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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1 20:34 수정 : 2014.12.11 20:34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7부. 유럽 중심주의 넘어서기
21. 에드워드 사이드: 서양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원리
22.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오리엔탈리즘>(1978)은 너무 유명해서 직접 읽지 않아도 마치 그 책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책, 이른바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 중의 하나다. 다른 고전의 경우도 왕왕 그렇지만, 실제로 이 책을 펼쳐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적지 않게 실망했을 것이다. <오리엔탈리즘>같이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될 만큼 대단한 명성을 지닌 저작이라면, 무언가 조금 더 보편적이고 거창한 이론과 개념들로 짜인 본격적인 이론서를 기대했을 텐데, 사실 이 책은 일종의 역사서, 그것도 동양에 관한 서양 문헌학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고발하는 것은 특수한 학문 분야인 동양학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나, 이제는 종결된 19~20세기 전반기 서양의 제국주의적 과거만이 아니다. 서양 근대 문명의 기초 그 자체다. <한겨레> 자료사진
실제로 대부분의 독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에르네스트 르낭이나 실베스트르 드 사시, 해밀턴 기브, 루이 마시뇽 등과 같은 유럽 동양학 연구의 거장들의 저작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19세기 프랑스와 영국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에 관한 묘사의 함의들을 해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더 나아가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서양 제국주의에 의한 동양의 구성과 지배를 다루는 이 책에서 무언가 우리와 관련된 논의들이 여럿 제시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말하는 ‘동양’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동양, 곧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 등의 동북아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보통 중동이나 근동이라고 부르는 곳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감은 더 커지게 된다.

그렇다면 대단한 이론이거나 철학적인 저작도 아니고 ‘우리’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 저 먼 중동에 관한 문헌학의 역사에 관한 이 책을 우리가 왜 읽어야 할까? 이런 의문이 자연히 생기게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쓴 <오리엔탈리즘> 25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이 책의 기원에는 1967년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35년 영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이집트 카이로에서 자라고 미국에 건너가 촉망받는 비교문학자로 일하던 그가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 안에 고조된 반(反)이슬람 경향 때문이었다.

‘식민주의 이후’ 상상 위한 필수 질문
서구 중심 문화 헤게모니 가면 폭로
미국·유럽의 ‘반이슬람’ 기원 추적
근대 서양 정체성 형성 이면 드러내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경향은 다시 한 번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나날이 강화되고 있지만, 3차 중동전쟁 당시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지 분위기 속에서 반이슬람, 반아랍 정서가 격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이드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위험한 이방인-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 및 유럽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반이슬람적인 태도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이드는 이 책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경우 오리엔탈리즘은 우리말로 ‘동양학’이나 ‘동양 연구’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orient)과 (대개의 경우) ‘서양’(occident)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별에 기초를 둔 사고 스타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에 대한 상투적인 문구들을 통해 잘 표현된다. 가령 동양인은 정적이고 감성적인 반면 서양인은 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식의 견해나, 대중문화를 통해 널리 확산되어 있는 “아랍인은 낙타를 탄, 테러주의의 갈고리코를 하고 돈으로 여자를 사는 호색한” 같은 이미지 등이 그 사례들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세 번째 의미는 “동양에 대한 진술을 하고, 동양에 관한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묘사하고 가르치고 설정하고 지배함으로써 동양을 취급하기 위해 세워진 동업조합적인 제도”로 규정될 수 있다. 곧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조화하고 동양에 대한 권위를 갖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사이드가 바로 다음 대목에서 자신의 오리엔탈리즘 연구가 푸코의 “담론” 개념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을 검토하지 않고서는, 계몽주의 이후의 시기 동안 유럽 문화가 동양을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과학적, 상상적으로 관리하고, 심지어 생산할 수 있도록 해준 그 거대한 체계적 분과-규율(discipline)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첫째, 서양 사람들이, 더 나아가 동양 사람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동양이라는 것은 생산된 지식의 산물이지, 자연적이거나 불변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양인은 (법정에서처럼) 재판받는 존재로, (학과 교과 과정에서처럼) 연구하고 기술되어야 할 대상으로, (학교나 감옥에서처럼) 훈련되고 규율되어야 할 대상으로 창조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동양인이 지배적 틀에 끼워 맞춰지고 그 틀에 따라 재현된다는 점이다.”

둘째, 이처럼 동양을 인공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은 권력과 체계적으로 결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제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문화적 헤게모니의 일환이라는 것이 사이드의 일관된 주장이다. 하지만 사이드의 논점은 동양에 대한 다소 일관되고 체계적인 지식 및 상상의 산물인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구성된 허위적인 지식 체계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논점은, 오리엔탈리즘이 식민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다. 곧 동양인의 열등함에 대한 대중적인 의식과 미개함으로부터 동양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도덕적, 종교적 사명 등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지식-권력의 체계로서 오리엔탈리즘이 생겨나게 됐을까? 식민지 건설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이드는 이러한 기능주의적 설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관점은 조금 더 근본적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생겨나고, 또 오늘날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면, 그것은 서양의 정체성 자체가 오리엔탈리즘 없이는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은 (…) 유럽 이념이라는 집단적 관념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집단적 통념은 ‘우리들’ 유럽인을 ‘그들’ 모든 비유럽인과 대립하는 것으로 정체화하는 것이다. (…) 다른 모든 비유럽 민족들과 문화들과 비교해볼 때 우월한 유럽의 정체성이라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과 그것에 기반을 둔 서양 대 동양이라는 이원론적인 상상의 지리학은 근대 서양의 문화적·정치적 정체성 형성 과정의 이면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오리엔탈리즘>에서 고발당하는 것은 특수한 학문 분야인 동양학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나, 이제는 종결된 19세기~20세기 전반기 서양의 제국주의적 과거만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 근대 문명의 기초 그 자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구성된 동양이 상상적이고 인공적인 동양이라면, 그럼 동양인 스스로 표상하고 재현하는 동양은 있는 그대로의 동양, 현실적인 동양인가?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는 푸코가 쓰는 담론 개념과는 모순적일 것이다. 반대로 만약 오리엔탈리즘의 동양, 곧 재현적이고 상상적인 동양과 구별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인 동양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근거로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할 수 있는가? 더욱이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인들 자신도 그 틀에 따라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는 일관되고 전체적인 틀이라면, 어떻게 오리엔탈리즘과 다른 동양을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들은 식민주의 이후, 유럽 중심주의 이후의 세계(들)을 사고하고 구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질문들이다. 사이드 자신은 이러한 난점을 한편으로는 다소간의 임기응변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출신 망명객 비평가가 지닌 도덕적 권위를 통해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된 지 10여년 뒤에 인도 출신의 여성 이론가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이 문제를 좀 더 첨예하게 제기하게 된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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