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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01 18:50 수정 : 2015.05.02 11:08

박태균 교수는 2015년 2월26일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촌락에서 열린 빈안 사건 희생자 49주년 위령제에 참여했다. 떠이빈의 원래 이름은 ‘평안’이라는 뜻의 빈안이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동네 사람들은 그 평화로운 이름을 쓸 수 없었다. 한국군에 의해 두 달에 걸쳐 1004명이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 제공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34) 연재를 끝내며

1975년 4월30일 전쟁은 끝났다. 40년이 지난 호찌민시와 빈딘성의 꾸이년(퀴논)시를 방문했다. <국제시장>의 한 장면처럼 한진상사가 용역을 했던 곳이고, 맹호사단이 상륙한 곳이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났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세계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에서도.

베트남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했다. 호찌민국립대학의 한국학과는 학과에서 단과대학으로 승격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삼성 현지법인은 2014년 베트남 전체 수출의 17%를 차지했으며, 2015년 1월 현재 매주 2400명을 신규 고용하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수교 후 경제관계를 넘어서 군사적 분야로 관계를 확대하고자 한다.

겉으로만 보면 전쟁이 끝나고 잊힌 듯 보이지만, 매년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는 위령제가 열린다. 집집마다 가족 단위로 ‘따이한 제사’를 지낸다. 한국군에 의해서 죽었다고 해서 따이한 제사라고 한다.

종전 40주년, 호찌민과 빈딘성을 가다

2015년 2월26일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 촌락에서 열린 빈안사건 희생자 49주년 위령제에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떠이빈의 원래 이름은 빈안(평안이라는 뜻)이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사람들은 동네 이름을 떠이빈(서쪽의 영광)으로 바꾸었다. 학살 사건 이후 더 이상 평안한 동네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 위령제에는 수백명의 초등학생들이 참여했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에서 힘들어 보였다. 너무 힘들어서라도 이들은 위령제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004명이 죽은 빈안 사건을 복원한 빈딘성 박물관 관장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를 잊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건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났고, 한국의 시민단체가 피해자들을 도와주고 위령제에 참여한 지 10년이 흘렀다. 한국의 시민단체가 보낸 조화는 단상에는 놓이지만, 아직 공식 의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베트남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00년 <한겨레21>이 베트남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보도했을 때 한겨레신문사는 참전군인들의 공격을 당했다. 2001년 베트남전쟁에 대한 학술대회는 아수라장이 되어 결국 열리지 못했다. 2010년 교육부는 일부 근현대사 교과서의 베트남전쟁 관련 서술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하노이의 호찌민 묘를 방문했을 때 인터넷에는 ‘어떻게 적의 수장 묘에 참배하느냐’는 댓글이 올라갔다. 2014년 검정 교과서 중 하나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서술되었다는 이유로 그 교과서의 대표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교에 한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갔다.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다르다. 한 ‘종군기자’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월남의 정부 지도층이나 청년 학생 지지층에게는 국군이 월남을 위해 이룩해 놓은 업적보다도 한국이 국군 파월에 따라 얻는 국가 실리 면이 더 강인하게 인식되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적어도 주월국군은 월남인에게는 고마운 따이한은 아니었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한국군의 경우 월남 정부 지도층한테도 고마운 따이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책임의 일부는 한국 정부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국군 파월이 우방 월남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것보다도 국군 파월에서 얻어지는 국가 실리 면을 과잉선전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마이너스를 가져오면 가져왔지 플러스는 되지 못했다.”(박흥원 특파원, <동아일보> 1971년 9월27일치)

이세호 제2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은 베트남에서의 경험이 한국의 안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단독 작전권 확보로 한국군은 월남전 참전 이래 31만2853명이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것은 북한이 지금도 가장 두려워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대전의 최신 전술교리, 최신 전투장비 능력 보유, 외국군과의 연합작전 능력 보유, 산악전, 게릴라전 등의 실전 경험을 터득함으로써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크게 활약하고 국방력 강화에 큰 자산으로 남았다.”

야전 소대장의 평가는 다르다. “사실상 월남전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막대한 물량 지원 하에서 일방적인 싸움을 하였는데, 이는 전쟁이라기보다 공비토벌과 같은 생각이 들며, 만약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전쟁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때 월남전과 같은 물량을 기대한다든가 또 베트콩 토벌과 같은 관념을 가진다면 이는 큰 오산일 것입니다.”(백마 제28연대 제8중대 제1소대장 진○○ 1978년 12월5일 구술,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1> 44쪽)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군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잘 싸웠다. 그래서 한국군과는 교전을 안 하려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한국군은 새로운 방식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미군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방식이었다”는 지독한 폄하도 있다.(딘바호아 빈딘성 박물관장 인터뷰, 2015년 2월27일)

1975년 4월30일 종전되었지만
베트남전은 계속되고 있다
학살 지역에선 위령제 열리고
한국에서의 평가는 제각각이고
참전군인들끼리도 갈등이…

한국엔 성찰하는 시민사회 있다
베트남이 적극 나서지 않아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한다
일본 극우세력과 다른 이 점은
국가의 브랜드 높이는 일이기도

메르켈이 너무 사과하는 거 아니냐고?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보훈병원에 치료받으러 갔다가, 휴유의증이란 자가 월남참전 전우 모두를 국가유공 만들어 주면 형평성이 안 맞는다구 말하면서 아무 혜택도 못 받는 일반 월남참전자들은 절대로 국가유공자를 만들어 주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기에 병과를 물어보니 물차 운전병을 하였다고 그러기에 군번이 무엇이냐고 하였드니, 예비사단 군번이라고 말하기에 본인의 군번 3개를 대면서 국가유공자증을 내보이며 너는 전우로 볼 수도 없고 광주사태 당시 무기고를 때려부수어 무기를 들고나와 군인과 경찰에 총질한 역적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놈의 따귀를 올려쳤다가 그놈이 신고를 하여….”(하략)(www.vietnamwar.co.kr)

물론 정부의 보상 정책 때문이었다. 국가가 동원했던 군인들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져주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도 분명치 않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한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발생했던 불행한 사건들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사과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사회에서는 지금도 그 불행한 사건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는 무엇에 대해 사과했던 것인가?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역사전쟁은 한국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도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의 한 방송매체가 노근리 사건을 조사, 폭로했을 때 미국의 또 다른 보수 매체는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들고나왔다. 너희들도 똑같았는데, 왜 우리한테만 그러느냐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세계의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극우 보수세력들도 이 문제로 맞불을 놓았다. 한국군이 위안소를 베트남에서 운영했던 자료를 찾아 보도했다.(<한겨레> 2014년 4월25일치) 너희들도 베트남 전쟁에서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현재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 관련 자료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범죄행위라고 지칭하는 전후 조사 자료들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물론 베트남 당국이 이를 거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베트남이 과거를 잊고 미래를 보자고 해서 팔짱을 끼고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가? 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새로운 세대들조차도 관심이 없는 사건들이니 그냥 묻어두면 되는가?

2013년 1월 독일 보수정당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폴란드 사람들은 독일을 향해 말했다. 너무 계속 사과하는 것 아니냐고. 메르켈 총리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당신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하겠다. 나치의 범죄는 무한책임이다.” 마음속에서까지 완전히 용서된 것은 아니겠지만, 독일 사회의 자세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도쿄대학에서 만난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왜 한국은 우리에게 계속 사과하라고 하나요? 지금까지 몇 번을 했는데도 또 해야 하나요? 그렇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과거사에 대해 몇 번이나 언급을 했다. 그러나 과연 일본 사회가 이에 대한 공감대를 갖고 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2015년 4월4일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베트남전쟁의 민간인 피해자들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한국에서 만났다. 국적도 다르고 가해자도 달랐지만, 이들은 전쟁과 국가에 의해 상상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동아시아에서 전쟁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오키나와 상륙작전 당시의 피해자들, 대만(타이완)의 2·28 사건 피해자들, 제주 4·3 항쟁의 피해자들, 한국전쟁 시 공비토벌 과정의 피해자들, 1980년 광주의 피해자들이 함께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납치 피해자 가족들도 함께해야 한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냉전이 만들어낸 비정상적 상황에서 국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건의 가해자들 역시 함께 참여해야 한다. 스스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이 이러한 사건에 가해자가 된 것은 국가에 의한 동원 때문이었다. 국가는 국가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구성원들을 동원해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겼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는 참전자들이 있다. 이들은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의 상태에서 시작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국가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사과하는 순간 이들은 더 이상 가해자가 아니다.

2013년 12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베트남전 전사자 묘지를 방문하면서 이 연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2015년 5월, 베트남을 방문한 직후 이 연재를 끝낸다. 베트남전쟁을 갖고 어떻게 1년이 넘게 연재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연재가 끝나는 순간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이 연재가 30회가 넘도록 계속되었지만, 그 안에는 쓰지 못한 문제들,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이슈들이 너무나 많았다.

50년 돼서야 ‘위안부’ 제기됐음을 기억하라

이 연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참전 군인들의 문제였다. 참전 군인들의 존재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연구 성과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에서조차 위령비와 증오비를 제외하고는 한국군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 베트남의 모든 위령비와 증오비에는 ‘미제국주의자의 괴뢰’라는 수식어가 ‘남조선 군대’ 앞에 붙어 있다. 베트남전쟁 전문가인 하노이 대학의 교수는 “너희가 잘못한 게 뭐가 있냐. 다 미국 때문이지”라고 말했다. 안도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미국의 요청을 받아 참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트남에서 했던 한국군의 역할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미군이 꺼리는 지역에 배치되었다. 베트콩을 경험했던 베트남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미군은 지지리도 못 싸웠다. 한국군은 달랐다. 무서웠다. 2월에 다녀온 빈딘성도 미군이 평정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에게 그 역할을 맡겼던 지역이었다. 빈딘성은 베트남의 남부와 북부를 잇는 가장 중요한 1번 국도와 내륙 지역의 평정을 위해, 베트콩에 대한 북베트남의 지원을 끊기 위해 군사 전략상으로 중요한 19번 국도 및 안케패스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을 장악한다면 미군과 한국군의 주요 주둔지를 서로 연결함으로써 보급선을 든든히 하는 동시에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어느 신문에도, 어떤 연구 성과에서도 한국군은 사라졌다. 이분들을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고 싶었다. 참전 군인의 일부가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미국과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역사 연구 속에서 한국군이 다시 살아난다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계속될 수 있는 기본적인 바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꿈으로써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사회는 범죄행위를 미화하고 숨기는 일본의 극우세력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성찰하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우리 시민사회가 모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의 시대에 있었던 문제들을 숨김없이 밝히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의 소프트 파워와 브랜드를 높이자는 것이다.

베트남의 모든 사람들이 한국군의 참전에 대해 민감한 것은 아니다. 베트남에서도 일방에 의한 통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고, 보트피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군의 활동 과정에서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했던 지역들은 그 사건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제국 일본이 패망한 지 5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이제 40년이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아직도 발굴 작업과 사실 복원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어디에도 시체 외에는 사진 자료나 문서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과 달리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정의로운 화해를 이끌어내야 한다. 전세계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베트남전쟁에 대해서 잘못되어 있는 사회적 인식과 반쪽뿐인 기억을 바꾸어야 한다.

1년이 넘는 동안 연재를 하면서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독자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연재를 계속하기 힘들었다. 전화와 메일을 주시고 책도 보내주신 참전 군인들께도 감사드린다. 이 연재는 베트남전쟁 연구의 종결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더 많은 연구들이 나올 수 있는 가교 역할을 기대해본다.<끝>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 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34회 동안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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