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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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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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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폴 사르트르: 역사의 총체성을 회복하기
13.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우회의 길
14. 위르겐 하버마스: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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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중혁명 당시 쓰러진 스탈린 동상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 헝가리 혁명에 대한 잔인한 탄압은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낳았고, 이런 정세는 청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개입은 이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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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일관되게 재구성하기 위해
스피노자와 프로이트에 주목했다 알튀세르는 ‘호명’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비밀을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찾았다
개인이 주체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돼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정세는 이론적으로는 청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계급 착취와 인간 소외에서 벗어난 해방의 정치체제와 거리가 먼 것이라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인 계급 지배와 폭력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면,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소외 및 착취에 대한 비판과 인간주의적 이상이 현실 사회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개입은 이러한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밝히는 데서 출발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 방식이 아닐뿐더러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기 구분을 제안한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이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연속성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1846) 무렵부터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독일 이데올로기>가 ‘인식론적 절단’의 징표가 되는 이유는 청년기 저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개념들, 곧 생산양식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문제설정에 사로잡혀 있는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자본>을 중심으로 한 후기 저작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절단’ 이후의 마르크스 사상이 동질적이거나 완결되어 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논점은 절단을 이룩한 이후에도 마르크스 사상은 여전히 헤겔의 관념론이나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불완전하고 불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나 인간주의 같은 여러 가지 이론적 편향들이 발생하며, 다시 이는 정치적 오류 및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위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진 마르크스 사상을 개조하고 좀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과제였다. 철학자로서 알튀세르의 이론적 독창성은 불완전한 상태의 마르크스 사상, 곧 모순에 빠져 있는 마르크스 사상을 좀더 일관된 사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비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요소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특히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사상에 주목했다. 우선 이들의 사상은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프로이트의 ‘과잉결정’이라는 범주는 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던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됐는지 해명할 수 있게 해준다. 사회주의 혁명은 “식민지 착취와 전쟁,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 정도와 농촌의 중세적 상태 사이의 모순, 지배계급 내부의 모순이 자본주의적 모순을 과잉결정할 때”(<마르크스를 위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 철학에 담겨 있는 ‘구조 인과성’이라는 범주는 역사의 전개 과정이 경제라는 최종 심급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법,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다른 심급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좀더 정확히 사고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알튀세르 이전까지 이데올로기 개념은 허위의식이나 기만 또는 지배계급에 의한 대중의 조작술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며, 또한 그 핵심을 착각이나 기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 없는 투명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충격적이게도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삶의 영역을 상상계로 규정했던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 역시 이데올로기를 생활세계 자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제시된 주장이었다.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마르크스를 위하여>)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핵심은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기만이 아니라 예속적 주체 생산에서 찾아야 한다. 알튀세르는 유명한 ‘호명’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가 계급적 착취에도 불구하고 재생산되는 비밀을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찾으려고 했다. 호명 개념의 핵심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개인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곧 호명 개념은 개인들 내지 주체들이 바로 그 개인들 내지 주체들로서 존재하는 양식이 사실은 계급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인식과 실천의 자율적 중심으로서 주체에 기반을 둔 근대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또한 해방적 주체 개념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선언이었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탄핵이 제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알튀세르 이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이론적 혁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신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적 운명은 마르크스주의의 운명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태원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사진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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