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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황정민)가 베트남에 기술자로 파견 나가 한국군에게 구출되기 직전 베트콩으로부터 피격 위기를 맞은 모습. 이 장면은 1973년과 197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시기는 이미 한국군과 미군이 모두 철수한 때라 현실성은 전혀 없다. 1970년대를 다룬 최근의 영화들은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 채 향수만 불러일으키고 있어 아쉽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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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30) 1970년대
1970년대는 어둠의 시대였다. 그러나 어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2014년과 2015년 영화의 화두는 1970년대였다. 2014년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국제시장>에서부터 2015년 벽두 개봉된 <쎄시봉>과 <강남 1970>은 모두 1970년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왜 1970년대인가?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 흥남 철수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은 1960년대 광부로 서독 파견, 그리고 1970년대 근로자로 베트남 파견이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 중 하나는 단연 가수 남진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인터넷에는 ‘남진이 베트남에 참전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남진은 실제로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실제로 수색과 주민 소개 작전에 참여했는지, ‘님과 함께’가 그의 베트남 참전 당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식모의 시대, 영자의 전성시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장면도 논란이 되었다. 이 장면은 1973년과 197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이미 한국군과 미군 전투부대가 모두 철수한 이후였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외국 기업에 고용된 한국의 기술자, 근로자들, 그리고 대사관 관계자들이 남아 있었지만, 영화에서와 같이 한국군이 수색 활동과 주민 소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주민들의 한국군과 베트콩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아시나요’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영화 <쎄시봉>은 1970년대 초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뒤바꾼 포크 음악의 세계를 배경으로 했다. 1960년대까지 트로트와 함께 주한 미8군의 쇼를 통해 활약한 패티김, 서수남, 윤복희, 신중현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이었다. ‘동백아가씨’의 이미자나 한복남, 현인, 명국환, 남일해, 배호 등 트로트 가수들의 인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엘피(LP)를 통해서 음악을 접하던 대중들에게 쎄시봉에서 기타를 들고 라이브로 불렀던 포크송 가수들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1950년대의 ‘은하수’, ‘영보다방’, ‘돌체’는 1960년대 말 이후 ‘쎄시봉’으로 대체되었다.
<강남 1970>은 1970년대 강남개발을 배경으로 했다. 지금 서울을 둘로 갈라놓은 강남은 1970년대 이전에는 밭이거나 쓸모없는 땅이었다.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재개발을 통한 서울의 재편이 한계에 이르자,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한강 이남으로 서울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밭을 소유한 사람들은 땅값이 오르면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베트남에서 실력을 쌓은 건축회사들은 강남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급등한 땅의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현대아파트 부정 분양 사건이 발생했다. 영화 <초록물고기>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초 일산과 분당의 전사를 보는 것 같다.
영화는 영화다. 영화를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없는 만큼 시나리오의 내용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 영화들이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향수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주목받았던 <서편제>가 <마지막 황제>나 <패왕별희>만큼 세계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장에는 미국제 제품이, 다방에는 디제이(DJ)와 포크송이, 병맥주가 아닌 생맥주가, 그리고 부동산 투기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1970년대에 왜 그런 거대한 생활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2012년의 대통령 선거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국제시장>에 나오는 국기하강식 장면과 관련된 논란은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주고 있다. 매일 저녁 해 질 무렵 길거리에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는 모습은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도 재현되었던, 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직접 지휘했던 국기하강식이 떠오르는 5060 세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는 한국인들에게 중요하면서도 특이한 시대였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1970년대만큼 큰 변화를 느끼게 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120년 전 갑오개혁 직후 상투를 잘라야 했던 1895년과, <모던보이>(2008)에서 보이는 문화통치 이후의 시기가 1970년대의 급격한 변화와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70년대의 변화는 오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든 그 기원이 되었기에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의 한국 사회는 한국인들에게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었던 시대였다. 유신체제의 규율은 한국인들에게 그것을 강제했다. 막걸리 마시고 대통령 욕하면 구속되는 막걸리 보안법의 시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갑작스러운 물질적 풍요를 경험했다. 베트남으로부터 외화만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미제 전자제품과 양담배가 유입되었다. 미제 물품도 처음에는 미8군 영내매점(PX)에서 나와 도깨비시장에서 비밀스럽게 유통되었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제 물품은 시장 곳곳에 등장했다. 정부의 특별단속도 통하지 않았다. 국제시장도 그 과정에서 크게 성장했다.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산층이 생기면서 그중 상위 계층에서는 소위 ‘식모’를 쓰기 시작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식모는 상류층에서만 쓸 수 있었다. 1975년 37만명이라는 최대 관객을 끌어모았고, 당시까지 역대 박스오피스에서 3위를 차지했던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식모였다. 베트남을 다녀온 때밀이 창수와 영자, 영자를 식모로 고용한 ‘주인집’이나 모두 1970년대를 통해서 새롭게 등장한 계층이었다. 그래도 때밀이 창수가 주차관리원 자리도 얻지 못했던 람보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나 보다.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던막걸리보안법의 시대였지만
갑작스레 풍요로워진 시대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구문화가 직수입되었다 베트남서 벌어들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그 인터체인지를 중심으로
전쟁특수 수혜 받은 재벌들이
부동산 투기 바람 주도했다 미국 수정주의, 한국 지성계에 큰 파문 탈정치화된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979년 부마항쟁으로 국제시장 상인들도 최루탄 냄새에 고생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 전쟁을 통한 미국 대중문화의 직수입은 통기타의 시대, 신중현과 같은 록의 시대, 그리고 40만 관객을 돌파하는 대중 영화(<별들의 고향>, 1974년)의 시대를 열었다. 한국인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서구 문화는 베트남을 거쳐서 직수입되었다. 이미 미8군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은 허울뿐인 장막마저도 걷어버렸다. 유신 권력은 퇴폐풍조를 단속한다는 명분 아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고고장은 문을 닫아야 했지만, 영화 <고고70>(2008)에 나오는 새로운 문화의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소위 ‘호스티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대중을 끌어당겼다. <별들의 고향>(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꽃순이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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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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