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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헌법이 정지되고 의회가 해산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은 국민들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선포된 뒤 서울 거리에 등장한 탱크와 장갑차들. 73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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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29) 닉슨 독트린이 부른 위기
1971년 11월18일 타이(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사정전위원회에 참여했고, 1967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우의를 다졌던 군부 출신의 타놈 끼띠카쫀 총리가 무혈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0년 크리스마스에 타이와 소련 사이의 무역협정 조인을 주도했던 민간인 출신 타낫 코만 외무장관과 그 주변 인물들을 축출하고, 역시 군부 출신인 자신의 아들과 사돈을 권력의 핵으로 끌어올렸다.
쿠데타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이 약화되면서 외무장관이었던 타낫이 소련과 중국에 다가가려 했다는 점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좌빨’ 타낫과 민간정치인들을 몰아내면서 주방콕 미국대사와의 회담을 통해 반공친미 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른 하나는 사회불안이었다. 군부는 성명을 통해 ‘의회의 불안, 타이 북부의 불안, 학생들의 소요 등 국내 불안사태와 위협적인 국제정세’가 쿠데타의 주요 이유였다고 밝혔다.(중앙일보, 1971년 11월18일치) 마치 한국에서 발생했던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의 내용을 짬뽕해 놓은 것 같았다.
타이·필리핀은 왜 중국·소련에 손짓했나
10개월이 지난 1972년 9월22일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65년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했고, 1969년 재선에 성공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전통적인 민주적 절차를 허락하기에 우리 시대는 너무나 심각하고 위험하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헌법 절차의 중지를 선언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마르코스는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위협을 막고, 필리핀 사회를 ‘바공 리푸난’(신사회, New Society)으로 만들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 활동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1973년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새마을 운동을 실시하고 민주주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내용을 담은 새 헌법을 선포한 유신의 판박이였다.
필리핀에서 헌법이 정지되고 의회가 해산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은 국민들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선거인단(통일주체국민회의)이 체육관에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고, 연임 제한은 철폐되었다. 기존 의회는 해산되었고, 새로 구성되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2년 임기로 임명하여 ‘유신정우회’(유정회)에 소속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총선에서 여당과 야당이 의석을 반분한다고 본다면,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 2가 자동적으로 대통령과 정부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었다.
유신을 선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국제정세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였다. 미국 쪽의 요구로 인해 닉슨 독트린과 관련된 언급이 삭제되었지만, 데탕트라는 것이 ‘본질은 열강의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해결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열강이 긴장 완화라는 이름 아래에서 제3국이나 작은 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남북대화를 계속하고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다.
이후 한국과 필리핀은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필리핀은 대표적인 민주화 인사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의 암살을 거쳐 1986년에 가서야 민주화가 되었다. 한국은 필리핀의 민주화에 힘입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서 1987년 민주화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의 유산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필리핀은 거대 지주의 파벌싸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민주화가 되자 야당이 분열되었고, 이후 남남갈등의 수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타이는 가장 먼저 민주화가 되었다. 1973년 10월14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한 군부는 시민 77명을 죽이고 857명에게 중상을 입힌 채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민주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6년 시민과 학생을 죽인 끼띠카쫀의 귀국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중앙일보 1976년 10월7일치) 이후 1992년까지 타이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한국과 타이, 그리고 필리핀은 왜 이렇게 동일한 시기에 독재체제의 성립과 강화를 경험해야 했는가? 세 나라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쿠데타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내세웠던 명분과 주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닉슨 독트린 이후에 형성된 데탕트가 이들에게 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타이의 정치인들은 베트남에서 손을 빼는 미국만을 믿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과 소련에 손짓을 했다. 북베트남도 접촉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사이에 놓고 베트남과 가까이에 위치한 타이에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 축소는 곧 위기로 다가왔다.
한국과 필리핀도 닉슨 독트린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과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의 감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70년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 위원회에서 필리핀의 안보 위협이 평가절하되었으며, 한국에 대한 원조가 과도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만큼 미국 경제가 어렵기는 했지만, 필리핀과 한국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1968년과 1969년 안보위기를 경험한 한국과 1970년 공산당과 이슬람 분리운동이 활성화되었던 필리핀은 동병상련이었다.
필리핀은 1972년 소련,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했고, 1975년 중국, 쿠바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분단 상태로 북한과 대결하고 있었던 한국은 타이, 필리핀과 달리 북한의 동맹국이자 후원국인 중국이나 소련과 관계를 정상화할 수 없었다. 물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3년 6·23 선언을 통해 북한과 수교한 국가와도 교류할 수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197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경제사절단도 파견하려 하였지만, 소련 정부가 거부했다. 해외 공관을 통해 소련의 외교관들을 접촉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카터 미국 행정부를 통해서 중국과의 수교를 타진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고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 중국은 문을 열지 않았다.
1971년 타이에서 쿠데타 발생1972년 9월 필리핀 계엄령 선포
한달도 채 안 돼 한국서 유신 선포
이후 3국에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베트남에 손 떼는 미국 때문이었다 베트남 특수로 안정적 집권 했는데
미국의 베트남 개입 줄며 각국의
미군기지 축소 등 경제 충격파
치명적 약점 많던 3국 정부에
민주화·중립화는 불가능한 길 1969년부터 전쟁특수가 흔들리다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했던 한국과 타이, 필리핀은 이렇게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확대해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이를 통해 데탕트의 상황 아래서 중립화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한국과 같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1971년부터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1972년에는 통일의 원칙을 확인한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고려해볼 만한 대안이었다. 남북 간 합의를 통한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는 당시 닉슨 행정부에서도 바라는 바였다. 긴장 완화가 되어야만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고, 미군 철수는 곧 미국 정부의 재정을 아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니까. 타이와 필리핀 역시 위치적으로 중립화 선언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유럽에서의 헬싱키 프로세스가 이와 유사한 방식을 보여주며, 결국은 공산권의 몰락을 불러왔다. 3국의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이와는 정반대의 방식이었다. 독재체제의 수립과 사회통제의 강화였다. 외부적 위기가 곧 정권의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타이에서는 쿠데타 1년 전인 1970년 끼띠카쫀 총리가 타이 국내의 긴장사태와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에 방콕의 수도경비사령부가 전면비상에 돌입했다고 발표했다. 타이 군부는 ‘공산주의자들이 국가안보에 역행하는 행동 임무를 띠고 지난 6일 방콕 시내에 잠입했다’고 하면서 요시찰 명단에 올라 있는 반정부 좌익 인사들을 전면 검속하였다.(중앙일보 1970년 7월9일치) 박정희 정부도 1971년 12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전군에 서한을 보냈다.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서 주적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한국과 타이, 그리고 필리핀의 이러한 선택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권 강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 특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965년 이후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고(2014년 11월17일치 ‘쏟아지는 외화에 입을 다물지 못하다’ 참조), 타이와 필리핀도 베트남 파병을 통한 전쟁 특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타이와 필리핀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규모의 군대를 파병했지만, 전쟁 특수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타이는 1969년과 1970년 가장 많은 1만1500여명을 파병했지만, 그 외에는 2000~6000명 수준을 유지했고, 필리핀은 1966년과 1967년 2000여명을 파병했지만, 그 외에는 100여명도 안 되는 규모였다. 1965년 파병 이후 연평균 9%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한국과 마찬가지로 필리핀과 타이는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각각 5.1%와 9.4%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한국은 파병군인과 근로자의 송금이나 무역 확대가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타이와 필리핀은 이와 달리 주로 역내 미군기지 조달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필리핀과 타이는 베트남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던 만큼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65년 이후 한국과 필리핀, 그리고 타이의 경제성장은 이들 국가에서 정권이 안정적으로 집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르코스는 송유관과 발전소 시설의 확충을 통한 경제성장, 그리고 정부 개혁을 실시하여 자신의 기반을 든든하게 다졌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박정희 정부도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과 필리핀은 1967년과 1969년 기존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성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주요한 구실을 했다. 타이에서도 군부와 민간인이 불안정하게 동거하고 있었던 정부가 그나마 전쟁 특수로 인해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 수 있었다. 닉슨 독트린은 이러한 정권의 안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전쟁 특수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1969년부터 용역 계약이 줄어들었다. 사이밍턴 위원회는 이 세 나라가 전쟁 기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아간 돈을 조사했다.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줄이면서 타이와 필리핀의 미군기지는 축소되었고, 주한미군과 필리핀 주둔 미군의 규모도 줄어들었다. 역내 조달이 줄어들면서 국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민주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 나라의 정부는 모두 정당성에서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타이의 경우 겉으로 볼 때는 1958년 쿠데타 이후 민간 전문가와 왕의 지지 아래 군부가 정권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1964년부터 집권한 타놈 끼띠카쫀의 전횡과 부패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높았다. 마르코스는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역사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1969년 선거의 부정 시비가 발목을 잡았다.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예상치 못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1967년과 1971년의 부정선거 시비, 그리고 연임만 가능했던 헌법을 개정한 1969년 삼선개헌으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도 박정희 정부를 불안하게 했다. 따라서 민주화나 중립화는 3국의 정부가 재집권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하는 길이었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의 모토는 민주주의였다. 미국은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국가와 동맹관계를 맺는 것을 꺼렸다. 물론 모든 대외관계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반공주의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민주주의보다도 반공과 내부적 안정을 더 중요시했다. 칠레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아옌데를 몰아내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지했던 것, 한국에서 광주의 시민들보다 신군부를 지지했던 것, 이란과 니카라과와 같은 극단적인 독재정권을 지지했던 것, 나중에는 미국의 적이 되었던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지지했던 것 등은 모두 미국의 냉전전략과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관망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국들에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기제는 필요했다. 그것마저 없다면 미국이 이들 나라를 지원할 명분이 없었다. 한국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58년 2·4파동, 1963년 민정이양 파동 등에 개입해서 민주주의와 시민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만약 미국 의회에서 한국 정부의 비민주성을 이유로 해서 원조 자금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냉전정책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유신체제 내내 미국 의회, 그리고 카터 행정부와 갈등을 빚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심지어 카터 행정부 시기에는 인권 문제를 이유로 한국에 대한 무기 판매까지도 제한함으로써 군산복합체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 이승만 제거계획을 세웠던 것과 달리 1970년대 초 미국은 동맹국 한국, 필리핀, 타이의 독재권력 강화에 개입할 수 없었다. 최소한이라도 민주주의적 장치가 작동되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강제할 수 있는 힘과 신뢰가 없었다. 주둔 미군의 철수 및 감축, 그리고 베트남으로부터의 철수를 일방적으로 결정한 닉슨 행정부는 더 이상 이들 국가에 개입할 수 없었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를 바라보면서 주한미국 대사 하비브는 세 가지 옵션, 즉 즉각적인 개입, 압력, 그리고 관망 중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관망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미국이 더 이상 한국 내정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하비브가 국무부에 보내는 서신, “한국 헌법 개정에 대한 미국의 반응” 1972년 10월23일자)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파탄이 난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에 파병한 동맹국에는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통한 강력한 미국의 재건을 추진하기 전까지.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통받았던 1970년대의 람보가 강력한 미국을 상징하는 1980년대 반공의 전사로 거듭날 때까지. 사회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미국·유럽과는 달리 아시아의 동맹국들에는 거대한 정치적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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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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