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3.20 18:54 수정 : 2015.03.22 10:15

남베트남 패망 직후인 1975년 5월, 남베트남 피난민들이 부산항에 상륙하고 있다. 남베트남의 패망과 김일성의 중국 방문으로 인한 ‘심정적’ 안보위기로 한국 사회는 더욱 얼어붙었다. 1976 보도사진연감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31) 남베트남 패망과 동북아

1973년 이후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로 남베트남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을 잃었다. 물론 남베트남은 100만 대군을 보유한,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의 군사대국이었다. 문제는 사기였다. 1968년 구정공세 이후 남베트남군이 베트콩과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승리한 전투가 거의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도 그랬는데, 이들이 철수한 이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군의 철수에도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1973년 4월 닉슨은 티에우(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미군이 철수했지만, 남베트남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중국과 북베트남, 그리고 베트콩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닉슨의 약속은 헛공약에 불과했다. 닉슨 본인이 의지가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의회도 닉슨의 남베트남 정부 지원 요청을 번번이 거부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975년 4월9일,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21일 전, 10억달러 원조안이 미국 의회에 상정되었지만, 부결되었다.

1950년 흥남부두 같았던 1975년 다낭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중부 반메투옷(부온마투옷)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이 다낭과 사이공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남베트남이 양분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술이었다. 3월31일 남베트남 제2의 도시이자 한국군이 활동했던 다낭이 함락되었다. 다낭 항구에서 수많은 남베트남군과 남베트남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1950년 겨울 흥남부두에서의 탈출과 비슷했다.

북베트남 공산당은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와 베트남 통일이 1977년이나 1978년에 가서야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지만, 남베트남 정부의 100만 대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반메투옷으로의 공세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이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사실은 남베트남이 무너지는 신호탄이었다.

이제 남베트남의 4분의 3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의해 점령된 상황에서 주한 미국 대사는 1975년 4월19일 한국민의 철수 대책을 강구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항복하기 11일 전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티에우 대통령이 사임했다. 남베트남의 패망은 확실해졌다. 4월23일 포드 대통령은 “끝난 전쟁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연설을 했다. 4월28일 즈엉반민이 남베트남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틀 뒤 북베트남의 탱크가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에 진입해 항복문서에 사인을 받았다.

2014년 6월과 7월에 방영된 제이티비시(JTBC)의 <사이공 1975>(전 4편)는 남베트남의 마지막 한 달 동안 남베트남에 있었던 한국 교민과 대사관 직원들의 탈출 과정, 그리고 남베트남 패망 이후에도 탈출하지 못하고 5년 이상 베트남에 억류되어 있었던 한국대사관 공관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2만명의 교민이 있었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남베트남에 거주하거나 불법체류하고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한국군을 대상으로 나이트클럽이나 바를 운영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사업가와 한국 회사, 그리고 외국계 회사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베트남에 재산이 있는 상태에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1945년 해방 후에도 곧바로 떠나지 못했던 재일본 조선인들이나 재조선 일본인들과 유사한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북베트남의 공세가 심해지면서 미군이 다시 돌아온다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는 기대도 있었다. 주베트남 미국 대사가 사이공을 떠나기 하루 전까지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많은 한국인들이 사이공에 남아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행히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위해 1975년 4월9일 부산을 떠나 4월19일 사이공의 뉴포트항에 도착한 두 척의 한국 해군 함정이 있었다. 이 함정들은 약 700여명의 교민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헬기를 이용해서 미국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철수시키겠다는 미국대사관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던 한국대사관 공관원들은 사이공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작전시간의 실수로 인해 한국대사관의 공관원 중 일부가 사이공을 탈출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특히 중앙정보부 파견 공사이면서 티에우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였던 이대용 공사의 억류는 한국 정부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대용 공사는 1969년 1월 발생한 소위 ‘이수근 간첩사건’ 당시 이수근을 사이공의 탄손누트(떤선녓) 공항에서 체포해서 국내로 압송했던 장본인이자 한국 정부의 베트남 정책에 핵심 인물이었다. 최근 출간된 공로명 전 외무장관의 <나의 외교노트>라는 자서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이대용 공사의 석방을 위해 베트남 공산당뿐만 아니라 북한과도 협상을 했으며, 남한에 붙잡혀 있는 7명의 북한 공작원과 이대용 공사의 교환을 논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군 철수가 늦어져서 발생했던 손실과 함께 대사관 공관원들의 억류는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발생했던 한국 정부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였다.

중국은 소련과 가까운 북베트남의
승리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가능성 높았다
이때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했다

더욱 얼어붙어버린 한국 사회
유신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자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로 돌파
긴급조치 9호 발동 뒤 김영삼은
안보 이유로 선명투쟁을 접었다

미국이 탈출 작전 때 우왕좌왕했던 이유

미국 역시 당황했다. 주베트남 미국 대사는 남베트남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포드 행정부는 철수 방안을 놓고 우왕좌왕했다. 남베트남 패망 이후 키신저의 회고에 의하면 “마지막 탈출은 정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작전이 시작될 때 영국 그리니치 세계표준시와 사이공 현지 시간 중 어느 것으로 할지 정하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 때문에 작전이 몇 시간 동안 지연됐다.” 작전 시간은 베트남 시간 오전 10시45분이었는데, 그보다 4시간 15분이나 늦은 베트남 시간 오후 3시가 되어서야 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본국에서 내린 탈출 시간은 베트남 시간이었고, 제7함대는 그보다 5시간이 늦은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추어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미국대사관이 약속했던 사람들을 모두 탈출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이상 제이티비시 <사이공 1975> 3편 참조)

남베트남의 패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 정부는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했다. 자신의 안보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서도 보냈던 전투부대였다. 북한의 공격적 전술과 한국군의 공백으로 인한 안보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5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머나먼 정글에서 목숨을 잃었고, 더 많은 수의 군인들이 부상과 고엽제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비용을 치르고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 근본적인 책임은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에 있었지만, 그에 합류했던 한국 정부에 전혀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미 동맹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전투부대의 파병을 결정했던 것은 결정적 오류였다. 최소한 미군 철수가 결정되었을 때, 그리고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는 점이 판명되었을 때 가능한 한 빨리 한국군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의 철수를 결정했어야 했다.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또 다른 안보위기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의 공세가 본격화되고, 남베트남의 패망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만났다. 이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발생했다. 정상회담을 했는데, 분위기가 안 좋았다는 소문도 돌았고, 중국 정부와 북한 정부의 합의사항 발표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시 베이징의 외교가에는 김일성이 제2의 한국전쟁을 제안했고, 중국 정부가 이를 반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남베트남의 패망이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남베트남이 패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에서 동일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북베트남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에 북한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당시 소문과는 달리 북한이 남침을 제안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베트남과는 달리 남한에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과 1950년의 오판으로 북한 전역이 파괴되었던 경험에 미루어 본다면, 북한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면전을 선택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같이 국지전적 차원에서의 도발을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의 동향을 살피겠다는 것을 제안했을 가능성도 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좋지 않았던 북-중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방문이었을 가능성도 컸다. 또한 북한은 1970년대 초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플랜트를 적극 도입하면서 새로운 경제성장 방식을 채택했지만, 오일쇼크와 북한의 비철금속 가격 하락으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만큼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성의 방문은 중국에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박성현, ‘통계로 보는 북한의 경제와 산업의 현황’, 2007, 81쪽)

중국 쪽은 김일성의 방문에 대해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개최했다. 마치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중국한테는 북베트남의 일방적 승리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소련과 북베트남의 가까운 관계 때문이었다. 주변 국가 중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이 어렵다면, 북한이라도 확실히 잡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베트남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남베트남의 패망 이후에도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자동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소련과의 북쪽 국경에서 갈등을 빚고 있었던 중국이 남쪽에서 또 다른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중소분쟁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는데, 그중 하나가 북한이었던 것이다. 이미 베트남뿐만 아니라 몽골에서도 중국의 인기는 시원찮았다. 소련은 1963년에 이어 1970년부터 1971년까지 33개 사단을 몽골에 배치했다. 몽골에 있었던 소련군에는 1000여대의 전투기도 포함되었다. 소련이 앙골라(1975), 에티오피아(1978), 예멘(1978), 베트남(1978)과 우호조약을 맺고 있는 사이 중국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었다.(Krista E. Wiegand, Enduring Territorial Disputes, 261~263쪽) 1975년 김일성의 북한 방문은 중국이 이렇게 대외관계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김일성의 방문을 제2의 한국전쟁 발발의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최소한 1968년과 같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할 것으로 보았다.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감안한다면, 적절한 판단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은 과도한 해석이었다. 1973년 미국의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더 이상의 주한미군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북한은 이틀 뒤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베트남 파병 비판했던 장준하의 구속

남베트남의 패망과 김일성의 중국 방문으로 인한 ‘심정적’ 안보위기로 한국 사회는 더욱 얼어붙었다. 게다가 1975년은 정치적으로도 한국 정부에 심각한 위기의 시기였다. 유신 선포 후 1년이 지나면서 비판과 저항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12월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 그리고 장준하를 비롯한 재야인사 30명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 1월8일에는 야당인 신민당도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나섰다.

일주일 후인 1월15일 장준하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격변하는 국제정세하에서 국민의 총화가 요구되는데 피고인들이 헌법 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켰기 때문에 추호도 용서할 수 없으며 국민의 이름으로 마땅히 응징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장준하에게 재갈을 물리면 조용해질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장준하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는 독재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시절인 1968년과 1969년 베트남 파병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미국의 베트남 정책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한국군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베트남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예비군은 왜 만들었는가? 이 모든 것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을 때 장준하가 국회에서 정부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장준하를 감옥에 가두었음에도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은 가라앉지 않았다. 4월3일에는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에서 민청학련 명의로 유신 반대, 헌법 개정, 부패한 특권 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정책 철폐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유신정부는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투표로 정면 돌파하고자 했다. ‘헌법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간주하겠다’고 했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1975년 1월22일 실시된 재신임투표에서 유권자의 80%가 투표에 참여하여, 찬성 73%, 반대 25%로 재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토론은 물론 관제 수단이 총동원된 상황에서 25%의 반대는 예상보다 높은 수치였다. 25%라는 수치는 실질적으로 불신임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남베트남 패망을 전후한 시기는 유신정부에는 큰 위기였다. 거기에 한국 정부가 국운을 걸고 결정했던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위기는 단지 위기로만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박정희 정부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사회가 꽁꽁 얼어붙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영수회담이 열린다. 박정희와 김영삼 사이에서. 김영삼 총재는 안보를 이유로 선명투쟁을 접었다. 그리고 야당의 당권은 중도통합파를 이끄는 이철승에게 넘어갔다. 이후 4년간 한국 사회는 다시 얼어붙는다. 위기는 기회였다. 그러나 4년 후 이 기회는 다시 위기가 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