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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31 18:33 수정 : 2014.11.02 10:12

베트남 전선에서 한국군이 고전하는 동안 전쟁특수와 관련된 소식은 끊임없이 한국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1973년 초반의 파월 한국군 진지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10권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2) 한국 정부의 미련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한국 정부의 철군 정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베트남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한국에서 베트남은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 특전사 지역대 부팀장으로 근무 중 갑자기 예고없이 군헬기가 오전 10시경에 내려. 특전사령관인 강○○ 장군이 예고없이 불시 방문. 지역대장 김○○ 소령 이하 12명의 전 장교는 비상이 걸렸다. 일렬횡대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사정없이 쪼인트를 2~3번씩 까고 맞는 기합을 받았다. 쪼인트를 까고 난 후, 이봐 참모 여기 있는 전 장교 인적사항 적어서 이번 기에 모두 파월 보내! 이러한 연유로 해서 곧바로 파월되어 맹호사령부 공수지구대에서 6개월의 파월복무를 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공수부대로 월남전에 가면은 절반이 사망 아니면 불구가 되어서 귀국한다고 해서 지원해서 월남전에 가는 장병은 찾아볼 수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해서라도 차출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1, 2001)

상황이 이렇게 되니 파병과 관련된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주월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세계 일급 군대로 명성을 떨치며 분전하고 있었지만 … 파월지휘관의 선발에서의 잡음은 계속 이어졌다. 잡음은 대개 금전과 연관된 것이므로 군으로서는 명예에 큰 흠집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부 지휘관들은 월남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 무공훈장을 받기 위한 전과 조작으로 때때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1)

리더십의 허점 드러낸 안케패스 전투

사령관의 교체도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다. 일단 새로 부임한 이세호 장군이 채명신 장군보다 3기수 선배였다. 게다가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지휘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군 리더십의 퇴조가 베트남전 참전으로 이루어졌다고 평가되는 시점에서 다시 일본군 리더십의 출현은 때때로 예하 사단장과 트러블을 일으켰다. 당시 모든 예하 지휘관은 미군 군사학교를 이수했기 때문에 새로운 한국형 리더십으로의 발전 과정에 있었음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 무렵 주월 맹호사단 기갑연대의 안케패스 전투는 치열한 정규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시종일관 지휘력 부재로 졸전이 이어지면서 피해 또한 가장 많이 입어 주월한국군은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1)

물론 전임 채명신 장군의 작전이 모든 지휘관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마부대의 오○○ 제3소대장에 따르면 베트남에서의 작전 중 많은 손실을 가져온 원인의 하나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채 사령관의 방침 때문이었다. “마을에 침투한 적을 격멸하려면 우선 주민들을 소개시킨 뒤 중화기로 제압한 후에 과감히 돌파하여야” 하는데, “포병의 지원 없이 마을에 진입하다가 적의 저격으로 많은 부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짜는 데 있어서 파병의 의의를 원칙으로 하면서, 부하 사병들과의 소통에 주력했던 이전 사령관과 다른 새로운 사령관의 운영 방식은 주월 한국군들에게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상황을 만들었던 것 같다. 미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고, 한국 정부의 철수 정책은 전혀 언급도 되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의 사령관은 적응이 잘 안되고, 파병 초기와는 달리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여론은 안 좋아지고….

악조건에서 벌어진 안케패스 전투는 과거와는 달리 최악의 상황을 가져왔다.

“안케패스 전투는 치욕의 판정패였지만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승전으로 미화하여 홍보했다. 안케패스(Ankhe Pass)란 베트남 빈딘성의 성도 꾸이년(퀴논)에서 크메르 국경지대까지 관통하는 19번 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고갯마루를 일컫는다. 월남군 제2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쁠래이꾸(플레이쿠)로 관통하는 유일한 보급로로서 군사적 중요성이 클 뿐 아니라 19번 도로는 군사작전에 중요한 생명선이기도 했다. 안케패스는 원래 미 제1기갑사단의 예하 부대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1970년 7월에 철수함에 따라 맹호 기갑연대 제1대대 제1중대가 인수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 일대는 안케고개 정상인 638고지를 비롯하여 553고지, 544고지, 240고지 등으로 높고 낮은 고지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하고 한국군도 철수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72년 3월29일 정오를 기하여 월맹군의 일제 공세가 각처에서 시작되었다. 4월11일 새벽 4시경 안케패스의 제1중대 기지에 한 발의 조명지뢰 폭파음이 울려퍼지면서 공격의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월맹군이 이미 638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오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전투가 시작해서 5일째가 되었는데도 아군 지휘관들은 적의 규모는 물론 상대가 월맹군인지 베트콩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4월15일 638고지 및 그 일대에 대한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미 제7공군 소속의 F-4 전폭기 연 41대로 네이팜탄과 고성능 폭탄 14만3천파운드를 쏟아부었다. 4월24일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638고지로 치달았지만 적의 저항은 없었으며 텅 빈 고지를 무혈점령함으로써 치욕의 안케패스 작전은 끝났다. 적은 아군 몰래 철수를 완료한 것이다.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안케패스 전투를 미화하여 매스컴과 고국에는 승전으로 알렸고 유공 장병이라 하여 엉뚱하게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많은 훈장이 나누어졌다. 또한 638고지 정상에는 전승비가 건립되었다. 이 전투의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전사 75명, 전상 222명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숫자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을 비롯한 지휘선상의 모든 지휘관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한국군 베트남전 참전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치욕의 패전으로 기록한다.”(www.vietnamwar.co.kr)

안케패스 전투의 사상자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통계에 보면 한국군 전사자가 78명 정도 된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우리 APC(병력수송장갑차) 1개 소대가 당시 28명이었습니다. APC 4대가 안케 전투에 투입이 되어서 1972년 4월11일날 8명이 전사하고 중상만 3명이었는데… 제가 나름대로 생각은 150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우들 전사한 날짜가 4월17일로 동작동 국립묘지 비석에 새겨져 있는데 날짜가 6일씩이나 틀린다는 것은 하루에 너무 많은 인원이 전사하면 문책이 따르기에 전사 날짜를 분산시켰다고 주월사 근무했던 전우가 몇 년 전에 말하더라구요.”(www.vietnamwar.co.kr)

미군 등은 철수를 시작했고
한국군 철수는 언제일지 모르고
새 사령관은 적응이 잘 안되고
파병 초기와는 달리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여론은 안 좋고…

추가 원조제공 여지 더 없나?
미군 철수 더 늦출 수 없나?
미국 정부 답변은 ‘노’였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장병들을 그렇게 방치했던가

잉여장비 1억달러 대가로 2년간 더 주둔?

한국 정부는 왜 이렇게 무리한 전투를 감행하도록 베트남의 한국군을 방치했을까? 워싱턴은 미군이 빠지더라도 한국군이 더 오랫동안 주둔해줄 것을 원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미국 정부의 생각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에서 북베트남군의 철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규정함으로써 물거품으로 끝났지만, 한국 정부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한국군이 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를 막는 ‘알라딘의 램프’는 아니었지만, 전쟁특수나 미국의 원조를 통해 한국군의 현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알라딘의 램프’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인가?

베트남 전선에서 한국군이 고전하는 동안 전쟁특수와 관련된 소식은 끊임없이 한국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청룡부대 철수 계획 이후 육군 사단의 철수 계획은 1972년 6월에서 12월로, 그리고 다시 그다음 해로 계속 연기되었다. 그리고 애그뉴 부통령이 잉여장비 1억달러를 제공하는 대가로 한국군이 2년간 더 주둔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동아일보> 1971년 7월2일치)

1972년 1월18일 유재흥 국방부 장관은 한국군의 베트남 주둔 연장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용식 외무부 장관은 동년 2월5일 하비브 주한미국대사에게 군사적 지원이 더 이상 실행되지 않는다면 한국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동년 3월 키신저는 미군이 없더라도 베트남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한국군을 베트남에 더 오래 잡아둘 수 있다고 닉슨에게 보고했고, 두 달 후인 5월2일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군 1개 사단의 증파를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1972년 8월에는 김동조 주미대사가 한국군 전체를 철수한다고 선언했다가 다시 취소하는 소동도 일어났다. 유신 선포 한달 전인 1972년 9월에 가서야 1973년 여름까지 한국군 전체가 철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전쟁 특수에 대한 기대는 현실적인 것이었을까? 1971년 여름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과 타이군에 지급해오던 해외근무 수당 및 보너스 수당의 지급을 중지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미국 상원은 애그뉴 부통령의 방한 4일을 앞둔 상황에서 주월외국군에게 미군보다 더 많은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경향신문> 1970년 8월22일치)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국 정부가 동맹국 군대에 사용한 돈을 조사하기 위해 조직된 사이밍턴위원회에서는 한국군이 용병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었으며, 이 내용이 1970년 9월 한국 신문에 공개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국 정부가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할 여지가 있는지, 그리고 한국군이 남아 있을 경우 미군의 철수를 조금 더 늦추어줄 수 있는지 타진했다. 미국 정부의 답변은 ‘노’(no)였다. 미국 정부 내에서 한국군을 잡아두기 위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한국을 방문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닉슨 대통령의 답변은 ‘노’였다.

게다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이 변화하면서 민간기업들의 전쟁특수 역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1968년 이후 감소하고 있었던 전쟁특수는 청와대의 또다른 고민이었다.(‘68년도 대월 용역 및 건설사업 계약현황(68.5.25 현재)’, 1968년 5월27일자, 대통령비서실) 미군 물자 중 한국에서 구매하는 액수는 1968년 1500만달러에서 1970년 500만달러로 급감했다. 갈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군사편찬연구소 통계)

“67년이 우리 업자들의 해외진출의 전성기였다면 68년은 공사도급의 전성기로 평가될 정도로 67년과 68년은 짧은 건설업 해외진출사에 화려한 페이지를 기록케 한 해였다. (그러나) 해외공사 계약이 1969년 들어 크게 둔화했다. 10월말 현재 951만달러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데, 월남의 공사도급은 1967년 1720만달러를 피크로, 1968년 1039만달러, 69년 10월말 현재 754만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 정부의 지원이 있는데, 공사계약이 되면 수출금융과 똑같은 달러당 220원의 융자가 있었고, 영업세의 면제, 공사도급을 위한 행정적 지원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실업자의 해외진출 억제, 과당경쟁 방지 등도 적절히 이루어져 국위손상·신용추락의 폐단을 사전에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매일경제> 1969년 11월6일치)

결단 내려야 할 때 내리지 못한 책임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베트남에 남겠다는 민간인 사업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1971년 8월 초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의 조사에 의하면 남베트남에는 총 6300명의 민간인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용역군납건설업체 등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진출 업체가 68개, 현지에서 회사를 조직한 비진출 업체가 187개였다. 월남 영주권을 받은 사람은 171명, 그러나 대다수는 주월 한국군의 철수와 때를 같이해 월남을 떠날 사람들로 전망했다. 대사관은 “직원으로 일종의 지도위원회를 구성, 무직이거나 주거가 일정치 않은 이른바 어글리 코리언의 혐의자들에게 직업 알선하는 일을 수행”할 뿐이었다.(주월남 유양수 대사 귀국 인터뷰, <동아일보> 1971년 8월4일치)

결단을 내리지 말아야 할 때 내려도 문제지만,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아도 문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월남의 정부 지도층이나 청년 학생 지지층에게는 국군이 월남을 위해 이룩해 놓은 업적보다도 한국이 국군 파월에 따라 얻는 국가 실리 면이 더 강인하게 인식되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적어도 주월국군은 월남인에게는 고마운 다이한(한국군)은 아니었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국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고 있는 티우 정부나 국군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는 반공주의자들에게도 국군은 필요한 악의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일반 월남인들에게는 불필요한 악으로 보이고 있다고 한다면 그릇된 판단일까? (중략) 한국군의 경우 월남 정부 지도층한테도 고마운 다이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책임의 일부는 한국 정부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국군 파월이 우방 월남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것보다도 국군 파월에서 얻어지는 국가 실리 면을 과잉선전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마이너스를 가져오면 가져왔지 플러스는 되지 못했다. 여기서 국군 철수의 당위성이 대두하고 금년 말부터 철수를 시작하기로 한 정부 조치는 가찬할 만한 용단이라고 이곳에서는 평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세호 주월사령관은 국군이 최후의 한 사람이 철수할 때까지 쉬지 않고 싸움으로써 월남을 돕고 파월 목적을 수행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새삼 다짐했다.”(<동아일보> 1971년 9월27일치)

도대체 얼마나 벌었길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을까? 조금이라도 더 버는 것이 안케패스에서 죽어간 장병들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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