 상·하원의 총선거가 있었고, 1971년에는 제2기를 위한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자신의 성과를 보여야 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레어드(Melvin Laird)에 따르면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그에게는 어떠한 계획도 없었다.”
닉슨이 처음으로 내놓은 성과는 괌에서 발표한 ‘닉슨 독트린’이었다. 미국이 완전히 발을 빼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인의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그는 마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who help themselves)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공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
하나의 재앙이 된 1971년 라오스 공격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이미 미국은 케네디 행정부에서부터 대외원조 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무조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회를 개조하고 발전시킬 의지를 갖고 있는 국가에만 원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는가? 케네디 행정부 시기부터 시작했던 ‘전략촌’ 캠페인을 강화했다. 농촌을 발전시킴으로써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베트콩이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통제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작전으로 바뀌었다. 이주를 강제하기 위해 원거주지에는 고엽제를 뿌렸다.
만약 이 정책이 성공했다면, 애초에 남베트남에 미국이 개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967년 선거로 집권한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겉으로는 안정된 권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1969년 5월27일부터 한국을 방문했고, 전임 응오딘지엠(고딘디엠)처럼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71년에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부 및 화교 자본과 얽혀 있는 부정부패 위에서 표면적으로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상황은 지엠 시절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고, 베트콩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닉슨의 정책은 ‘명예로운 철수’(peace with honor)로 불리었다. 키신저의 회고에 의하면 드골이 알제리에서 프랑스를 구했듯이 닉슨은 베트남에서 미국을 구해야 했지만, 그것이 패배로 비쳐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왜 ‘명예로운 철수’였어야 했는가? 베트남에서의 철수 과정은 이후 미국의 위신을 좌우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표를 준 유가족들의 비통함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를 위해 닉슨 행정부가 표면적으로 취한 조치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였다. 1947년 주한미군 철수를 준비하면서 내놓았던 ‘한국화’(Koreanization)와 같은 용어로 미군이 하고 있었던 역할을 베트남 사람들이 직접 담당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베트남화’ 정책은 실현 가능한 정책이었는가? 가능했다면 미국이 왜 개입을 했겠는가? 결국 닉슨은 화전 양면의 정책을 선택했다. 한편으로는 평화협상을 제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 강한 공격을 통해 상대방이 재기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다운 결정이었다. 아울러 상대방에 대한 강력한 공격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더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믿었다.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독트린을 발표하기 이전인 1969년 3월 비밀리에 북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 존슨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기 직전 평화협상을 위해 단행했던 폭격 중지 조처가 취소되고 폭격이 재개되었다. 1969년 7월 베트남을 방문한 직후에는 ‘호찌민(호치민) 루트’를 봉쇄하기 위해 라오스로 공격을 지시했다. 라오스는 케네디 행정부 시기인 1961년 제네바 협상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기로 미국도 합의한 곳이었지만 ‘명예로운 철수’를 추진하는 닉슨에게 케네디의 합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970년과 1971년에는 미군 대신 남베트남군을 앞세워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대대적인 지상작전을 전개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확전을 지시한 것이다.
1971년 라오스에 대한 공격은 미국한테는 하나의 재앙이었다. 람선(Lam Son) 719 계획으로 명명된 공격 작전은 남베트남군에 의한 공격 구상이었다. 북베트남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의 권고보다도 훨씬 적은 1만7000명을 동원할 능력밖에 없었다. 남베트남군의 절반인 8000명이 사망했다. 100여대의 헬리콥터가 추락했고, 600대가 손상되었으며, 55명의 미군이 작전 중 사망했다.
닉슨은 의회에 라오스에서의 공격이 성공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시민들은 저녁 뉴스를 통해서 라오스로부터 나오기 위해 헬리콥터에 매달려 있는 남베트남 군인들을 목격했다. 북베트남이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정부의 주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에이브럼스 사령관하의 새로운 리더십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주장은 사회적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 물량공세를 퍼붓고도 아무런 성과 없이 그 지역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더 중요했다. 닉슨은 애그뉴 부통령에게 ‘왜곡’된 내용을 보내는 텔레비전을 폭파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
닉슨은 폭격을 통한 압력이 평화협상에 유리하게 작동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미국이 폭격을 통해서 얻어낸 것은 거의 없었다. 베트남전 때 융단폭격에 나섰던 B-52 폭격기.
|
패배로 비쳐선 안 되었다
그래서 취한 조처가 ‘베트남화’
1947년 주한미군 철수 준비 때
내건 ‘한국화’와 같은 용어였다 캄보디아 폭격은 한국전쟁 때
38선 부근 고지전의 재판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상의 잘못된
교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폭격은 4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같은 시기 닉슨은 북한에 대한 핵 공격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가 취임한 직후 미국의 정보기 EC 121이 동해상에서 격추되자 입안된 작전명 ‘자유로운 투하’(Freedom Drop)가 그것이었다. 평양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폭풍’(Fresh Storm) 작전도 입안되었다. 만에 하나 북한이 반발할 경우 미국이 한반도에 또다시 묶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들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닉슨 행정부의 정책은 한반도를 또 다른 전쟁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었다. 티에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을 협상 대상자로 인정하면서 평화협상은 조금씩 진전을 보였다. 마치 1963년 민정이양을 둘러싼 한-미 간의 갈등이 노정되었을 때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했던 것처럼, 경제/군사 원조를 빌미로 티에우에게 협박을 가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노이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폭격을 시행했다. 결국 1973년 1월이 되어서야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재선 이후 6개월 안에 미군을 전면 철수하려고 했던 닉슨의 계획은 그대로 실행됐다. 4년 동안 미군 1만8000명, 최소한 10만7000명의 남베트남 군인, 그리고 50만여명의 북베트남 군인이 죽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1951년부터 1953년 사이 한반도의 고지에서 죽어갔던 것처럼. 캄보디아에서만 4년간 54만여톤의 폭격으로 80만명이 희생되었다. 평화협상이 전쟁을 멈추기 위한 것이었다면, 협상이 시작되는 순간 전투행위는 멈추었어야 했다. 최소한 100여만명의 생명은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키신저의 피투성이 노벨평화상 미국의 공세전략은 스스로 도미노이론을 증명하기도 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공세에 의해 호찌민 루트를 이용했던 북베트남군은 캄보디아 주민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내륙 지역으로 밀려났고, 이들의 영향력 아래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이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한 것이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북베트남군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은 크메르루주 치하에서 1979년까지 4년 동안 무려 100여만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부르주아지라는 이유만으로. 1985년 만들어진 영화 <킬링필드>는 그 처참함을 고발했지만, 막상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는 배경에 미국의 폭격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역사적 배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1973년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모든 외국 군대는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닉슨의 욕심과 국방부의 잘못된 교훈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했다. 파리 평화회담을 이끌었고, 중국의 문을 연 키신저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평화상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