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1.08 19:00 수정 : 2015.01.08 19:00

라클라우와 무페가 공동으로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은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긴 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전면적으로 기각하지는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8부.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도래
23.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급진민주주의

24.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 다중의 공산주의
25.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적 민주주의
26. 자크 랑시에르: 몫 없는 이들의 몫
27.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이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일련의 담론들이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 출현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체제가 종식을 고하던 것과 거의 같은 시점에 포스트 담론은 우리 사회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결과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사상과 담론이 갑자기 시대의 주류 사상과 담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누가 데리다, 푸코,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또 해체, 시뮐라크르(허상), 규율권력, 파놉티콘, 담론 또는 대상 에이(a) 등과 같은 개념들을 누가 들어본 적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사상가들과 개념들은, 비판을 위해서든 찬양을 위해서든 또는 단순한 수사적 장식을 위해서든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아무도 알지 못했던 개념들과 이론들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로 변신한 것이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1935~2014)와 샹탈 무페(1943~)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1990년대 초 국내에 수입된 포스트 담론들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그 독특함은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포스트 담론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부분적인 요소이거나 외재적인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 등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거나 해체할 때, 그 비판이나 해체를 수행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비마르크스주의자로서, 또는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난 전(前)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러한 작업을 수행했다.

반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내재적인 탈구축의 대상이 된다. 곧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수행하는 자기 탈구축 작업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작업을 통해 라클라우와 무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새로움은, 이전의 서구마르크스주의나 네오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마르크스의 사상 자체를 당연한 전제(말하자면 불변적 진리)로 삼지 않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유한한 것으로, 따라서 모순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좀더 풀어서 말한다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에 관한 유일한 과학이 아닐뿐더러, 유일한 해방 사상이나 운동이 아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지양 가능한 어떤 것이 되었다. 곧 마르크스주의(적어도 그것의 합리적 핵심)를 자신의 일부로 포함하는 어떤 미래의 해방 사상 및 운동의 전망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 수용된 포스트 담론들 가운데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가 가장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로 1990년대 초 국내에 처음 수입되던 당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변절, 전향, 새로운 이데올로기 등으로 치부되면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이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주도적으로 수용하던 이들 대부분은 그 이후 곧바로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기 때문이다. 문화비평가로 전향한 이들도 있고 시민사회론의 이론가가 된 이도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이명박 정권의 고위 관료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기 위한 애도의 구실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웠던 셈이다.

하지만 라클라우와 무페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전면적으로 기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지니긴 하되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목표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전향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졌던 실제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때가 되었다.

진정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구상
헤게모니 개념 존재론적 심화
등가적 접합 강조한 ‘급진 민주주의’

1985년 출간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경전과도 같은 책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라클라우와 벨기에 출신의 무페가 공동으로 저술한 이 책은 ‘2001년판 서문’에서 저자들 스스로 자랑스럽게 밝히듯이, “1985년 처음 출간된 이후 영미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수많은 이론-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있었”던 책이다. 실로 이 책이 제기하는 정치적·이론적 문제는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점점 더 그 현재성을 더해 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 이들 작업의 중심에는 헤게모니 개념이 존재한다. 헤게모니라는 용어는 러시아혁명 당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다른 계급을 포섭하는 전술적 명칭으로서 사용했던 용어였다. 그런데 그람시는 전술적 수단을 넘어 마르크스주의 정치 자체, 더 나아가 정치 일반의 동의어로 볼 수 있을 만큼 이 개념을 확장시켰다.

그람시 개념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이 개념의 핵심은 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에 있다. 노동자 계급은 도덕적·지적 지도력을 보유할 경우에만 농민을 비롯한 다른 피지배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헤게모니 계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은 여전히 전체 피억압 부문에 대한 헤게모니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가르침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곧 여기에는 여전히 노동자 계급이 역사의 중심이며, 노동자 계급이 지배 계급으로 구성될 경우에만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런데 만약 다른 계급이나 집단이 노동자 정당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모종의 강제나 무력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헤게모니나 민주 집중제라는 용어의 이면에는 권위주의의 유령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주체를 계급 주체가 아닌 “복합적인 ‘집합의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람시가 말하는 집합의지는 경제적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에 의해 이미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여러 계급들이 계급 동맹을 통해 공동의 의지를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분산되고 파편화된 역사적 세력들을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접합한 결과”(<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다. 곧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은 접합적 실천을 통해 달성되는 “관계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은 이러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이자 그 정체성의 구성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 이것이 진지전이라는 개념의 핵심적인 요점이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공동으로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은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긴 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전면적으로 기각하지는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그람시 사상도 여전히 경제주의의 문제설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헤게모니적 실천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궁극적인 존재론적 기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보기에 노동자 계급 헤게모니의 실패의 결과는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재구성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곧 그가 말하는 헤게모니가 두 개의 근본적인 경제적 계급 간의 투쟁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보기에 1980년대 말 다원화되고 복잡한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군사적 모델에 입각한 이러한 본질주의적인 정치는 더 이상 실행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그 뒤 사회주의 체제가 종언을 고한 이후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따라서 이들은 데리다나 라캉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통찰을 받아들여 헤게모니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훨씬 더 심화하는 방향을 택한다.

그 결과로 도출된 것이 급진 민주주의 이론이었다. 급진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같이, 이미 경제적 구조에 의해 역사적 주체로 설정된 보편 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정치의 주체는 헤게모니적인 접합의 실천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투쟁들로 확장되는 등가 사슬의 확장을 요구한다.”(<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만약 이러한 등가 사슬의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각각의 투쟁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차이들의 집합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또는 우파 포퓰리즘이 페론이나 박정희 같은 기표를 통해 자신의 헤게모니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몫을 박탈당하고 있는 이 사회의 수많은 몫 없는 이들, 또는 을(乙)들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적 주체로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급진 민주주의의 전언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