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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13 20:14 수정 : 2014.11.13 20:14

뤼스 이리가레의 저작은 1977년 <하나가 아닌 성>(국내 번역본 제목 <하나이지 않은 성>, 동문선 펴냄)이 대표하는 초기, 1984년 <성적 차이의 윤리>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시기, 1990년 <나, 너, 우리>(동문선 펴냄) 등을 저술한 세 번째 시기로 나뉜다. 그는 하나의 보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성적 차이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철학과 문명,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길 제공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6부. 여성, 해방을 말하다
18. 시몬 드 보부아르: 남성과 평등한 여성
19. 뤼스 이리가레: 성차의 권리와 정치의 변혁
20. 주디스 버틀러
: 성 정체성 전복에서 타자의 윤리로

벨기에 출신의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1932~)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지만, 그 밖의 다른 분야의 독자들에게는 꽤나 생소한 인물이다. 현대철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 가운데도 이리가레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20권이 넘는 저작을 출간했고, 그 저작의 상당수는 한국어를 비롯한 외국의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그의 작업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발표되고 있어도, 페미니즘 바깥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이리가레는 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권 학계보다 국외에서, 특히 영미권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훨씬 더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철학자라는 점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타자에 대한 거울: 여성> 및 <하나가 아닌 성> 같은 그의 초기 대표작들이 번역되면서, 영미 페미니즘 철학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성별화된 시민권을 법제화하려는 정치적 운동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성패는 남성 독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리가레는 여성을 위한 철학, 여성 해방을 위한 이론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또는 바로 그러한 해방을 위한 조건으로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와 이러한 차이에 기반을 둔 우주론과 문명론, 정치학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0권이 넘는 이리가레의 저술은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거울: 여성>(1974)과 <하나가 아닌 성>(1977)이 대표하는 초기 저술에서 그의 초점은 서양의 전통 철학이 어떻게 서양의 가부장제 문명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지배를 정당화해왔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적 차이의 윤리>(1984)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시기의 저술에서는 여성의 주체성을 발전시키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나, 너, 우리>(1990) 등에서 시작되는 세 번째 시기에는 하나의 보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성적 차이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철학과 문명,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대개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리가레의 저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모와 전환을 거듭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리가레는 자신의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2004년 직접 자신이 편집하여 영어로 출간한 저작 선집 <뤼스 이리가레: 주요 저술>에서 그는 “<타자에 대한 거울: 여성> 이래 나의 기획은 두 주체의 철학,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는 두 주체의 문화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였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성적 차이의 윤리> 첫머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적 차이는 우리 시대의 유일한 철학적 주제는 아닐지 몰라도, 주요한 주제 중 하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각 시대는 사유해야 할 하나의 주제, 단 하나의 주제를 갖고 있다. 성적 차이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주제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철저히 사유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을 주제.”

그런데 성적 차이, 곧 남성과 여성은 각자 다른 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여성들에게 꽤 불편한 주장으로 들릴 수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남성과 여성의 본래적인 차이를 말하고, 남성의 성적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여성의 고유성, 여성의 여성다움을 주장하는 것은, 여성들을 성적 분업과 위계 질서에 기반을 둔 전통 사회에서의 여성의 모습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이리가레 자신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나는 여기서 성적 차이에 대한 나쁜 용법, 곧 양극의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남성은 ‘문화’의 극을 확보한 가운데 여성은 ‘자연’의 극의 수호자로 남겨두는 그러한 용법에 준거하고 있지 않다.”(<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그렇다면, 왜 이러한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성적인 차이에 준거해야 하는 것일까? 이리가레의 주장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받고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만으로는 수천 년 동안 지속해온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 질서를 변화시키고 여성의 진정한 성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서양 사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를 지배해온 남성 중심의 상징적 질서에서 인간은 남성이라는 보편적 준거에 따라 정의되고 평가되었으며, 여성은 남성에 종속되어 있는 타자의 지위에 머물러 왔기 때문이다.

가령 프로이트는 <성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유일하고 동일한 생식기관(곧 페니스)이 양성의 유아기 성 체계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그에게 리비도는 항상 남성적인 성격을 띤다. 라캉은 생물학적 기관이 아닌 상징계의 토대로서의 팔루스라는 개념을 통해 좀더 구조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을 제시하지만, 이리가레가 보기에는 이처럼 초역사적인 단일한 상징계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남성적인 상징적 질서가 존속하는 한, 여성이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평가받는 길은 남성과 동등한 존재가 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성은 가정으로 대표되는 사적 공간에서는 또한 계속 여성으로서 존재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들은 물론 평등한 임금과 사회적 권리를 위해 계속 싸워야 하며, 고용과 교육 등에서의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단지 남성들과 “동등한” 여성들은 “그들과 같은” 존재들이 될 것이며, 따라서 여성들이 아닐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렇게 해서 성들 간의 차이는 삭제되고 무시되고 지워질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조직 양식, 새로운 투쟁 형식, 새로운 도전을 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하나이지 않은 성>)

바로 이 때문에 이리가레는 중립적인 단일한 보편성에 기반을 둔 가운데 여성의 주체성을 사유하고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후기 저술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보편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 남성과 여성은 각각 독자적인 보편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인간이나 생명체만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있다. “자연은 항상 모든 곳에서 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우주론에 충실한 모든 전통은 성을 지니고 있으며, 성적인 관점에서 자연적 힘들을 설명한다.”(<성들과 계보들>)

그에 따르면 봄, 가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바다의 움직임, 계절의 주기적 변화, 태양의 빛과 열의 상대적 강도, 습기와 건기의 주기, 식물, 동물, 신, 우주의 원소들 모두 다 성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간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자연적인 질서, 자연의 리듬에 근거를 두는 셈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성적으로 좀더 분화된 생성을 실현함으로써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실현할 과제를 지닌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문화적 자기 발전의 활동 속에서 인간들은 우주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셈이다.

이는 두 가지 방향에서 수행되어야 할 과제다. 하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성이 각자 독자적인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성적 차이의 윤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남성과 여성은 독자적인 주체들이지만, 이들은 각자 관계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성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만 자신들의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를 위한 정치적 과제로, 여성의 고유한 시민권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중립적 보편성에 기반을 둔 시민권, 곧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공통적인 평등한 시민권을 구성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기획이다. 가부장제 질서에서 배제당해온 여성이 독자적인 정치 주체,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평등한 시민권을 넘어서, 여성의 시민권이라는 발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정치적 과제를 위해, 다소 고색창연해 보이는 성별화된 자연의 존재론이 필요한 것일까? 더 나아가 이리가레가 말하는 성적 차이는 사실은 이성애주의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미국 버클리의 퀴어 이론가가 그에게 급진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될 것이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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