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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27 20:54 수정 : 2014.11.27 20:54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시대 가장 문제적인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섹스’를 넘어 ‘젠더’의 이분법까지 문제 삼으며 페미니즘 이론의 틀을 흔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6부. 여성, 해방을 말하다
18. 시몬 드 보부아르: 남성과 평등한 여성
19. 뤼스 이리가레: 성차의 권리와 정치의 변혁
20. 주디스 버틀러
: 성 정체성 전복에서 타자의 윤리로

인간 부모들 사이에서 갓 태어난 어린 생명체는 어떻게 한 명의 인간 아이가 되는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나 곧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 모두가 이미 거쳐 온 이 사건 또는 이 과정은 너무 흔하고 평범한 것이어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로이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가 오이디푸스화 과정이라고 부른 이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운명 전체를 좌우하는 고통스럽고 복잡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채 광기의 덫에 걸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기피와 혐오, 비난의 그늘 아래 숨죽여 살아가기도 하며, ‘정상적으로’ 통과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많은 경우 평생 이런저런 증상을 흔적으로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 과정은 정신병이나 신경증이라는 측면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들 대부분이 정상적이라고 믿고 있는 성을 얻게 된다. 누구는 남성으로 누구는 여성으로. 아빠와 엄마가 남성과 여성인 만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체도 언젠가는 남성과 여성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우리는 믿어 왔고 또 믿고 있다. 그런데 만약 남성은 남성인데 여성에 가깝다면?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있는데 남성성을 동경한다면 어쩔 텐가? 그리고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사랑한다면? 또는 여성이 여성을 사랑한다면? 또는 그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면 어쩔 텐가?

이제는 별로 새삼스럽게 여기지도 않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같은 말들은 사회적인 공용어가 아니었을뿐더러, 누군가가 나는 동성애자요, 트랜스젠더요 하는 말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과 절연하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꺼내기 어려운 사회적 자살 행위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과연 이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까? 그 답은 아마 지금도 그것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섹스-젠더 이분법 문제제기
권력의 효과인 “강제적 이성애” 비판
‘수행성’ 강조해 학계에 큰 충격

이 문제가 미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1956년에 유대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디라는 어린 소녀는 16살에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추방될까 봐 두려웠다고, 나중에 저명한 이론가가 된 다음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 헤겔의 수용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그 경험을 자신의 이론적인 과제로 삼아 세상을 뒤흔든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 그 책이 바로 <젠더 트러블>(1990)이다.

주디스 버틀러를 일약 영어권 페미니즘 및 인문학의 지도적인 이론가로 끌어올린 이 책은, 2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도발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젠더 트러블>은 무엇보다 페미니즘 이론의 기본적인 틀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다.

버틀러가 일차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별법이다. 이제는 꽤 널리 알려진 이 구별법에 따르면 성은 생물학적인 특징(염색체, 호르몬, 생식기 등)에 따라 규정되는 것인 반면, 젠더는 사회적·심리학적인 방식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이 구별법은 여러모로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처럼 성과 젠더를 구별함으로써, 한편으로 정상적인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별에서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다양한 성적 취향들을 분류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을 자연적인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존재론적 근거도 마련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곧 여성이 세상의 절반이라는 것, 따라서 여성들은 그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 단결하고 통일성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이 구별은 성과 젠더 사이에 너무나 도식적인 구별을 설정할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를 자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지극히 문제적인 것이다. 버틀러는 이렇게 질문한다. “과연 페미니즘에 여성이라는 보편적 주체가 필요한 것일까?” 여성이라는 자연적인 또는 자연적이라고 간주되는 이 범주는 사실은 권력 구조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 버틀러의 이론적 방법론의 특징이 드러난다.

버틀러는 자신의 탐구 방법을 젠더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계보학이라는 말은 물론 니체에서 유래하고 푸코가 권력 분석의 방법론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것을 가리킨다.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계보학적 비판은 젠더의 기원과 여성 욕망의 내밀한 기원을 찾고, 여성에 대한 억압에 의해 가려진 진정한 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젠더 트러블>) 그 대신 젠더 계보학은 이처럼 자연적이고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사실은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 다시 말해 권력의 효과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범주는 다시 문제화된다. 보부아르는 “우리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통해 여성은 주체로서의 남성에 대해 열등한 타자가 아니며 남성과 동등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가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부장제 문명 아래에서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재현 불가능한 것이며, 보부아르가 말하는 여성은 이미 남성적인 상징체계에 종속된 여성이라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이리가레에게는 팔루스 중심적인 상징계에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이 중요하며,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의 자연적인 성적 차이에 근거를 둔 문명론을 모색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가 된다.

서울에서 연 ‘퀴어문화축제 무지개 2005 퍼레이드’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반면 버틀러에게는 여성이라는 범주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본래적인 기원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의 효과다. 따라서 젠더 계보학이 문제 삼는 것은 팔루스 중심주의만이 아니라 ‘강제적 이성애’(compulsory heterosexuality)의 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강제적 이성애야말로 남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를 가장 자연스럽고 본래적인 것으로 부과함으로써 동성애나 양성애 등을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동성애를 가장 본래적이고 급진적인 성적 관계로 이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레즈비언 이론가인 모니크 위티그와 달리 그는 동성애를 특권화하는 것 역시 성과 젠더는 권력의 효과라는 점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젠더는 결국 수행성의 문제가 된다. 영국의 철학자 존 오스틴이 이론화하고 데리다가 비판적으로 발전시킨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은 언어 행위를 통해 어떤 실천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가령 국회의장이 “지금부터 임시국회를 개회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또는 독립선언이나 인권선언 등도 언어 수행성의 대표적인 사례다. 젠더가 수행성의 문제라는 것은, 젠더들이 미리 존재하는 자연적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인위적인 방식들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성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행위, 수행, 과정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위자는 그 행위에 부가된 허구에 불과하다. 행위만이 전부다.”(<젠더 트러블>)

그런데 만약 성적 정체성의 자연적인 기반은 존재하지 않고 성과 젠더는 권력의 효과라면, 그리고 젠더가 수행성의 문제라면, 우리는 늘 어떤 권력이 제시하는 틀 안에서만 우리의 성적 정체성을 수행적으로 구성하게 되는 것 아닐까? 젠더 계보학이 성적 정체성이 지닌 자연적 외관을 해체하고 그것에 대해 우연적인 가변성을 부여했다고 해도, 그것은 권력에 대해 더욱더 광범위한 편재성을 부여하는 것 아닐까? 가령 동성애와 다양한 젠더 정체성의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 큰 진전이라고 해도, 그것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성 정체성의 문제에 국가의 개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버틀러의 책들이 난해한 문체와 복잡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큰 대중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책들이 우리가 주체로 존재하는, 따라서 우리가 각자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대표적인 양식 중 하나인 성적 정체성에 권력의 문제가 깃들어 있음을 빼어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권력은 비정상적인 정체성들에 대해 가혹하고 배타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혹함이 사실은 정상적인 정체성들의 구성에서도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또는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믿는 정체성들은 소수의 정체성들의 자의적인 교집합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버틀러 이후에 우리 자신으로,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태원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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