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6) 공산주의자들의 분열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철수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이 명분도 없는 전쟁에 개입하여 잘못된 전략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둘째로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부도덕한 문제로 인해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에 맞서서 베트남 사람들이 잘 싸웠다는 점이다.
세 가지 문제가 모두 중요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확전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미국의 정책적, 전략적 오류였다. 그리고 잘못된 미국의 전략은 베트남의 상황에 대한 미국의 오판 때문이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주적이 북베트남인가, 아니면 베트콩인가? 베트콩을 지지하는 남베트남의 대다수 사람들은 적인가, 아군인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중국이 동남아 전체를 자기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을까?
미국은 북베트남으로부터의 지원이 없다면, 베트콩이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다고 보았다. 북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개입과 호찌민 루트에 대한 폭격은 모두 이러한 인식 때문이었다. 단지 전략촌 건설에 대한 지원은 베트콩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남베트남 정부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한대사 버거를 베트남으로 보낸 이유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중국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중국을 포기했던 미국이었지만, 부패와 독재 속에서도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지켜냈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를 보면서 베트남에서도 동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정부의 변신을 무난하게 이끌었던 새뮤얼 버거 주한미국대사를 베트남으로 배치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버거 대사는 5·16 쿠데타로부터 민정 이양, 그리고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으로 이어졌던 한국의 경험을 베트남에 이식하려고 했다. 물론 부패의 상징이었던 타이완(대만)의 장제스(장개석) 정부의 건재 역시 미국의 오판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또한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도 이해하지 못했다. 부패하고 민중들의 요구를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던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지원이 더 많은 베트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베트콩이 되었는가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회고는 이러한 베트남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내가 12살이 되어 더 잘 알게 되기 전 나는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했다. (중략)
내가 공화당 사람으로 역할을 할 때 나는 하노이로 갔다가 어느 날 돌아와서 싸우고 있을 오빠를 생각했다. 베트콩 역할을 할 때는 경찰과 결혼해서 다낭에 있는 언니를 생각했다. (중략)
며칠 뒤 베트콩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공화당 사람들이 준 것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나 학교만은 남겼다. 그중에는 내가 본 잘생긴 베트콩 청년도 있었다. 그중 지도자는 웃긴 북쪽 말투를 썼다.
이들이 돌아간 뒤 공화주의자들은 촌락 사람들을 체포하고 때리고 총으로 쏘고 차에 태워 감옥에 보냈다. 그러나 우리의 집은 점점 베트콩에 알맞도록 개조되었다. 그들은 지하에, 아궁이에, 덤불에, 인공 계단에, 흐르는 강물 안에 숨었다. 모든 집들은 베트콩이 숨을 장소를 만들었다. 어른들은 숨을 장소를 만들었고, 우리는 호 아저씨를 칭송하는 노래를 배웠다. (중략)
우리가 만약 죽는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 남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프랑스처럼 우리를 노예화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동맹자는 반역 공화주의자 응오딘지엠(고딘디엠)이다.” 우리는 공화당 군인들을 속이고 훔치고 거짓말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이제 공산주의자 동지가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남베트남 농부의 딸이 베트콩 지지자가 되다”, 1961)
마치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보는 듯하다.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휘날렸던, 그리고 그로 인해 거창, 함양과 같이 양민학살 사건을 겪어야만 했던 지역.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남베트남 사람들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된 것은 그들의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35살에 베트콩에 합류했다. 나는 결혼했고 4명의 아이가 있었다. 나는 소작인이었고, 거의 불모의 땅인 1헥타르(2.5에이커)를 경작했는데 매우 가난했다. 땅의 질이 안 좋았던 것이 땅임자가 우리에게 땅을 임대한 이유였다. 매년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는 100하오(베트남 화폐 동의 1/10 단위)의 쌀만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 40하오가 소작료로 나갔다. 나는 땅을 조심스럽게 개간하였고 그것은 곧 기름진 땅이 되었다. 그러나 땅이 그렇게 되었을 때 지주는 그 땅을 빼앗았다. 나의 삶은 사라졌다. (중략)
1961년 인민해방전선의 선전 간부가 나를 접촉했다. (중략) 나는 그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지역 인구는 약 4300명이었다. 이 중에 10명이 지주였고, 이들은 500헥타르(1236에이커)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나머지가 최소한 20헥타르(49에이커)를 갖고 있었다. (중략) 우리는 몇몇 사람들만 돈을 쓸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을 억누를 수 있도록 하는 정권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해방전선에 합류했다. 나는 베트콩을 따라서 자유과 조국의 번영을 위해 싸웠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느꼈다.(“나는 왜 베트콩에 참여했는가?”, 1961)
북베트남-베트콩 목표 같았지만서로의 처지는 매우 달랐다
북베트남은 전쟁 피하려 했고
베트콩은 일찍이 군사투쟁 역설
미국은 이를 꿰뚫어 보지 못했다 북한의 월북출신 인사들 남파는
북베트남 벤치마킹이었을 수도
한국은 남베트남과 달랐다
오히려 베트남전 개입을 통해
안보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왜 남베트남 부패의 심각성 인식 못했을까 베트콩은 북베트남의 지원 없이도 스스로의 부대원을 충원할 수 있었고, 남베트남 사람들의 지원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자생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북베트남에서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는 인원도 대부분 남베트남 출신으로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이 분단되었을 때 월북했던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1960년대 중반까지는 그랬다. 북한이 197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월북한 남한 출신 인사들을 공작원으로 남한에 파견했던 것도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벤치마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국과 남베트남은 달랐다. 한국은 허술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트남 전쟁 개입을 통해 한국은 튼튼한 안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상회와 예비군이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계속되는 안보위기와 베트남 전쟁을 통한 경제성장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북한이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자 적으로 인식되도록 만들었다. 미국을 늪에 빠뜨린 것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민심을 이반시킨 남베트남 정부였다는 사실이 간간이 지적되었지만, 미국은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북베트남 폭격을 통해 베트남 전쟁 확전을 주장한 사람은 존슨 대통령의 안보담당 고문이었던 월트 로스토였다. 그는 도약이론을 통해서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정부의 개혁만이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주장했다. 한국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지만, 로스토가 가장 정성을 쏟았던 베트남에서의 전략은 실패했다. 로스토가 했어야 할 일은 북폭이 아니라 남베트남 정부와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남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의 책 <제안>(A Proposal)에서 스스로 주장한 것과 같이 미국은 개발도상국에서 개혁을 통해 민심을 돌릴 수 있도록 원조해야 하지만, 불가능할 경우 포기해야 했다. 로스토는 스스로 군사적 개입이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깎아먹고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는 스스로의 경고를 망각했다. 물론 북베트남이라는 존재로 인해서 베트콩은 더 강해질 수 있었고,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북베트남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장기간의 게릴라전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없었다면,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베트남의 정규사단이 17도선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통킹만 사건 이후였다. 만약 통킹만 사건이 없었다면, 한국군이 북베트남 정규군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 전선의 전면적 확대가 없었다면 한국의 전투부대가 파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미국의 인식도 오판이었다. 남베트남의 베트콩이 북베트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59년 호찌민에 이어서 베트남 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된 레주언은 남쪽 베트콩 출신이었다. 남쪽에서의 투쟁 방향은 대부분 북베트남 공산당의 결정에 의지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둘의 목표는 같았지만, 1954년 베트남이 분단되면서 서로의 처지가 달랐다. 북베트남 공산당은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제네바 협정과 같이 미국도 합의했던 정치적, 평화적 해결 방안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해결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남쪽에서 일어나는 민중봉기에 의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체적으로 무너질 것으로 보았다. 1950년 북한이 38선만 뚫고 내려오면 남한 안에서의 봉기로 인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붕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처럼. 남쪽은 달랐다. 남베트남 정부의 탄압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는 부패했지만, 물리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남쪽 지도부는 이미 1956년 적극적인 군사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호찌민도 이 점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1957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서 흐루쇼프가 주장하는 평화로운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베트남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러나 북베트남 공산당은 1959년까지도 정치적 해결 방식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와중에 베트콩은 남베트남 정부의 탄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1959년 5월에 열린 대표자대회에 가서야 북베트남 공산당은 남베트남에서 무력투쟁의 필요성을 결의했다. 그렇다고 남과 북 사이에 이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남쪽의 베트콩은 마오쩌둥 식 전술의 채택을 주장한 반면, 북베트남은 군사적 투쟁이 강화될 경우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염려했다. 1962년 라오스에 대한 미국과 소련/중국 사이의 정치적 합의 역시 베트남 문제가 미국과의 합의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키웠다. 그 결과 정치투쟁에 대한 강조는 계속되었고, 1960년 3차 당대회 직후 남쪽에서 군사조직이 아니라 인민해방전선이라는 정치적 조직이 수립되었다.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은 내부 반란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렸지만, 그사이 남베트남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했던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과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던 북베트남 사이에서는 큰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군 개입 부른 맥아더의 오판처럼 호찌민은 소련과 중국도 고려해야 했다. 북베트남 공산당은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남쪽에 전면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전선이 북쪽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편지를 소련과 중국에 보냈다. 남베트남의 베트콩 입장에서 볼 때 북쪽의 태도는 비겁함 그 자체였지만, 북으로부터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에 북쪽의 결정을 따라야만 했다. 정전협상 과정에서 남쪽의 빨치산들을 버린 북한 정부의 태도와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베트콩의 입장에서 북베트남의 결정은 자기들만 살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북베트남 공산당의 정세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존슨 행정부가 남쪽에 대한 전투부대 파병과 함께 북폭을 결정한 것이다. 북쪽이 전면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존슨 대통령이 1968년 말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일정 정도 성공적인 계산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닉슨이라고 하는 새로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할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한 오판이었다.(William Duiker, “Hanoi’s Strategy in the South. The Vietnam War: Vietnamese and American Perspective,” 1993) 미국은 이상과 같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분열과 오판을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은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분열, 남북 베트남 사이의 차이, 그리고 북베트남의 오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이러한 오판을 전쟁 전략에 이용하지 못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미국은 소련이 요구하면 북한이 모두 들어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석방을 위한 북한과의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Lerner, The Pueblo Incident) 미국은 중국과 북베트남을 압박하면 남쪽의 베트콩이 모두 고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0년 11월 맥아더 장군이 압록강 근처에서 내렸던 중국군 개입에 대한 오판이 한반도에서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치르도록 만들었듯이. 상대방의 분열과 약점을 읽지 못하면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지만, 그 반대면 백전백패다. 1968년 구정공세에서 베트콩이 큰 타격을 입었을 때 미국은 오히려 정전협정을 제안했다. 미국의 정보 판단에 의지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한국군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베트콩이나 북베트남 정규군이나 모두 하나였다. 이들을 지원하거나 호의적인 베트남 사람들도 모두 베트콩이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지금까지도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민간인 학살 문제가 발생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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