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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트론티는 보통 ‘노동자주의’라고 번역되는 오페라이스모 운동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다.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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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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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68혁명의 철학
1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욕망의 역사유물론
16. 미셸 푸코: 규율권력과 주체화
17. 마리오 트론티: 노동자 계급에 기생하는 자본
1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욕망의 역사유물론
16. 미셸 푸코: 규율권력과 주체화
17. 마리오 트론티: 노동자 계급에 기생하는 자본
노동자 투쟁에 대한 반응의 결과다
노동일 단축에 관한 입법은
기술 발전을 가져왔다 자본의 자기 재생산과 단절해야
노동자는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자본에
내재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가능하다 이 연재에서 다루는 사상가들 가운데 아마 국내 독자들에게 가장 생소한 인물은 바로 마리오 트론티(1931~)일 것이다. 다른 사상가들은 적어도 국내에 한두 권의 저작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 트론티의 경우는 아무 저작도 번역되어 있지 않고, 거의 논의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1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작 중에 영어로 완역된 책은 한 권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생소한 인물을 20세기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를 다루는 이 연재에서 다루게 된 것일까? 아마 여러 독자들이 이런 의문을 품고 있으리라. 트론티를 이 연재에 포함한 일차적인 이유는 그가 20세기 후반 유럽에서 가장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노동자주의’라고 번역되는 오페라이스모(operaismo) 운동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197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자율주의(autonomia) 운동에도 많은 이론적 영감을 주었다. 비록 트론티 자신은 자율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했지만, 60년대 그의 이론적 작업이 없었다면, 오늘날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대표하는 이탈리아 급진 정치철학은 훨씬 독창성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트론티는 최근에 발표한 회고록에서 오페라이스모 운동 및 그와 결부되어 있는 이탈리아 신좌파운동의 기원을 1956년에서 찾은 바 있다. “하나의 핵심적인 날짜가 우리에게 전략적인 장소로 출현한다. 그것은 1956년이다. 몇 가지 일이 이해를 ‘잊을 수 없는’ 해로 만들었지만, 나는 이행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당의 진리에서 계급의 진리로의 인식론적 단절이었다. 소련의 20차 당대회부터 헝가리의 사건들에 이르는 시간대에서 젊은 지식인 세대는 일련의 의식의 도약을 겪었다. 나는 20세기가 여기에서 종결되었음을 감지했다. 우리는 역사성의 교조적인 잠에서 깨어났다.”(<뉴레프트 리뷰> 73호 ‘우리의 오페라이스모’, 2012) 소련으로 대표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가장 스탈린주의적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환멸을 느낀 후, 트론티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이탈리아 좌파 지식인들이 새로운 출구를 찾은 것은 1961년 창간된 <붉은 노트>라는 잡지에서였다. 라니에로 판치에리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잡지의 편집위원들은 두 가지 태도를 공유했다.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사회당의 정치적·이론적 노선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새로운 노동자 대중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 이탈리아는 이른바 ‘이탈리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1950년대에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생활 수준까지 떨어졌던 상황에 비하면 더욱 놀라운 성장이었다. 이러한 경제의 비약적 발전은 이탈리아 남부의 농촌 지역에서 북부의 공업 지역으로 대규모 노동 이주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탈리아 특유의 지역 차별주의로 인해 새로 유입된 노동자들은 북부 공장 노동자들과 섞이지 못했고, 기존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도 못했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사회당에 소속된 기존 노조들은 숙련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었고, 자본가들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62년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 계열의 노조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 변화에 직면하여 판치에리와 트론티를 비롯한 젊은 좌파 지식인들은 공산당과 사회당을 탈당하고 이탈리아의 고도 경제성장과 대중 노동자의 출현 속에서 급진적인 자본주의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것이 오페라이스모 운동의 출발점이었으며, 이들은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인 노동자 계급의 주체성의 물질적 조건을 분석하려고 했다. 편집위원들 내부의 견해 차이로 인해 <붉은 노트>가 종간되고 <노동자 계급>(1964)이라는 새로운 잡지를 중심으로 이들은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에서 트론티의 이론이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그는 뒤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평가받은 새로운 관점에 입각하여 자본과 노동의 관계 및 노동자 주체성의 문제를 사고하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고려했고, 그다음에야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려했다. 이것은 오류다. 이제 우리는 문제를 뒤집어서 양극을 전도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시초에는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이 있다. 사회적으로 발전된 자본의 수준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종속된다.”(<노동자와 자본>, 1971) 트론티의 주장은 몇 가지 측면에서 아주 혁신적인 것이었다. 우선 이것은 겉보기에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의 역사, 자본주의적 생산성 혁신의 역사는 사실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대한 반응의 결과였다는 점을 뜻한다. 트론티는 1890년대 영국에서 노동일 단축에 관한 입법을 그 사례로 든다. 개별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이 입법은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킨 기술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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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시위 광경.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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