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30 18:45
수정 : 2015.01.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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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트남 반전운동은 세계로 확산되었다. 사진 속 파리에서처럼 1968년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반전운동은 20세기 후반 새로운 진보를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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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8) 미국의 반전운동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구정공세는 미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결정적 실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시점에서 존슨은 평화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반전운동의 확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베트콩에 의한 학살이나 납치에는 눈감은 채 미군의 전쟁범죄만 주목한 반전운동은 미군의 패배에 큰 책임이 있었던 것인가?
1968년부터 확산된 반전운동은 닉슨 행정부에 들어오면서 절정에 달했다. 구정공세도 중요한 계기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전선 확대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워싱턴 디시(DC)에서는 1969년 10월15일 ‘베트남 전쟁 반대의 날’이 열렸다. 시민 수만명이 모인 가운데 ‘포레스트 검프’는 그의 여자친구와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민주당은 전임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개입에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전운동과 빠르게 결합했다. 시민들이 닉슨의 말과 정책을 신뢰하지 않았고, 반전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데도 197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시민들은 왜 닉슨을 다시 선택한 것일까?
반전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가들은 반전운동이 미국의 베트남 정책과 미국 정치에 미친 영향이 크지 않다고 평가한다. 반전운동이 1965년부터 1973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반전운동에 참여했지만, 실제로 반전운동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베트남에 있었던 전쟁을 국내로 가지고 왔지만, 실제 대중들의 참여도는 크지 않았다.
베트남 참전에 대한 반대는 미국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였지만,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는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중산층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던 이들은 조직적인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하층에 속했고, 여자와 흑인들이 많았으며, 낮은 수준의 직장을 갖고 있었다. 하층의 가족들로부터 더 많은 베트남 파병 희생자들이 나왔는데도, 이들은 닉슨을 지지했다.(C. DeBenedetti and C. Chatfield,
, 401~405쪽) 그러는 동안 민주당은 코끼리만 생각하고 있었다.(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반전운동은 막상 그 피해자들인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을 동원해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당시 반전운동이 너무나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이 정치적으로 서로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반전운동이 때로 급진주의자들이나 폭력주의자들에게 휘둘림을 당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징병과 관련된 기관에 대한 공격, 징병 카드 화형식, 그리고 휘날리는 베트콩의 깃발은 반전운동으로부터 대중들을 멀어지게 했다. 하버드대학 앞의 한 서점에는 지금도 베트콩의 깃발과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반전운동의 중심에는 대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은 징집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대학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을 벌여나갔다. 학생들을 동원하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평화로운 행진을 벌였지만, 때로는 학군단(ROTC) 건물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반전운동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전체 2500개의 대학 중 10%에서만 반전운동이 있었다.
반전운동은 그 자체로서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의 그룹은 자유주의자들로서 베트남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비판에만 집중했다. 미국의 개입은 실수였다는 것이다. 다른 그룹은 구좌파, 또는 신좌파로서 미국의 엘리트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속성을 비판하고자 했다. 이들은 부와 권위의 재분배를 통해 미국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했다. 아마도 미국 반전운동의 좌파들이 독일과 일본처럼 ‘적군파’로 진화되었다면, 이들은 시민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자체로서의 폭력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폭력성만을 부각시킨 닉슨 행정부의 성공적인 정책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닉슨 행정부는 반전운동 세력을 끊임없이 테러리스트와 공산주의자들로 몰아갔다. ‘반전운동은 호찌민과 베트콩들에게 힘을 주거나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어떠한 조사나 재판에서도 반전운동 참여자들이 하노이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증거는 없었고, 보편적 관점에서 전쟁의 부도덕성이 그 핵심 사안이었지만, 정부는 이를 정치적 이슈로 몰고 갔다. 곧 ‘정치화’된 것이다. 반전평화를 위해 노래를 불렀던 존 레넌은 끊임없이 사찰과 추방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징병을 거부한 무하마드 알리는 링으로부터 쫓겨났다.
도덕성을 강조한 반전운동이 보여준 반도덕적 프레임은 미국 시민사회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의 반도덕적 프레임보다도 더 강한 인상을 주었다. 1967년 이전 폭력은 인종주의자로 이루어진 지방 우익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 반전운동이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시위의 폭력성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히피로 대표되는 문화적 폭력성도 나타났다. 미국인들은 일관되게 반전운동에 대해 반대하면서도 점점 더 그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반전운동 세력을
테러리스트와 공산주의자로 몰아
반전평화 노래한 존 레넌은
사찰과 추방의 위협에 시달렸고
징병 거부한 알리는 링에서 쫓겨나
흑인민권운동·히피와 결합한
반전운동은 반기성권력과
반문화운동으로 전세계 확산
유럽의 68혁명으로 이어졌고
1969년 우드스톡 축제를 만들어
‘코끼리’의 프레임 벗어나려는 노력
반전운동에 대한 반동은 거셌다. 반전운동은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군사작전을 제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쟁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더 길게 끌도록 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반전운동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을 움직였고, 닉슨 정부의 군사작전은 의회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제한되었다. 또한 반전운동은 남베트남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하노이는 반전운동으로부터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주장을 한 가핑클(Adam Garfinkle, )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만약 베트남화 작업이 2~3년이 아닌 10~12년 정도 계속되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정치적, 군사적 영역에서와 달리 반전운동은 또한 미국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반전운동이 가져온 혁명은 그 운동 자체가 ‘베트남전 개입 반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미국 내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결합하면서 상승작용을 했기 때문이었다.
반전운동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매카시즘과 같이 냉전에 편승한 정부의 독주에 미국 사회가 염증을 느끼고 있던 시기와 일치했다. 1960년 U-2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국인들은 소련 정부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거짓말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미국 정부는 U-2기가 소련 영공을 넘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곧 거짓말로 드러났다. 1961년 영국에서 있었던 프러퓨모(Profumo) 장관의 섹스 스캔들 역시 또 다른 사례였다. 한국이었다면 지금까지도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겠지만, 당시 장관이었던 프러퓨모는 자신은 스캔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가 곧 거짓이 폭로되었고, 여기에 더해 그 상대가 소련의 스파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냉전을 빙자한 정부와 기존 질서의 방종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반기성권력(anti establishment) 운동, 반문화(counter-culture)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의 또 다른 문제는 인종, 성, 여성 인권, 마약 등 금기사항에 대한 반항이었다. 영화 <미시시피 버닝>(1988)에서처럼 1960년대 후반까지 흑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흑인들이 미국 인구 중 차지하는 비중은 4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냉전 이데올로기를 위한 희생을 강요받았다. 이런 와중에 흑인들이 문화/사회 활동을 통해 그들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1920년대부터 인정받기 시작해 1949년 2월에는 재즈음악가로는 처음으로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다. 그의 노래 ‘헬로, 돌리!’(Hello, Dolly!)는 1964년 팝차트에서 비틀스를 1위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비록 암스트롱은 ‘엉클 톰’으로 불리면서 흑인민권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지만.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3년 흑인민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버밍햄 캠페인을 시작했고, 1964년 버클리 대학에서는 ‘프리 스피치’ 운동이 시작되었다. 동성애와 여성인권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고, 전통적 형태의 결혼으로부터 벗어나는 오락으로서의 섹스 문화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반기성권력 운동은 ‘코끼리’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반전운동은 1965년 이후 흑인민권운동과 결합하면서 큰 힘을 받기 시작했다. 1967년 4월4일 뉴욕에서 마틴 루서 킹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호 아저씨(호찌민)의 정부는 중국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가 아니라 베트남 바로 그곳에 사는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원주민들에 의해 구성된 정부이며, 농부들에게 있어서 이 새로운 정부는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토지개혁을 한 정부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구정공세와 함께 흑인민권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반전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반전운동은 반문화로서의 히피와도 결합했다. 1967년은 히피가 시작된 역사적인 해였다.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공원에서 ‘휴먼비인’(Human Be-In)이라는 축제가 열렸고, 기존 문화와 가치관에 반대하는 히피들이 나타났다. 마약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 법안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휴먼비인에서, 히피들의 국가(Anthem)로 지칭되는 스콧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 너의 머리에 꽃을 꽂아라”가 울려퍼졌다. 히피는 ‘꽃의 아이들’(플라워 칠드런)로 지칭되었다. 이 과정에서 히피와 사회주의자들의 사이에 위치하는 이피(Yippies)라는 새로운 그룹이 등장하기도 했다.
호그 팜(Hog Farm) 운동도 히피 문화의 산실이었다. 이들은 히피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1969년 우드스톡 축제를 만들었다. 3일간 열린 우드스톡 축제는 30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지미 헨드릭스와 산타나, 조 코커라는 당대의 대중음악가들을 탄생시켰다. 이곳은 히피들의 해방구였다. 이웃 국가인 멕시코에서도 1971년 멕시코판 우드스톡이 열렸고, 누드와 마약이 판을 쳤다. 멕시코의 독재자 루이스 에체베리아의 시대에 있었던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학생들의 저항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구상도 이때부터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34년에 시작된 미국의 영화검열제도(Hays Code)에 반대하는 영화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검열기관(Production Code Administration)에 의해서 매력적인 만화 주인공 베티 붑(Betty Boop)은 그녀의 옷을 구식의 가정주부 스커트로 바꾸어야 했고, 영화 <카사블랑카>(1942)에서 주인공들이 파리에서 함께 자는 장면은 촬영될 수 없었다. 타잔(1934)의 여자친구 제인의 누드 신은 가위로 잘려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작된 나치의 집단수용소 관련 영화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이를 반대하는 뉴시네마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화 <보니와 클라이드>(1967)는 그 시작이었고 <이지 라이더>(1969)는 대표적인 영화였다. 성적 표현은 물론 범죄와 마약이 영화 속에서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인간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반문화운동의 영상 표출이었다.
반전, 반기성권력, 반문화는 세계로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 로마, 그리고 서베를린이 그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파리에서는 1968년 5월 노동자들과 학생 총파업이 일어났다.(소위 68혁명) 서독에서는 코무네 1(Kommune 1)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신좌파(뉴레프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볼셰비키로부터 사이비로 비판받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와 일본의 학생운동의 지적인 배경이 되었다.
반기성권력, 반문화, 그리고 반전은 그 당시에는 성숙하지 못했고, 제멋대로였으며, 비합리적이었다. 심지어 적군파처럼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이 있었다. 아방가르드가 힘을 얻었고, 뉴시네마가 창조되었으며, 기술에서도 혁명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두 명의 스티브(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사토리(깨달음·득도·각성)에서 실리콘밸리까지”라는 글을 쓴 문화역사학자 로잭(Theodore Roszak)은 이들의 영감은 이 시기 환각제와 버클리, 스탠퍼드, 엠아이티(MIT)를 잇는 ‘배회’(roaming) 속에서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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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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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운동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진보운동이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이슈들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듯이, 반전운동은 20세기 후반 새로운 진보를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킹 목사는 “미국의 정신이 중독되어 죽었다면, 죽은 시체의 일부는 ‘베트남’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른 일부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할을 했다. 창조는 통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통제에 대한 반동과 자유로부터 온다. 탈냉전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의 기원이 반전운동의 지구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역설이다. 백인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려고 했다는 비난을 받은 암스트롱의 ‘왓 어 원더풀 월드’가 베트남 전쟁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 <굿모닝 베트남>(1987)의 주제곡으로 나왔다는 역설과 함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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