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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가타리. 그는 질 들뢰즈와 함께 대중의 파시스트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소수-되기”를 제안했다. 피지배 계급 내에서도 주변화되고 배제된 집단(여성, 이주 노동자, 소수 민족 등)을 타자의 타자로 만든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그것의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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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5부. 68혁명의 철학
1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욕망의 역사유물론
16. 미셸 푸코: 규율권력과 주체화
17. 마리오 트론티: 노동자 계급에 기생하는 자본
1670년 (허구적인) 독일 출판사에서 익명으로 책이 한 권 출판되었다. 17~18세기 내내 유럽에서 불경한 무신론자의 책으로 악명을 떨치게 될 이 책 서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그 지주와 버팀목은, 사람들을 기만의 상태 속에 묶어두고, 종교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공포를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바뤼흐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그로부터 약 250년 뒤, 독일의 한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가는 당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떠오른 파시즘의 비밀이 무엇인가 질문했다. 그가 보기에 파시즘 문제의 핵심은, 객관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에 속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을 지지하는 노동자 집단의 대중심리였다. 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면서 파시즘을 지지할까?
그가 보기에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맹점을 잘 보여주는 문제였다.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난 정치적 반동이 대중들을 ‘몽롱’하게 만들고 ‘타락’시키고 ‘최면’에 빠지게 했다는 설명 역시 비생산적이다. (…) 우리는 그러한 폭로가 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대중들에게 확신을 줄 수 없다는 것과 사회경제적 문제제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교훈을 경험으로부터 얻는다. 대중들 속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대중들은 파시즘의 기능을 인식할 수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표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노동자들은 깨달아야만 한다’는 식의 전형적인 교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 노동자들은 깨닫지 못했는가? 왜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는가?”(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리고 다시 이로부터 약 40년 뒤인 1972년, 프랑스의 한 철학자와 한 정신분석가가 공동으로 저술한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두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와 굴종, 예속을 감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착취와 굴종, 예속을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라이히가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몰인식이나 미망에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의 욕망을 해명할 수 있는 설명, 욕망의 관점에서 정식화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사상가로서 가장 심원한 경지에 도달한다. 대중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반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 분석>)
수세기에 걸쳐 여러 사상가들이 각자 제기한 이 동일한 질문은 1968년 파리를 뒤흔들었던 반역과 해방의 운동 이후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가령 알튀세르, 들뢰즈·가타리, 푸코, 리오타르 등)에게도 중요한 철학적 화두, 어쩌면 화두 그 자체가 되었다. 이는 이 질문이 근대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주체성의 원리를 문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근대성의 근본 원칙은 주체가 인식과 행동의 궁극적 근거라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주체, 더 나아가 계몽과 해방의 원칙에 기초하여 불합리한 사회적 조건을 변혁시키는 주체라는 이상은 독일 관념론에서 루카치에 이르는 고전적인 주체철학에서 근대성의 근본 원칙으로 숭앙받았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열광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독일과 이탈리아를 휩쓴 파시즘과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노동자·농민 대중의 이름으로 자행된 스탈린주의 독재는 유럽 좌파 지식인들에게 혁명적 주체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해방적 주체의 자기지배라는 이 역설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예들은 고전적 주체의 이상을 개조하고 변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동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이론적 반(反)인간주의’라는 새로운 출발점을 찾아냈다. 이들이 보기에 주체는 자신에 선행하는 어떤 구조적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다. 그리고 이 구조적 메커니즘은 자신이 산출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상상하게 만들고,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 다시 말해 지배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간주하고, 그리하여 이 관계를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것을 자신의 기능으로 삼는다.
핵가족에 기반한 오이디푸스 구조는
초월적 권위를 지닌 아버지의 법 아래
욕망의 생산적 역량을 억압해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유순한 주체를 형성한다
대중을 ‘파시스트 되기’로부터
어떻게 분리시킬 것인가?
피지배 계급 내에서도 주변화한
소수 집단을 만들어낸 메커니즘의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보기에 지배의 문제는 예속적 주체의 (재)생산 메커니즘의 문제이며, 고전적 주체철학의 맹목은 지배의 근원적 장소를 간과한 가운데 결과로서의 주체를 원인으로서의 주체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흔히 말하듯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인 지배 또는 파시즘적인 지배의 중추를 이루는 예속적 주체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들뢰즈·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의 의의는 지배구조의 근본 형식을 “미시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으로서 오이디푸스 구조를 해명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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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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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타리에게 파시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미시 파시즘의 문제인 이유는, 역사적 과거로서 히틀러의 나치즘은 지나갔지만, 이를 가능하게 했던 파시즘의 미시적 그물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파시즘은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계급관계는 전(前)의식적 차원의 현상일 뿐, 무의식적 차원에서 사회적 관계의 양상들을 규정하는 것은 욕망의 투여 방식이다. 따라서 무의식적 차원에서 지배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욕망의 도착이나 해방적 주체의 자기배반의 이유를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핵가족 제도에 기반을 둔 오이디푸스 구조에서 자본주의적 재생산 메커니즘의 비밀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근친상간 금기를 인류에게 보편적인 금기로 보고, 이에 기초하여 인간의 무의식과 성욕의 근본구조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제시했다. 곧 어린아이는 엄마에 대한 성적 충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함으로써 인간적 자아 또는 주체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근친상간 금기와 자본주의적인 현상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전혀 상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후자는 핵가족이 사회의 유일한 재생산제도로 분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구조이며, 이것의 기능은 초월적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의 법 아래 욕망의 생산적 역량을 억압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
따라서 <반오이디푸스>에서 이들의 노력은 초월적 권위의 이름에 따라 무의식을 조직하려는 자본주의의 편집증적 경향에 맞서 정신분열적인, 곧 다면적이고 해방적인 무의식의 분자적인 흐름을 강화하려는 데 맞추어져 있다. 이는 특히 오이디푸스 구조에 의해 복속된 주체들과는 상이한, 횡단적-분자적 집단들의 구성 가능성에 대한 시사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반오이디푸스>는 한편으로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에 대한 낭만적 찬양’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욕망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의 프랑스식 버전이되, 훨씬 더 비합리주의적이고 괴팍한 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오이디푸스>의 화두는 두 저자가 8년 뒤에 출간한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파시즘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분자적이거나 미시정치적인 역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의 운동이기 때문이다.”(<천 개의 고원>) 어떻게 대중을 그 파시스트적 생성으로부터, 파시스트 되기로부터 분리시킬 것인가?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소수-되기”에서 찾았다. 이들이 말하는 소수란 기존의 거시적 사회관계 속에 존재하는 타자, 곧 피지배 계급이나 저항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러한 타자의 타자, 곧 이 피지배 계급 내에서도 주변화되고 배제된 집단(여성, 이주 노동자, 소수 민족 등)이다. 따라서 문제는 실제로 존재하는 소수 집단을 지원하거나 옹호하는 것을 넘어, 이들을 타자의 타자로 만든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그것의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파시즘에서 해방될 수 있는 관건이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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