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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 개념을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근본적인 화두로 만들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1988)라는 그의 논문은 20세기 후반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서 가장 풍부한 논의를 산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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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7부. 유럽 중심주의 넘어서기
21. 에드워드 사이드: 서양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원리
22.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1982년 일군의 인도 역사학자들이 한 권의 역사학 학술지를 펴냈다. <서발턴 연구>라는 이름이 붙은 이 학술지가 그 이후 현대 역사학의 한 이정표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역사학 학술지 중 하나, 그것도 저 변방의 이름 없는 학자들이 내놓은, 얼마 못 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많은 학술지 중 하나였을 따름이다.
이 학술지를 주도한 사람은 라나지트 구하였다. 그는 1960년대 인도 마르크스주의 정치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빈민들의 봉기를 지원하기보다는 선거를 통한 집권에 치중하는 인도 공산당의 태도에 실망하여, 공산당을 탈퇴하고 학문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따라서 그가 19세기 후반 인도 농민들의 봉기에 관한 연구에 몰두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서발턴과 봉기>(1983)는 그의 최고의 저작이자 서발턴 역사학의 최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더욱이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새롭고도 급진적인 역사학 기획이었다.
그런데 서발턴 역사학은 다른 민중사 연구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농민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 행적에 관해 스스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을 봉기의 주체로 살려낼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그 주체의 의식을,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할 수 있을까? 구하는 당시 식민지 당국과 경찰이 남긴 사건 기록, 곧 봉기에 관한 보고서나 참여자들에 대한 신문 기록을 역으로 독해하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 실제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의 의식을 되살리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그람시가 하층계급 가리킨 ‘서발턴’서발턴학자들은 비엘리트 집단 통칭
스피박, ‘서발턴’의 대표성 문제 제기
현대 인문사회과학 근본 화두로 하지만 아마 여기에 그쳤다면, 서발턴 연구는, 흥미로운 역사학 작업이기는 하되, 인도라는 특수한 지역에 한정된,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역사학’의 한 흐름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한 문예학자의 개입이 서발턴 개념을 인도 식민지 역사학이라는 한정된 영역을 넘어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근본적인 화두로 만들었다. 자크 데리다의 걸작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빼어나게 영어로 번역하여 명성을 얻은 이 문예학자는 1988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을 <마르크스주의와 문화해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집에 처음 발표했다. 그 이후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논문은 여전히 그 현재성을 잃지 않고 역사학자와 문예학자, 철학자 및 사회과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실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발터 베냐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 이사야 벌린의 ‘자유의 두 개념’(1958),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단일 논문으로는 가장 널리 읽히고 가장 풍부한 논의를 산출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이 논문에 관한 연구논문집이 따로 출판되기도 했다. 스피박의 글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사실에 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스피박은 이 글에서 결국 서발턴이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글의 초판 마지막 문장 중 하나가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스피박에 반대하여 서발턴이 충분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경험적인 연구나 이론적인 반박이 제기되곤 했다. 하지만 스피박이 던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칸트 식의 용어법을 빌린다면, 사실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권리에 관한 질문이다. 곧 스피박은 식민지 시대 인도 농민 및 사티라고 불리는, 순장에 희생당한 인도 여성 같은 실제의 서발턴들이 말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을 한다면 어떤 근거에서 말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들이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하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만약 서발턴이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그들이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어떤 것인지 질문하려는 것이 스피박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가능 근거에 대한 골치 아픈 철학적 질문이 서발턴에 관해 제기되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그것은 모든 해방의 정치와 사상의 근저에는 레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주의 및 여성에 관하여 이 레프리젠테이션의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고 첨예하게 제기된다는 점이다. 영어의 레프리젠테이션이라는 단어는 다의적인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다시-제시하기(re-presentation), 곧 바깥에 현존하는 어떤 실재를 관념이나 표상을 통해 다시 제시하는 것,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단어는 대표하기를 뜻한다. 곧 국회의원이 유권자를 대표하듯이, 어떤 것이 다른 것을 대표하거나 나타낸다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 스피박의 주장이었다. 서발턴을 지배 엘리트 이외의 나머지 인도 인구 전체로 규정함으로써 구하는 서발턴의 이질성을 감축하고 있을뿐더러, 그들의 재현과 대표라는 문제를 단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의 대표적인 해방의 사상가들은 이 문제를 간단히 기각해버린다. 스피박은 푸코와 들뢰즈를 그 대표자로 지목한다. 그들은 지식인과 권력에 관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레프리젠테이션이란 더 이상 없습니다. 행위만이 있을 뿐이죠. (…) 서로 중개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이론의 행위와 실천의 행위 말입니다.”(<푸코의 맑스>) 또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대중들은 완벽하게, 잘,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 그들은 지식인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알고 있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스피박이 이러한 언급에서 발견하는 것은 대중들 편에서 그들과 함께 싸우려는 참여 지식인들의 실천적 면모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과 식민지 또는 중심과 주변부로 분할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현실에 둔감한 “순진함”이었다. 더 나아가 “서발턴들을 재현/대표하면서 자신들을 투명한 존재로 재현”(‘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하려는 중심부 지식인들의 욕망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변부 서발턴, 특히 이중으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 서발턴의 목소리는 더욱 억압되어 버린다. 피착취 대중은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스스로를 잘 표현할 수 있는데, 혹시 그렇게 할 수 없는 대중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인의 착각일 터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것은 그들이 충분히 의식적이지 못하거나 국제주의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터이다. 곧 그들에게 대중은 “제1세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집단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더욱이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도 봉기의 주체는 항상 남성이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 경우 봉기하지 못하고 순장의 장작더미에서 죽어간 식민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릴 수는 없을 것이다. 스피박이 보기에 식민지 인도의 무장투쟁단체에서 활동하던 그의 이모할머니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자살은 오늘날까지도 들리지 않는 서발턴 여성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의 질문은 “식민화된 서발턴 주체가 돌이킬 수 없이 이질적”이라는 주장을 전제한다. 조금 더 일반화한다면, 피억압 대중은 환원할 수 없이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대중들이 해방의 주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이 그저 사변적인 질문처럼 들리는가?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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