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2월12일 한국군 해병대가 진입한 뒤 폐허가 된 베트남 꽝남성의 퐁니·퐁넛마을 모습. 주검을 수습하러 간 미군이 찍은 것으로, 이날 이 마을에선 74명의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이 죽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7) 민간인 학살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모든 전쟁은 학살을 동반한다. 그렇다고 전쟁 상황이 모든 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학살은 어느 일방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학살은 보복을 부르고, 그 보복은 다시 다른 보복을 부르는 연쇄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시기 남한군과 북한군, 그리고 미군 모두 학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역시 동일한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그런데 유독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만이 주목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쪽은 밀라이 학살이 알려지면서 민간인 학살을 자인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전면 부인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장교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을 담고 있는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이나 사병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올린 인터넷 사이트(www.vietnamwar.co.kr)를 통해서 보면 양민 학살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북한군이 저지른 소행이었다고?
첫째로 북한군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심리전 요원들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중 심리전 요원들은 주로 한국군의 이른바 ‘귀순’ 공작을 담당했는데, 학살은 이들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북한군 군사고문단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며 한국군에게 협조적인 자연부락을 무차별 공격한 후 한국군의 만행이라고 주장했을 개연성이 충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런 첩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www.vietnamwar.co.kr)
둘째로 한국군은 베트콩을 사살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남베트남 사람들은 베트콩에 우호적이었다. 베트콩의 보급투쟁에 호응하거나 이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따라서 대민작전을 하는 한국군에게 베트콩과 양민의 구별은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게릴라전은 확정된 전선이 없고 제복을 입은 적군도 없다. 오직 무기를 갖고 대항하는 자는 적이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자는 양민이다. (중략) 마을에서 전투 시에는 주민의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전투 현장에 베트콩에 협력하는 주민이 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베트콩에게는 연령이나 남녀노소의 제한이 거의 없다. 지금껏 우리들은 모든 작전에서 부녀자 및 노인과 아동들을 일체의 의심을 하지 않고, 용의선상에도 넣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서는 13~14세의 소년 베트콩에게 아군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를 생포하여 신문한 결과 그는 분대장 직책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거의 60세가 된 노인이 대항 후 도주하는 것을 생포하였고, 허리에 수류탄과 탄띠를 찬 여자 간호원을 체포한 적도 있었다. 또 심지어는 겉으로는 승려 복장에 속에는 탄띠를 찬 가짜 승려가 체포된 적도 있었는데, 자신은 양민이며 탄띠는 주워서 찬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이들은 확실한 베트콩이며 결코 양민일 수 없다.”(맹호부대 제1연대 제5중대장 1978년 1월29일 증언)
미군에 의해서 퐁니·퐁넛 사건(1968년 2월)의 조사가 이루어질 때에도 채명신 사령관은 “대량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음모”라고 결론지었지만,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한 미군은 한국군의 불미스러운 작전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채명신 사령관의 해명은 베트남 주재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고, 미군사령관의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에게는 전쟁범죄에 관한 주장이나 불만이 제기되었을 때 적절한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져 있습니다. 이 지시는 제네바 협약의 서명국으로서 미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1968년 2월12일 꽝남(쿠앙남)성 디엔반구의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된 사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중략) 동봉한 증언, 사진자료, 그리고 다른 문서들은 기초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것으로, 우리의 조사가 완전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중략)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아마 장군께서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갖는 심각한 본질 때문에 나는 이 사건이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1968년 4월29일자 편지)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가 2000년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문서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미군이 조사를 요청한 사건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사건이었다.
|
1967년 7월14일 맹호부대 병사들이 수용소로 가기 직전의 남베트남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군은 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베트남에서는 사상자 수가 더 많아졌다.
|
약 80여개 사건, 총 9천명 학살
반드시 풀어야 할 인륜의 문제
일정 시간 흐르면 베트남에서
문제제기할 가능성이 충분 베트남인이 가장 큰 피해자지만
한국군 역시 피해자로 봐야
자의든 타의든 국가이익에 동원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국가가 모든 책임을 져야 닉슨 행정부를 긴장하게 만든 사건들 세 사건은 모두 구정공세 직후에 발생했다. 세계를 뒤흔든 미군에 의한 밀라이 학살이 발생했던 1968년 3월을 전후한 시기였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직후의 시기였다. “구정공세라 하면 68년의 호이안 전투를 지칭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3대대 8중대의 일개 소대 40여명 중 생존자가 7명뿐이라는 믿기 어려운 전투도 그때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www.vietnamwar.co.kr) 다른 사건들이 이 이전에도 있었지만, 미군 쪽에서 이 사건들만 조사에 들어간 것은 밀라이 학살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해병대 대원이 다치거나 사망한 이후 보복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과 전략촌에서 발생했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 전략촌은 지역 거주민들을 베트콩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만든 전략적인 지역이었고, 안전한 곳으로 선전되고 있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는 국내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철저한 보도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외신의 보도였다. 1970년 1월10일 <뉴욕 타임스>는 ‘한국군이 수백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고, 주월미군사령부의 고위 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1971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도 중요했지만, 브라운 각서의 실행 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사이밍턴 위원회를 앞두고 나왔다는 점 때문에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닉슨 행정부도 긴장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 언론매체가 보도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고, 사이밍턴 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논의되지 않았다.(이상 ‘잠자던 진실, 30년 만에 깨어나다’, <한겨레21> 제334호, 2000년 11월15일) 외신의 보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었던 1972년 7월31일 <에이피>(AP) 통신은 맹호사단에 의한 양민 학살 문제를 보도했다. 2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사망한 남성 9명, 여성 13명, 그리고 아이들 7명 명단이 키엠 수상에게 제출되었다. 명단에 따르면 다낭의 팜쑤언후이에서 발생한 이 사건에 86살의 할머니가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1살도 되지 않은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상 http://www.newspapers.com/newspage/45678523/) 한국 정부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양민학살 보도 해명 전보”, 주월대사. 1972, 외무부 문서) 맹호사단의 ‘장비 2호 작전’ 시 한국군의 공격으로, 에이피 통신의 보도와 비슷한 수의 부락민이 피살되었다. 남베트남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 내용을 왜곡 기술하여 신문사에 배부하였다. 주월한국대사는 사전에 보도를 만류하는 한편 8월15일에서 17일까지 자체 조사를 한 뒤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조사를 다시 의뢰했다.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이 각각 3명의 장교(반장 중령)를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동 부락은 본시 베트콩 통제하에 있었으며, 전투는 적의 사격으로 아측이 전사 2, 부상 6명의 피해를 입은 후 일어난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촌락에 대한 공격은 지방 책임 관리의 사전 동의 아래 실시된 작전상의 타당성이 있는 전투이고, 의원들의 비난과 같은 양민 집단학살 및 암매장은 없었다는 데 합의를 보았음.”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조사 결과 양민 학살은 사실무근이었다. 왜 이런 사건들이 발생했는가? 우선 작전의 문제였다. “전략촌이란 개념의 차이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군은 작전 개시 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양민을 소개시키는 작전을 감행했으며, 소개하지 않은 자들을 게릴라로 판단하였고 이를 섬멸했던 것이다.”(www.vietnamwar.co.kr) 둘째로 베트콩이 나온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베트콩의 협력자로 본다는 것이다. “베트콩이 나타나면 마을을 몰살시켰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며느리 다 죽여버렸어. 싹 쓸어버렸어. (그러니) 베트콩이 우리를 손댈 수가 없어. 그때는 잔혹행위 같은 걸 우리가 자행을 했어요. 그런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잘했다 잘못했다를 떠나서 그렇게 해병대가 한 것은 그게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중략) 잔혹행위라도 해서 살아남는 게 땡입니다. 만약 우리나라 전쟁에서 그렇게 했다면 큰일 나겠지만…. 우리는 그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병사들이 많이 살아서 복귀하는 거잖아. 그래서 그걸 윤리적으로 비판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http://hankookilbo.com/v/f58e642087c24365a87e30a4ef898987) 한국군의 재판 기록을 보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 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 치상 523건 등이 있다.(<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49쪽) 아마도 민간인 학살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베트남 사회의 입장은 한국군과는 다르다. 전쟁이 끝난 직후 베트남 정부는 정치국 산하에 전쟁범죄조사위원회를 설치했고, 여기에서 198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이라는 문건이 발간되었다.(구수정 박사 발굴) 이 문건에 의하면 5000여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한국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이후 각 성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징용과 위안부 관련 사실이 해방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사회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반전운동과 서구사회 변화로 이어져 2000년 구수정 박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시 한국군에 의한 약 80여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으며, 9000여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조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전쟁에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한 한국군의 해석과 베트남 사람들의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남남갈등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풀어야 할 인륜의 문제이며, 시대적인 문제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한국의 명예는 회복될 수 없다. 일본의 역사인식을 얘기하든, 미군의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을 얘기하든 모든 문제는 베트남에서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 모든 사건에 우리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민간인의 죽음에 연루된 한국군 역시 피해자다. 한국군은 자의에 의해서 갔건 타의에 의해서 갔건 국가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베트남 사람들이지만, 여기에 연루된 한국군들은 모두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을 동원한 국가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폴란드가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를 해야 한다는 독일 메르켈 총리의 언급을 보면서,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및 태평양 전쟁 피해 국가에 대해, 한국이 베트남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베트남 사람들과 참전군인들의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한다. “전쟁! 전쟁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인간의 심성을 비정하게 변화시킨다. (중략)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 된다. 죄 없는 양민들은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 희생되어야 했다.”(http://www.vietnamwar.co.kr/technote6/board.php?board=gesipan6&page=2&command=body&no=139&no=140)
|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