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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17 18:40 수정 : 2014.10.31 18:34

1971년 10월30일 베트남을 방문한 김종필(오른쪽) 국무총리가 주월한국군을 시찰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군의 전투 조건은 급격하게 바뀌었고, 사기도 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9권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1) 외로워진 한국군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베트남의 한국군은 미군을 한반도에 잡아둘 수 있는 카드였다. 하지만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이 더는 지렛대 노릇을 하지 못했다. 더 많은 한국군을 요구했던 존슨 행정부와는 달리 닉슨 행정부는 동맹국의 정책과 관계없이 베트남에서의 철수 정책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정부는 베트남으로부터 한국군의 철수를 위한 정책을 세워야 했다.

한국 정부한테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철수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닉슨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에 관한 편지가 전달된 1970년 봄은 1971년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1년 앞둔 시점이었고, 박정희 정부가 내세우고 있었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베트남 파병을 통한 전쟁 특수와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잡아두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971년 선거는 박정희에게 큰 도전이었다.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 3선개헌을 강행한 이후 치러지는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박정희에게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선거 이전에 주한미군의 대규모 감축 또는 철수가 발표되거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에 문제가 생길 경우 박정희에게 1971년은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기회’ 자체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정래혁 장관, 기자들 앞에서 신문 내팽개치다

1969년 6월 티에우 대통령이 한국을 거쳐 미드웨이제도에서 닉슨을 만났을 때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 철수가 국내에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첫 반응은 남베트남 정부가 철수를 요청할 때까지 한국군을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베트남 전후 복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경향신문> 1969년 9월2일치)

한국 정부의 입장은 전선으로부터도 재확인되었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은 미군의 철수와 관계없이 한국군이 주둔하는 그날까지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아울러 “지금까지 한국군이 전투에 있어 사실상 과감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적의 집결지나 은거지를 과감하게 선제공격하여 전술책임지역을 100% 평정하는 데 전력하겠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69년 7월3일치)

이세호 사령관은 다음달에 있었던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월사령관에 임명된 뒤인 6월과 7월 사살률이 한국군 1명에 공산군 28명꼴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또한 중부 해안 지역 연해에 있는 6800㎢의 한국군 책임지역 내에서의 평정 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군은 일주일 전부터 책임지역을 976㎢ 더 넓히기 시작했다고 밝혔다.(<매일경제> 1969년 8월18일치)

한국 정부가 한국군 철수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필리핀 정부는 갑자기 1969년 12월31일까지 1500명의 공병단 철수를 완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경향신문> 1969년 11월17일치) 미군이 감축되면 필리핀군의 안위를 책임질 수 없었다. 타이 정부도 1970년 8월28일 철수를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필리핀 정부와 타이 정부는 닉슨 독트린 이후 베이징(북경)과 모스크바에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미국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그리고 한반도에 있는 주한미군이 감축되거나 철수하더라도 한국군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지 않기를 원했다.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와 주월미군의 철수 계획이 발표된 이후에도 미국의 국무부는 한국 정부가 경제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베트남에서 더 장기적으로 주둔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 정부를 보호할 ‘보험’으로서 한국군을 계속해서 주둔시켜야 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국무부 국가정보추정, 1970년 12월2일치) 1971년 4월1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요원이 키신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1970년 한국 정부는 감축이나 철수가 아니라 2만5000명의 추가 파병을 제시했다.

한국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주월 한국군을 장기 주둔시키고자 했던 미국의 입장이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한국 정부는 더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주월한국군이 미군에 앞서 철수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가 이것이 보도되자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고 언성을 높이며 각 일간신문을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방바닥에 내팽개치는가 하면, 기사를 고쳐 쓰라고 기자들에게 요청했다. 기자들은 정 장관의 행위는 전체 언론계에 대한 모욕이라며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동아일보> 1971년 7월1일치 휴지통)

1970년 4월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가 한국 정부에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주한미군 철수설은 ‘미국 내 일부 반전분자들의 견해’일 뿐이라고 일축했다.(<경향신문> 1970년 5월16일치) 박정희도 6월8일 주한미군 감축은 미국 정부의 공식 결정이 아니라고 밝혔다.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정책이 미국 정부의 검토 대상이지만, 이것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정신 및 상호공약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경향신문> 1970년 6월8일치)

한국 정부의 희망과 달리 미국 정부로서는 한국 정부를 고려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한테 너무나 많은 돈을 썼고, 또 쓰고 있다는 의회와 언론의 비판을 잠재워야 했다. 1970년 7월9일 미 국무부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겠지만, 포터 주한미국대사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주한미군 감축 계획을 공식으로 통고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정희 정부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후려쳤다. 이튿날 최규하 외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사전 협의’일 뿐이며, 이 협의에 따라 주한미군이 감축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경향신문> 1970년 7월10일치), 이는 이미 다 결정난 사항이었다. 한-미 정례안보회의에서 주한미군 문제는 의제로 채택되지조차 못했다.(<경향신문> 1970년 7월27일치)

의외로 주월한국군 철수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처음 꺼낸 사람은 유진산 신민당 당수였다. 베트남에 다녀온 그는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은 채 “국민과 파월 장병의 희생과 노고를 되도록 훌륭하게 결실짓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철수계획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경향신문> 1970년 8월7일치) 유진산이 베트남에서 들은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1971년 한국군은 남베트남의
전체 외국군 중 21.7% 차지
1972년엔 무려 60.5% 달해
1972년에 한정해서 본다면
이 전쟁은 한국군의 것이었다

청룡을 지원하던 미 해병대가
한국군 작전 중에 철수했다
미군 없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한국군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
안케전투는 그중 하나였다

월남인 6천명 살해와 증기탕에 대한 질문

신민당은 1970년 9월15일에도 다시 주월한국군 철수를 촉구했다. “국군 파월에 있어 주한미군 감축은 양국 정부의 협의 없이 이행할 수 없다고 한 국제간의 협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감군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과 미국 조야의 왜곡된 한국관을 미리 예측 못한 것은 정부의 무책임 때문”이라고 한국 정부를 비난했다.

필리핀군은 1970년 철수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듬해 1월11일의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 가서야 단계적 감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철수 일정은 결정되지 않았다. 한국군의 철수 이유는 미군 철수 때문이 아니라 베트남화가 예상외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언급도 잊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결정을 미루는 동안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가 예정대로 실시될 경우 1971년 5월 이후에는 실질적인 전투를 할 수 있는 남베트남 정부의 우방군은 한국군만이 남는 상황이었다. 1971년 한국군은 베트남에 있는 전체 외국군 중 21.7%의 비중을 차지했다.(미군 15만6800명, 한국군 4만5694명) 1969년 9.1%(미군 47만5200명, 한국군 4만9755명)를 차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72년이 되면 한국군의 비중은 60.5%에 이르러 미군(2만4200명)보다도 더 많은 3만7438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1972년에 한해서 본다면 이 전쟁은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의 전쟁이었다.

한국군의 전투 조건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우선 미군 철수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기가 떨어졌다. 청룡을 지원하던 미 해병대가 한국군의 작전이 실시되고 있었던 5월7일 완전히 철수했다. “브러더 머린(Brother Marine·해병 형제)이라고 규정을 들추지 않던 해병에 비해 줄어들고 있는 전비에 따라 지원이 까다로운 게 육군의 지원 태도라고 여단 고위 참모는 귀띔을 했다. 더구나 5월부터 사실상 미군이 작전에서 손을 떼기 때문에 앞으로 이번과 같은 대작전의 지원이 가능할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다.”(<경향신문> 1971년 5월5일치)

베트콩은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전단을 뿌리기 시작했다. “철수를 앞두고 날뛰지 말라. 그대들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길 빈다.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그대들도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미국 상원에서는 “한국군은 이번 공세 이후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사상자 수를 줄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한국군 부대를 19번 공로상의 안케 통로재개작전에 투입하도록 하는 동의를 얻는 데는 특별한 노력이 들었다”는 얘기도 나왔다.(<동아일보> 1972년 6월29일치) 닉슨 행정부 내에서 한국군이 효율적이지 않으니 한국군 지원비를 남베트남 군대 훈련비로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튀어나왔다. “베트남에 있는 모든 군대 중 한국군이 최고이며, 그들의 어머니에게 미국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를 말해 달라”고 했던 존슨 대통령의 칭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1967년 3월14일 존슨 대통령과 정일권 총리의 대화록)

베트남에서 한국에 대한 여론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1970년 말 이효상 국회의장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첫 질문이 “주월한국군이 파월된 이래 월남인을 6천명 살해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고 두번째 질문이 “한국 민간인들이 허가도 없이 증기탕 나이트클럽 등을 불법으로 경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71년 11월11일치)

미군의 지원 없이 베트남에서 전투를 벌이는 한국군의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

“주월한국군은 분명히 안케 전투에서 파월 이래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고전을 겪었다. (중략) 안케 협로는 전부터 적정이 심한 곳으로 한진 수송단이 가끔 피습을 당해 우리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됐으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월남 민간인들로부터 베트콩들이 통행세를 받고 왕래를 허용했던 곳이다. 이곳에 맹호의 제1중계기지가 절해의 고도처럼 들어 있었다.

주월국군이 안케 전투에서 고전을 겪었던 이유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로 적정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다. 둘째로 국군의 장비 및 (미군의) 공격용 헬기와 전폭기 등의 공중지원이 부족하다. 장갑차나 탱크조차 갖고 있지 않다. 고작 있는 것이 장갑병력수송차 몇 대 정도. 미군의 대규모 철수로 헬기 지원이 많이 줄어들었다.”(동아일보 1972년 4월21일치 박흥원 특파원)

1971년 상관살해·강간 통계 없는 이유는?

미군의 철수로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한국군의 전투 조건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군 지휘부의 교체도 문제였다.

“이○○ 장군의 지시각서를 기안했는데, 전술개념이 상당히 달라요. 지휘하는 성격이 다릅니다. 지시각서를 기안해서 내는데, 이분이 기안한 것을 180도 바꾸는 것입니다. 기존의 방침을 살리면서 점차적으로 변경하도록 해서 지시각서의 묘미를 살렸습니다. 채 사령관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전과를 얻는다. 우리나라의 실리를 위해서 온 거다. 그러니까 우리 병사가 죽어서는 안 된다.

1·21 사태 때 성과를 올린 이 장군은 “왜 적이 있는데 안 때리느냐? 적이 나타나면 싸우는 것이 군인이다. 군인이 정치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로서 이 장군은 평소에 외국에서 월남전을 청부 맡았다는 생각에서 하니까 그렇게 된다. 지휘관들이 보아 가지고 붙어 보았자 실속 없다고 해서 놓아두고, 그것이 상습화되어 가지고 월남전에서 전투 경험을 얻어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전투를 위해서 사소한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참전하라는 것이지요. 지휘관이 지휘를 하는 데 있어서 판단 착오로 인해서 실패했을 때는 처벌한다. 그러나 당연한 조치를 했는데도 막대한 희생이 났을 때는 불문에 부친다는 것입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1>, 2001)

이○○ 장군의 지시로 인한 것이었을까? 1970년 이후 한국군의 범죄 발생 건수는 1966년(293건)에 비해 절반(156건)으로 줄었고, 다시 1971년에는 100건 이하로 감소했다. 1970년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보고되었던 ‘상관 살해’와 ‘강간’은 1971년과 1972년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국방부 통계) 규율이 강화된 것인가, 아니면 지휘관의 지시 아래 눈감아준 것인가?

1971년 청룡부대의 철수로 한국군의 인원수는 줄었지만, 전사자 수는 오히려 늘었다.(1971년 504명, 1972년 513명) 육군만 놓고 보면 1971년(360명)에 비해 1972년(445명)에 전사자 수가 20% 증가했다. 미군 철수와 함께 한국군도 같이 철수를 시작했다면 전사자 수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군 지휘관의 의식도 큰 문제였다. 문제가 된 이○○ 장군은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월한국군은 8년간 5000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는 국내의 안전사고에 의해서 사망한 숫자와 유사하다. 만약 작전지휘권을 미군 측에 주었다면 전사자는 10배인 5만명으로 증가했을 것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1>, 2001)

한국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전선에서는 더 많은 희생자가 났다. 안케 패스(통로) 전투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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