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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06 18:38 수정 : 2015.03.07 15:38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황정민)가 베트남에 기술자로 파견 나가 한국군에게 구출되기 직전 베트콩으로부터 피격 위기를 맞은 모습. 이 장면은 1973년과 197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시기는 이미 한국군과 미군이 모두 철수한 때라 현실성은 전혀 없다. 1970년대를 다룬 최근의 영화들은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 채 향수만 불러일으키고 있어 아쉽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30) 1970년대

1970년대는 어둠의 시대였다. 그러나 어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2014년과 2015년 영화의 화두는 1970년대였다. 2014년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국제시장>에서부터 2015년 벽두 개봉된 <쎄시봉>과 <강남 1970>은 모두 1970년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왜 1970년대인가?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 흥남 철수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은 1960년대 광부로 서독 파견, 그리고 1970년대 근로자로 베트남 파견이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 중 하나는 단연 가수 남진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인터넷에는 ‘남진이 베트남에 참전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남진은 실제로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실제로 수색과 주민 소개 작전에 참여했는지, ‘님과 함께’가 그의 베트남 참전 당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식모의 시대, 영자의 전성시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장면도 논란이 되었다. 이 장면은 1973년과 197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이미 한국군과 미군 전투부대가 모두 철수한 이후였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외국 기업에 고용된 한국의 기술자, 근로자들, 그리고 대사관 관계자들이 남아 있었지만, 영화에서와 같이 한국군이 수색 활동과 주민 소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주민들의 한국군과 베트콩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아시나요’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영화 <쎄시봉>은 1970년대 초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뒤바꾼 포크 음악의 세계를 배경으로 했다. 1960년대까지 트로트와 함께 주한 미8군의 쇼를 통해 활약한 패티김, 서수남, 윤복희, 신중현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이었다. ‘동백아가씨’의 이미자나 한복남, 현인, 명국환, 남일해, 배호 등 트로트 가수들의 인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엘피(LP)를 통해서 음악을 접하던 대중들에게 쎄시봉에서 기타를 들고 라이브로 불렀던 포크송 가수들은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1950년대의 ‘은하수’, ‘영보다방’, ‘돌체’는 1960년대 말 이후 ‘쎄시봉’으로 대체되었다.

<강남 1970>은 1970년대 강남개발을 배경으로 했다. 지금 서울을 둘로 갈라놓은 강남은 1970년대 이전에는 밭이거나 쓸모없는 땅이었다.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재개발을 통한 서울의 재편이 한계에 이르자,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한강 이남으로 서울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밭을 소유한 사람들은 땅값이 오르면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베트남에서 실력을 쌓은 건축회사들은 강남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급등한 땅의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현대아파트 부정 분양 사건이 발생했다. 영화 <초록물고기>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초 일산과 분당의 전사를 보는 것 같다.

영화는 영화다. 영화를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없는 만큼 시나리오의 내용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 영화들이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향수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주목받았던 <서편제>가 <마지막 황제>나 <패왕별희>만큼 세계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장에는 미국제 제품이, 다방에는 디제이(DJ)와 포크송이, 병맥주가 아닌 생맥주가, 그리고 부동산 투기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1970년대에 왜 그런 거대한 생활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2012년의 대통령 선거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국제시장>에 나오는 국기하강식 장면과 관련된 논란은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주고 있다. 매일 저녁 해 질 무렵 길거리에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는 모습은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도 재현되었던, 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이 직접 지휘했던 국기하강식이 떠오르는 5060 세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는 한국인들에게 중요하면서도 특이한 시대였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1970년대만큼 큰 변화를 느끼게 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120년 전 갑오개혁 직후 상투를 잘라야 했던 1895년과, <모던보이>(2008)에서 보이는 문화통치 이후의 시기가 1970년대의 급격한 변화와 유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70년대의 변화는 오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든 그 기원이 되었기에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의 한국 사회는 한국인들에게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었던 시대였다. 유신체제의 규율은 한국인들에게 그것을 강제했다. 막걸리 마시고 대통령 욕하면 구속되는 막걸리 보안법의 시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갑작스러운 물질적 풍요를 경험했다. 베트남으로부터 외화만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미제 전자제품과 양담배가 유입되었다. 미제 물품도 처음에는 미8군 영내매점(PX)에서 나와 도깨비시장에서 비밀스럽게 유통되었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제 물품은 시장 곳곳에 등장했다. 정부의 특별단속도 통하지 않았다. 국제시장도 그 과정에서 크게 성장했다.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산층이 생기면서 그중 상위 계층에서는 소위 ‘식모’를 쓰기 시작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식모는 상류층에서만 쓸 수 있었다. 1975년 37만명이라는 최대 관객을 끌어모았고, 당시까지 역대 박스오피스에서 3위를 차지했던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식모였다. 베트남을 다녀온 때밀이 창수와 영자, 영자를 식모로 고용한 ‘주인집’이나 모두 1970년대를 통해서 새롭게 등장한 계층이었다. 그래도 때밀이 창수가 주차관리원 자리도 얻지 못했던 람보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나 보다.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던
막걸리보안법의 시대였지만
갑작스레 풍요로워진 시대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구문화가 직수입되었다

베트남서 벌어들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그 인터체인지를 중심으로
전쟁특수 수혜 받은 재벌들이
부동산 투기 바람 주도했다

미국 수정주의, 한국 지성계에 큰 파문

탈정치화된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979년 부마항쟁으로 국제시장 상인들도 최루탄 냄새에 고생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 전쟁을 통한 미국 대중문화의 직수입은 통기타의 시대, 신중현과 같은 록의 시대, 그리고 40만 관객을 돌파하는 대중 영화(<별들의 고향>, 1974년)의 시대를 열었다. 한국인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서구 문화는 베트남을 거쳐서 직수입되었다. 이미 미8군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은 허울뿐인 장막마저도 걷어버렸다. 유신 권력은 퇴폐풍조를 단속한다는 명분 아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고고장은 문을 닫아야 했지만, 영화 <고고70>(2008)에 나오는 새로운 문화의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소위 ‘호스티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대중을 끌어당겼다. <별들의 고향>(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꽃순이를 아시나요>, , <별들의 고향 2>(이상 1978) 등이 정권의 퇴폐풍조 단속을 비웃듯이 연이어 스크린에 걸렸다. 퇴폐풍조를 조장해서 정권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 한다는 ‘유언비어’도 돌았다. 3S(Sex, Sports, Screen)란 말도 197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트남으로부터 벌어들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나들목)를 중심으로 부동산 투기 바람이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는 전쟁특수로 돈을 번 재벌들이 있었다. 1970년 부실기업을 정리할 때 청와대 비서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재벌들은 모두 엄청난 부동산을 갖고 있었다. 그중에는 전쟁특수의 호황 속에서 구입한 부동산이 많았고, 심지어는 외채를 갖고 구입한 부동산도 있었다. 재벌 사주의 도덕적 해이는 8·3조치(사채 동결 긴급재정명령)를 불렀다.

재개발 과정에서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 사건을 경험한 서울시는 강남개발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 만들어졌던 계획도시가 강남에 탄생했다. 재벌이나 하던 땅투기가 중산층 사이에서도 시작되었다. 열심히 일해서 평생 벌어야 할 돈을 아파트 한 채로 몇 년 사이에 벌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이웃 일본과는 달리 반전운동이나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가 없었던 한국에서 서구 문화의 직수입은 정부의 통제,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맞물리면서 ‘저항’의 정신을 지워버린 채 들어왔다. 세계사적으로 1960년대 대중문화의 재편이 반전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정부가 원하는 바였다.

조금이라도 저항 문화의 기미가 보이면, 그리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으면 그것은 곧 금지되었다. 김지하의 ‘오적’이 그랬고,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그랬다. 뚜렷한 이유도 없는 금지곡도 있었다. 김추자의 ‘거짓말’,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배호의 ‘0시의 이별’, 송창식의 ‘왜 불러’,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신중현의 ‘미인’, 이장희의 ‘그건 너’,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당시 사람들은 금지시킨 진짜 이유를 다 알았지만, 정부는 그 노래들이 왜색이 짙고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금지곡의 빈자리를 ‘나의 조국’, ‘새마을운동의 노래’, ‘예비군가’로 메꾸려 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대학가요제’를 시작했다.

탈정치, 탈저항이 강요되었지만, 물론 한국 사람들이 묵묵히 순종하지만은 않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의 흐름은 일제강점기에도, 1950년대 극단적 반공이데올로기의 시대에도 있었듯이 베트남 전쟁이 한국 사회에 준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화만을 외쳤던 1960년대까지의 사회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1985)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10년이 지나서 나왔지만, 베트남 전쟁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 1970년대 지식인들의 고뇌와 노력을 보여주었다.

“베트남 전쟁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 아니다. 민족주의·제국주의·독립투쟁·식민주의·혁명·반혁명·통일·분열·독립·의존·인권·종교·자유·억압·반색인·황색인·아시아·서양·현대·낙후·공업·농업·초현대식 폭격기·원시적 소총·전자계산기·주판·선입관·고정관념·사랑·증오…, 그리고 그 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20세기의 모든 갈등의 요소가 뒤범벅이 되어서 전개된 전쟁이었다.”

반전운동으로 시작된 미국의 수정주의는 한국의 지성계에도 큰 파문을 던졌다.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이던 미국의 지성들이 접할 수 있었던 자료는 1970년대로부터 30년 전인 1940년대의 자료였다. 바로 주한미군정 자료들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베트남과 상황이 비슷했다. 식민지를 경험했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다. 미국과 중국이 개입했고, 소련의 원조가 있었다. 이들은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미국은 초대받았는가?’ 베트남 대신 평화봉사단을 택해 한국에 왔던 연구자들이 수정주의의 한 축을 담당했고,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대표작이었다.

한국의 지성계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국은 왜 분단되었는가? 한국전쟁은 단순히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의 대결이었는가? 한국인들이 그토록 원했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근대화가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해방과 근대화는 과연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한국 사회가 알고 있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가, 아니면 한 차례 가공된 세계인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8억인과의 대화>(1977), 그리고 <우상과 이성>(1977),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 박현채의 <민족경제론>(1978), 송건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1979) 등은 냉전의 논리에 갇혔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눈과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한국 사회에서 그때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주제들이 분석 대상이 되었다.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 친일파 청산의 실패, 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지원했던 중국에 대한 분석 등은 논쟁 자체가 터부시되었던 주제들이었다.

반전운동 정신이 한국사회에 스며들다

반전운동에서 탄생한 히피의 영향을 받은 한대수는 쎄시봉에서 데뷔했고, 쎄시봉의 시대를 열었다. 한대수는 1969년 드라마센터에서 귀국 공연을 열었고, ‘물 좀 주소’, ‘고무신’ 등을 발표했다. 그의 노래는 곧 금지곡 리스트에 올라갔고,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2002년 한대수는 9집을 발표했고, 그 안에는 노래 ‘호치민’이 있었다.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학자의 집안이고 불란서 점령 당시에/ 왜 서양세력이 자기 나라를 이렇게 장기간 동안 점령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또 워낙 문학가 집안이니까 여러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게 되죠/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그래서 적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라라는/ 요런 명언이 있으니까 불어를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요)/ 그런데 불란서를 가야 되겠는데 유람선의 요리사 조수로 취직하게 됩니다/ 불란서에서 불란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또 거기에서 맑시즘을 배웠고/ 드디어 어떠한 계기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아 그래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대학교에 입학해서/ 과연, 제국주의, 자본주의 요런 데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다가 러시아의 힘을 얻고 중국에 또 이사를 갑니다/ 여러가지 민중의 고통, 민중의 핍박, 또 프롤레타리아/ 거기에 대해서 배우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옵니다/ 호치민 호치민/ 미국이 이젠 등장하는데 그 부패된 고딘디엠 정부를 지원하면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아주 지속된 전쟁의 끝없는 폭격/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로 당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겨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한대수는 말한다. “히피가 자유롭고 세계 평화를 사랑하고 비즈니스 마인드보다 예술창작 마인드를 더 높게 쳐주고 그런 건데, 순전히 성적으로 문란하고 마약 하고 뭐 이런 것만 히피라고 생각하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은 거예요.”(조선일보 2011년 7월15일치) 백남준 예술의 탄생 배경이 된 반전운동의 정신은 한대수를 통해, 지식인들을 통해 한국 사회 속에 스며들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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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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