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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26 20:36 수정 : 2015.02.26 20:36

랑시에르의 주장은 단순한 분배나 재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이라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을 경우 본성과 자격에 따른 통치, 금권정치나 과두제 정치가 군림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진태원의 다시, 변혁을 꿈꾸다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8부.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도래
23.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급진민주주의
24.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 다중의 공산주의
25.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적 민주주의
26. 자크 랑시에르: 몫 없는 이들의 몫
27.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하여

오늘날 자크 랑시에르(1940~)는 한국의 인문학 독자들에게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무지한 스승>(1987)이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0), 또는 <역사의 이름들>(1992)이나 <이미지의 운명>(2003) 같은 그의 주요 저작들이 10권 넘게 번역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국내에서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제크, 조르조 아감벤 등과 더불어 세계적인 석학 중 한 사람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불과 6~7년 전만 해도 그는 극소수의 연구자들을 제외하면 국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상가였다. 그는 알튀세르와 함께 <자본을 읽자>(1965)를 공동으로 저술한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한 10여년 뒤에는 <알튀세르의 교훈>(1974)이라는 책을 통해 스승 알튀세르를 격렬하게 비난한 지적 탕아로 기억되고 있었을 뿐이다.

외국 학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세기 파리 노동자들이 남긴 문서들을 분석한 그의 박사논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과 <철학자와 그의 빈민들>(1983), <무지한 스승>(1987) 같은 저술을 통해 이미 자신의 지적 기반을 마련해가고 있었지만, 국제 사상계에서 그가 독자적인 사상가로 부각된 것은 1995년 출간된 <불화-정치와 철학> 덕분이었다. 실로 이론적인 독창성과 사상적 깊이, 빼어난 글쓰기, 지적 영향력 등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불화>는 랑시에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일 뿐만 아니라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걸작 중 한 권으로 꼽을 만한 책이다.

누군가가 <불화>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개념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몫 없는 이들의 몫”(part des sans parts)이라는 개념을 들겠다. 그는 이 개념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이해 방식을 일신했으며, 진보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의 독창성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해명해볼 수 있다. 우선 이 개념은 민주주의와 정치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 정치학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정치체제 중 하나로 간주되어 왔다. 곧 그것은 한 사람이 통치하는 군주정이나 소수가 통치하는 귀족정과 달리, 모든 시민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다수 대중이 통치하는 체제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이해된다면 민주주의는 다른 여러 정치체제와 경쟁하는 하나의 정치체제가 될 것이다. 반면 랑시에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에 반대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 곧 아르케의 자질로 지배를 예견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며, 특정한 주체를 정의하는 관계 형태로서의 정치체제 자체이다.”(‘정치에 대한 열 개의 테제’ 중 4번째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걸작 ‘불화’ 인정받으며 눈길
재산과 혈통 따른 통치 거부
못 가진 ‘을’들 정치 주체로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아르케 논리와 단절하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스어로 “시초”나 “원인” 또는 “지배”를 뜻하는 아르케(arkhe)는 정치 공동체가 어떤 합당한 근거나 원리에 따라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 공동체의 아르케를 추구한 것은 두 가지 대립항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나는 공동체가 단순한 산술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솔론 이전의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작동하던 이러한 산술의 원리에 따르면 공동체는 더 많은 부를 지닌 사람이 적은 부를 지닌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 채무를 지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것은 정치 공동체를 질서 짓기 위한 원리로 적절치 않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음, 원리 없음의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 (an-arkhe는 무정부(anarchy)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한다. “악은 (…) 민회에서는 어떤 구두장이나 대장장이든 일어서서 배를 움직이거나 성을 쌓는 법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심지어 공동선을 위해 이 배나 성을 사용하는 정당하거나 부당한 방식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불화>) 이것은 합리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잘못된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기하학적 비율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돌아갈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고자 했다. 이것에 따르면 부유한 이들은 부에 따른 합당한 몫을 받고, 유덕한 귀족들은 그들의 고귀한 혈통과 유덕함에 따른 몫을 받으며, 재산도 혈통도 지니고 있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자유 시민이라는 몫을 지닌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설정하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논리라고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실은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르케의 질서, 다시 말해 기하학적인 몫의 분배 질서는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본래적인 정치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일 뿐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선거가 아니라 추첨제야말로 민주주의에 적합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며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그러한 자격이 부여된다. 따라서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아무런 자격이나 능력도 없이 아무나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아르케 질서에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일이다. 반면 랑시에르에 따르면 아르케의 원리야말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데모스(demos)를 배제함으로써 민주주의에게 “잘못”을 가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케의 질서와 민주주의, 또는 치안과 정치는 “잘못”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해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중으로서의 데모스가 이러한 잘못을 표현하는 집단이었다면, 근대에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프롤레타리아나 여성 또는 이주자 등이 이러한 의미의 잘못의 계급, 잘못의 집단이라고 본다. 아르케에 근거를 둔 치안은 이러한 잘못의 계급을 배제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잘못의 계급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란 치안 질서 속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이러한 잘못이 잘못으로 드러나고,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정치적 활동은 항상, 치안의 질서에 대해 원칙적으로 이질적인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를 실행함으로써 치안의 질서의 감각적 나눔을 해체하는 드러냄의 양식이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는 최종 심급에서 질서의 순전한 우연성, 말하는 아무나와 다른 말하는 아무나 사이의 평등성을 스스로 드러낸다.”(<불화>)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이란, 단순히 분배나 재분배와 관련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 공동체를 정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토대 아닌 토대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왜 민주주의에서는 부자가 아니라, 또 왜 능력 있는 엘리트나 덕망 있는 현자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의 능력이 평등하거나 본성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이라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 본성과 자격에 따른 통치, 곧 금권정치나 과두제 정치가 군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평등 전제에 기반을 둔 몫 없는 이들의 몫은 빈민을 빈민이 아니라 데모스로, 시민으로 만들어주며, 재벌이나 대통령, 국회의원도 하나의 데모스로, 시민으로 만들어준다. 몫 없는 이들의 몫은, 이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이들, 익명의 을들을 공동의 정치적 주체로 (재)구성하는 원칙이자 그 실현 과정이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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