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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03 19:01 수정 : 2015.04.05 09:59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가 영원히 ‘미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20년의 세월과 아까운 젊은이들의 목숨이 필요했던가.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군 탱크가 사이공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점령한 직후 남베트남군 병사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면서 버리고 간 군화들이 사이공 인근 1번 국도에 널려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32)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

베트남 전쟁은 어떤 교훈을 주었는가? 미국 사회에는 확실한 교훈을 주었다. ‘베트남’이라는 단어는 곧 실패와 좌절을 의미했다.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전략으로 싸운 전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실패는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세계 경찰국가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미국의 동맹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1978년 이란을 시작으로 1979년 니카라과가 미국의 품에서 벗어났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독재자들이 필리핀과 한국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다행히 1980년대 후반 공산정권의 연이은 몰락으로 필리핀과 한국은 제1세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실패 이후 당분간 다른 지역에 대한 개입도 꺼리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뒤 미국은 약 10년 동안 다른 지역에 대규모로 개입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이후 1983년 그레나다 상륙 이전까지 해외 파병과 개입을 꺼렸다. 석유의 보고 이란이 넘어가도, 중남미의 주요 국가인 니카라과가 넘어가도, 심지어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사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침공을 받아도 미국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탈레반을 비롯한 반군에 대한 지원은 계속했지만. 카터의 인권외교 역시 베트남 전쟁의 교훈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야당 김영삼은 왜 선명투쟁을 접었나

물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경험한 베트남 전쟁은 모두 달랐고, 따라서 각각이 갖고 있는 교훈이나 기억도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만약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한다면, 의도적으로 다른 교훈과 기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닉슨과 베트남 참전에 반대했던 클린턴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었고, 클린턴이 적성국 북베트남을 계승한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으리라. 베트남 관련 영화 중 초기작인 <귀향>(1978)에 나오는 상이용사들 사이의 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군인 1: 참전하고 돌아온 사람이 다시 가겠다고 하는 경우는 처음 봐. 내 머리론 이해가 안 돼.

군인 2: 잠깐만. 난 이해는 돼. 왜냐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곳에서 했던 일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으니까. 목숨 바쳐 싸우다 돌아왔는데 그게 다 헛된 일이었다고 하면 무슨 보람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말이야.

군인 3: 그래서 다시 돌아가는 거군.

군인 2: 그래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내가 한 일은 옳은 일이고 이건 영광의 상처다. 내가 하반신 마비가 되고 사람을 죽인 걸 정당화해야 해. 그래서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거야. 솔직히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데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겠어?”

대부분의 베트남전 참전자들이 갖고 있는 기억과 교훈은 결코 밝지 않았다. 아니 밝을 수가 없었다.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 그들을 간호하면서 그 고통을 함께 느꼈던 이들이 귀국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호가 아니라 냉대의 눈초리였다. 마치 모든 참전자들이 밀라이에서의 학살에 가담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존슨, 닉슨 행정부와 공범이라는 것인가?

미국의 대통령들은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미국 정부의 결정은 문제가 있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결정에 의해 그곳에 갔던 모든 분들은 다 애국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애국적인 노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국가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단순했다. 남베트남의 패망으로부터 한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미국 못지않았다. 같은 분단국가였다. 그리고 자신의 안보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서 미국보다도 큰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은 하나의 성전이었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한국이 지지했던 측이 패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무소불위의 존재라고 믿었던 미국마저도 남베트남 정부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한-미 동맹에 안보를 의지하고 있었던 한국에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베트남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 했고, 베트콩이 악의 축이었다는 지금까지의 정부의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었나?

공산주의는 전염병이라고 했다
베트남에 왜 공산주의가 퍼졌을까
국민들이 쓸데없이 갑론을박
토론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도대체 누가 토론을 하게 만들었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 잃었다
전쟁·안보위기로 피해 입은 분들
애국자고, 보상에 최선 다하겠다”
박정희는 그런 담화문 발표했어야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하루 전인 1975년 4월29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인도차이나반도 사태는 우리에게 더없이 귀중한 교훈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특별담화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공산주의와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우방 강대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주국방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로부터 이기기 위해서는 ‘부질없이 앉아서 갑론을박 토론만 하고 시간을 허송’해서는 안 되고, ‘정부와 군과 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힘을 하나로 뭉쳐 총력으로 대결’해야 한다. 그리고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님이 다 부서진 배 12척으로, 왜적의 함정 수백척과 싸우실 때 장병들을 독려하시며 하셨던 말씀”인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로 특별담화를 마무리했다.

한국 정부는 분명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동병상련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남북한이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때였다. 197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에서 남한이 북한을 넘어섰지만, 남과 북의 국력에 대한 비교는 평가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만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베트남 상황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꿩 대신 닭, 타이나 캄보디아 파병 노리다

선명 야당으로서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투쟁을 내세우고 있었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왜 투쟁의 깃발을 접었겠는가? 남베트남 패망을 일주일여 앞두고 김 총재는 스스로 박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5월21일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벌였던 야당의 총재가 대통령과 긴급조치 9호로 헌법에 대한 비판을 모두 불법화시킨 유신 대통령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베트남의 충격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수회담 직후 김 총재는 ‘국정 전반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격의없이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면담 내용을 다 털어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간단한 성명을 발표했다. 베트남 상황의 충격으로 선명 야당 총재는 꼬리를 내렸다. 이후에도 회담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남베트남 패망 직전 김일성의 중국 방문에 대한 설명이 김영삼 총재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신 정부에 남베트남 패망은 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회였다. 유신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내놓았던 담화는 바로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담화를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때까지 유신 정부가 추구해 왔던 바를 중단 없이 계속 추구하라는 것이었다. 자주국방과 총화단결이 바로 그것이었다. 야당도 스스로 반유신 투쟁을 접었다.

한국 정부가 발표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국민 사과였다.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한 것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한-미 동맹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전달했어야 한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을 결정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미국이 철수를 결정할 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철수계획을 미루다가 더 많은 피해를 봤다. 베트남 파병으로 군인들도 힘들었지만, 그로 인한 한반도 안보위기로 소중한 국민들에게 피해를 끼쳤다. 전쟁과 안보위기로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은 애국자였고, 이들에 대한 보상에 최선을 다하겠다.

정의롭지 못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유엔과 제3세계에서 한국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북한과의 외교전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해 비동맹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지만, 한국 대표는 회의장의 문지방도 넘지 못했다. 주한미군 감축을 막기 위해 파병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주한미군은 감축되었다. 대통령의 담화에는 그 어느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를 노렸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동맹국의 위치에 서려고 했다. 일본이 경제적 측면에서 제1의 동맹국이라면, 한국은 군사적 의미에서 그 자리를 노리려고 했다. 베트남에서는 철수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타이나 캄보디아라도 들어가려고 했다.(동아일보 1970년 4월27일치) 베트남 파병을 통해서 얻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미련 때문인 것처럼도 보였다. 만에 하나 타이와 캄보디아에 한국군이 파병되었다면 1973년 타이의 민주화, 1975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한국군이 고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확대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1951년부터 시작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군이 타이나 캄보디아에 주둔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군사동맹국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유신 정부의 독주는 이제 완전히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이후 긴급조치 9호는 10·26 사태까지 장장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정부와 대통령을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은 모두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던 그 체제가 남베트남 패망으로부터 4년이 지난 뒤 스스로 무너졌다.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몰락이 재현되는 건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놀란 미국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을 외면한 채 신군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일이 한반도에서 재현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반도의 안정을 통해 최소한 일본은 지켜야 한다. 1950년이나 1980년이나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1894년 류큐(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겨준 뒤 조선은 안 된다고 개입한 청나라나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를 지켜본 뒤 한국이 불안해서는 안 된다고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미국의 속마음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유신체제는 왜 속절없이 무너졌을까? 한국 정부는 남베트남 패망으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대통령의 담화에 나타난 내용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더 중요한 교훈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남베트남 정부는 지킬 만한 가치를 가진 정부였는가? 지킬 만한 가치가 없는 정부였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미국은 응오딘지엠(고딘디엠)을 베트남의 워싱턴이라 했고, 응우옌반티에우를 프런티어 정신을 가진 지도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켰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길에 널브러져 있는 군인들이 버리고 간 군복이었다. 지엠은 사살되었고, 티에우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장제스, 이승만, 그리고 티에우

미국은 베트남으로부터 왜 떠났는가? 미국 내부의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와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정부였기 때문에 미국이 지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의 대중매체와 의회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내부 부패로 인해 중국 대륙을 잃은 장제스(장개석)와 부패와 독재로 혁명에 의해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던 이승만에 대해 지지를 철회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또다시 잘못된 포석을 했던 것이다.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가 영원히 ‘미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20년의 세월과 아까운 젊은이들의 목숨이 필요했던가.

든든한 정부와 탄탄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정부와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최대한 공정한 선거제도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합리적으로 권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도이고, 그렇기에 이들의 권력에 대해 사회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정부와 정치인들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남베트남 정부는 과연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가? 모든 선거는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렸다. 심지어 어떤 선거는 투표자의 수보다 더 많은 득표수가 나오기도 했다. 선거보다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지도자들이 더 많았다. 중요한 정책은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입안, 실시되었다. 지주와 가톨릭은 그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소작인과 불교도들은 차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층은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도대체 이들이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지, 왜 서민들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냉전은 이러한 교훈들을 모두 가려버렸다.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절대 명제 속에서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일생에 큰 오명을 입은 월터 로스토(미국의 경제학자)였지만, 그가 했던 명언이 있다. 공산주의는 하나의 전염병이다. 전염병은 몸이 약한 사람한테 급속하게 번진다. 베트남에 왜 공산주의가 퍼졌을까? 국민들이 쓸데없이 갑론을박 토론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도대체 누가 국민들로 하여금 토론을 하도록 만들었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인간은 바보다. 금방 망각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늪에 빠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민주주의와 투명성,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교훈을 한국 사회에 주었다. 민주화는 이룩했지만, 지금 한국은 그 셋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담화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질없이 앉아서 갑론을박 토론만 하고 시간을 허송’하고 있다. ‘정부와 군과 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힘을 하나로 뭉쳐 총력으로 대결’하기 위해서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안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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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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