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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8월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박정희(연단 왼쪽)와 닉슨이 공식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닉슨은 한반도에서의 미군 감축과 철수 가능성을 일축했고, 박정희는 미국 정부가 철수를 요구할 때까지 베트남에 한국군을 주둔시키겠다고 말했다. 닉슨은 곧 말을 바꿨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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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0) 서서히 발 빼는 미국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닉슨 독트린으로 베트남 파병국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파병했건만 철수와 관련해서는 파병국들한테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 또한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한국, 타이, 필리핀군은 더 이상 베트남에 주둔할 명분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 없이 파병한 소규모 군대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군의 경우 5만명 정도가 파병되어 있었고,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지만, 미군 없이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미 공군의 엄호를 받아서 작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의 또 다른 고민은 자국에 주둔하는 미군 문제였다. 한국과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타이는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미군한테 군사기지를 양여하고 있었다. 3국에 있는 미군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한국은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정전 상태였고, 1960년대 말까지 북한의 경제 상황이 남한보다 더 나은 터였기 때문에 안보를 위해 미군의 주둔이 필요했다. 타이는 베트남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쟁터가 된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필리핀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지만, 내부 공산 게릴라의 활동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양담배, 그리고 기지촌 여성
미군 주둔의 또 다른 역할은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주둔 미군을 위한 조달 역시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해외의 미군은 주둔을 위한 대부분의 물품들은 본국으로부터 공수했지만, 일부 품목은 주둔지로부터 조달했다. 미군 주둔 지역의 정부들은 미군에게 더욱 많은 군수품을 조달함으로써 경제적 효과를 누리기 위해 미군 쪽과 다양한 형태의 교섭을 벌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주둔군 지위협정(SOFA)을 위한 교섭에 적극적으로 착수한 것은 미군 범죄에 대한 사회적 여론 탓도 있었지만, 한국산 물품의 조달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또한 미군들이 자국에서 사용하는 휴가비 역시 경제에 큰 보탬이 됐다. 한국인들의 주요 관광지인 타이의 파타야와 필리핀의 클라크는 모두 미군 기지가 있었거나 미군들의 휴양지로 개발된 곳이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60년대 초 군사정부에서 군산 지역에 기지촌을 만들어, 주한미군이 일본이나 필리핀에서 휴가비로 쓰는 돈을 국내에서 쓰도록 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주둔군 지위협정의 체결을 요구했다. 전투부대가 파병된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주둔군 지위협정 협의를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미군이 사용하는 지역의 대여와 회수 문제였지만, 경제적 이슈 역시 매우 중요한 협의 사항이었다.
닉슨독트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예외라는 정상회담 약속
석달만에 주한미군 감축안 마련
박정희는 이를 전달받자마자
타자가 아닌 손편지를 쓰는데… 주한미군에 변화가 있을 경우
주월 한국군을 철수하겠다는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미군은 베트남 철수 시작했다
주한미군의 일부도 철수했다 미군 기지로부터 유출되는 미제 물품 역시 중요한 논의 대상이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해서 귀국 장병이 가져오는 미군 전자제품은 용인하였지만, 미군 기지로부터 유출되는 제품들은 적극적으로 단속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는 외제 전자제품의 수입을 금지했으며, 수입이 되는 경우에도 엄청난 관세를 부여했기 때문에 미군 부대로부터 유출되는 전자제품은 세금 수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유출품은 밀수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양담배 역시 중요한 논의 사항이었다. 한국 정부는 양담배의 지속적인 유출에 대해 주한미군 쪽에 항의하였고, 주한미군은 미군의 담배에 일본산 포장재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양담배의 유통을 막기 위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미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보건 검사를 강화했다. 새로운 성병 치료 방식이 도입되었고, 기지촌 여성들은 한국 정부가 마련한 위생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미국 정부는 성병이 미군의 군사력을 약화시킨다는 입장이었고, 한국 정부는 미군이 국내에서 더 많은 돈을 쓰도록 해야 했다. 미군 주둔의 안보적 경제적 이유가 이상과 같이 중요한 상황에서 닉슨 독트린을 통한 미군 감축 또는 철수의 가능성은 한국 정부한테 큰 충격이었다. 닉슨이 베트남을 향해서 독트린을 발표한 것이었지만, ‘베트남’이 아니라 ‘아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역시 예외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또한 안보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다. 베트남에 한국군이 있는 동안 주한미군의 규모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존슨의 약속이 있었지만, 닉슨 독트린 이후 상황변화가 올 수도 있었다. 닉슨은 이미 독트린을 발표하기 전인 1969년 6월, 제2차 세계대전 일본과의 격전지였던 미드웨이 제도에서 티에우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2만5000명의 미군을 8월31일까지 철수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뉴욕 타임스, 1969년 6월9일치) 다른 한편으로 한국 정부는 경제적 혜택을 더 누리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주둔이 길어지는 것을 원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1968년 남북한 사이의 안보위기가 발생했지만, 한국군의 전투수당과 파병을 통한 미국의 특별원조,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과 한국 기업의 진출 등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 성장에 가장 중요한 고리였다. 1960년대 말 부실기업이 속출하는 가운데에도 전쟁특수를 통해 한국 경제는 버틸 수 있었다. 1969년 4월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을 만난 정일권 국무총리는 ‘향후 2~3년 동안 베트남에 계속 참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으며,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군대 배치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1969년 4월1일자 대화비망록) “주한미군을 절반으로 줄여라” 한국 정부가 닉슨 독트린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다. 1969년 8월21일이었다. 닉슨은 한국은 예외 지역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 계획이 있을 경우 사전에 한국 정부에 그 일정을 알려주고 베트남에서의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존슨 행정부의 약속이 계속 이행될 것이라고 믿었고, 미국 정부나 베트남 정부가 철수를 요구할 때까지는 한국군을 베트남에 주둔시키겠다고 말했다. 존슨이 중지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재개할 계획이라는 닉슨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도 전달했다. 한-미 관계의 측면에서,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 베트남 파병을 통한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던 한국 정부로서는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위한 계획을 당장 내놓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신문들은 한-미 정상회담을 보도하면서 닉슨 독트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한정책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의 정치인들도, 신문들도, 정상회담에서의 닉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1969년 8월21일자 대화비망록)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닉슨의 공약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지만, 닉슨이 얻은 것은 달랐다. 닉슨은 미군의 철수 일정과 관계없이 당분간 베트남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베트남화 정책이 실시되고, 미군의 감축과 철수가 이어져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연인원 5만명 규모를 유지한다면,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미군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구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당시 한국군이 북베트남과 접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일부와 베트콩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산악지대, 그리고 해변지역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의 큰 상황 변화 없이 미군이 철수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닉슨은 박정희를 만난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주한미군의 규모를 줄이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1969년 11월24일자 닉슨이 키신저에게 보내는 비망록) 닉슨의 관료들은 제7사단을 철수시키고 주한미군의 규모를 절반으로 감축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보복 공격 작전에 필요한 공군과 해군은 유지해야 하지만, 지상군은 감축 또는 철수한다’는 그의 방침은 8년 후 카터의 대통령 선거 공약 내용과 유사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와의 사전 협의는 전혀 없었다. 닉슨은 박정희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것이다. 1970년 3월20일 키신저는 주한미군 2만명을 1971년 말까지 철수시키는 문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국무부에 지시했다.(National Security Decision Memorandum 48) 주한미군 감축 정책이 한국 정부에 전달되자마자 박정희는 같은 해 4월20일 주미한국대사를 통해 타자가 아닌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그만큼 한국 정부는 다급했다. 만약 주한미군의 1개 사단 2만명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한다면,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할 때 한국 정부가 내세웠던 가장 중요한 명분이 흔들리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의 일부가 베트남으로 이동할 수도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동안 특히 강조되었다. 주한미군의 일부가 베트남으로 갈 경우 한반도에서는 안보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1967년부터 1969년까지의 안보위기를 통해서 베트남 파병의 근본적인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밖에 없던 한국 정부는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이 발표될 경우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명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한국 사회의 관심이 안보보다는 경제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 위안이었다고 할까? 베트남 파병으로 한-미 관계가 가장 좋은 상태라고 했던 주장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불과 8개월 전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만은 닉슨 독트린에서 예외라고 장담했지만, 그 주장이 허세였음이 드러났으니, 한국 정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멘붕에 빠진 박정희가 웃은 이유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닉슨은 박정희의 편지를 받은 지 사흘 만에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8개월 전에 했던 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지난 몇 년 동안 빛나는 성장을 거듭해서 북한을 앞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군의 규모가 과거 10년간 가장 큰 규모로 성장했다는 점, 그리고 박정희의 편지에서 언급된 1949년의 완전 철수와는 달리 주한미군의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만이 감축되는 것이며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주둔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강조되었다. 닉슨은 추가 철군을 위한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의 대한원조 정책이 미국 의회에 의해서 지체되고 있다고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편지의 말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나는 나의 제안이 양국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며, 이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당신 나라와 전세계에 한국이 이룩한 뛰어난 진전의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제 더 이상 주한미군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한테 한국군은 ‘알라딘의 램프’가 아니라는 점을 선언한 것이다. 한 달이 지난 5월29일 포터 주한미국대사는 박정희의 상태를 관찰,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다. 분위기는 싸늘했다. 박정희는 1969년 8월 정상회담에서 닉슨이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니었느냐고 따졌다. 포터 대사는 행정부의 정책에 딴죽을 거는 의회에 모든 책임을 넘기기에 급급했다. 만남이 끝난 뒤 포터는 다음과 같이 모임의 느낌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박의 태도가 우리에게 끼칠 장기적 의미에 대한 나의 시각은 추후에 언급하도록 하겠다. 대화가 끝난 뒤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작별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떠나는 도중 나는 한 번 더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박은 유엔군사령관이 전한 승인된 감군계획의 개요를 보며 무슨 이유에선지 웃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상해 보였다. 회의 도중에 전혀 그런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1970년 5월29일자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에 보내는 문서)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허탈함이었을까? 같은 해 12월 ‘지난 25년간 미국에 협조했던 한국이 공터에 버려진 느낌이다’라고 키신저에게 말했던 김종필의 느낌과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예상하고 있었다는 미소였을까? 이제 한국 정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주한미군에 변화가 있을 경우 한국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철수시키겠다는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주한미군의 일부도 철수했다. 1971년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대표를 한국군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주한미군이 더 철수할 가능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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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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