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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동북항일연군과 88국제여단 출신들을 환대했다. 1964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외무상 박성철(사진 한가운데) 일행을 접견하는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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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⑭ ‘88국제여단’의 항일유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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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과 북한 주둔 소련군 지휘관들. 맨 위 왼쪽 첫째가 최석천(최용건). 1945년 가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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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은 저항없이 철수명령 내려
중공은 반발여론 이용 선전전 치중
항일전쟁 촉구 시위가 잇따르고
결국 1936년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하지만 세력이 약화된 항일연군은
소련에 건너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김일성 등 주축 ‘88국제여단’ 창립
1천여차례 동북 침투전 승승장구
이후 중공과의 돈독함이 이어졌다 1936년 12월 장쉐량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항일전쟁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국공합작이 성사됐다. 국·공 양당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된 장제스는 일본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단, 자신에게 총뿌리를 들이댄 장쉐량은 연금하고 동북군도 해산시켰다. 동북인들의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불만은 해소할 방법이 없을지경으로 악화됐다. 중국과 일본이 전면전에 돌입하자, 동북의 일본 관동군은 긴장했다. 만주군과 합세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열을 올렸다. 조선인 항일무장세력들은 관동군의 큰 골칫거리였다. 이들을 소탕하기위해 조선 출신들로 구성된 특설대까지 만들 정도였다. 자의건 타의건, 훗날 후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인물들이 속출했다. 땟국이 줄줄흐르는, 개털 옷을 걸친 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 전사들과 일본 군복을 뽐내는 조선인 청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영광과 치욕의 개인사를 만들어 나갔다. 박한종, 이홍광, 이민환의 뒤를 이어 유만희, 이복림, 서광해, 황옥청, 장흥덕 등 조선팔도에서 몰려온 열혈 청년들이 동북의 눈밭에서 숨을 거두고, 다른편에 서있던 사람들의 견장은 점점 무거워졌다. 1939년 늦가을, 동북 목단강변의 허름한 상가에서 동북 항일연군의 역사에 남을 회의가 열렸다. 70여개 현에 달했던 항일연군의 활동무대가 10개에도 못미칠 정도로 위축돼 있던 때였다. 신중국 설립 후, 중앙군사위원과 운남성 부주석을 겸하게 되는 저우바오중(周保中)과 항일연군 총 정치부 주임 리자오린(李兆麟), 중공 만주성 위원회 상무위원 펑중윈(馮仲雲;신중국 수리부 부부장과 하얼빈 공업대학 총장, 베이징 도서관 관장 등을 역임), 동북항련 제3방면군 사령관 천한장(陳翰章), 경북 선산 출신 허형식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저우바오중은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현재 동북항일연군은 2천명도 채 남지않았다. 마오쩌둥이 <논지구전(論持久戰)>에서 설파한 전략 사상을 행동에 옮기자.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강 건너 소련으로 가서 원동(遠東)지역에 야영을 설치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자.” 1940년 3월19일, 소련군 원동변방군 사령부는 중국 손님 3명을 맞이했다. 저우바오중은 소련 측 정치위원에게 곤경에 처한 동북항일연군의 실정을 설명하며 중·소 국경지역에 야영 설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소련 측도 동북에 주둔하는 일본 관동군의 전략과 군사정보에 정통한 동북항일연군의 협조가 절실했다. 동의를 안할 이유가 없었다. 11월 하순,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흑룡강을 건너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김일성도 저우바오중과 함께 소련 행을 택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총지휘자 양징위(楊靖宇)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양징위는 고집이 셌다. 무슨일이 있어도 중국을 떠나지 않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40년 2월18일, 양징위는 끝까지 곁을 지키던 조선인 경호원과 함께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소련에서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양징위와 억지로라도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소련생활을 시작한 동북항일연군은 남북 두곳에 야영(野營)을 건설했다. 북야영은 강신태(1945년 강건으로 개명), 남야영은 중국인 지칭(季靑)을 책임자로 선출했다. 소련 측의 보급은 부족함이 없었다. 항일연군들은 오랜만에 따듯하게 입고 편한 신발을 신었다. 빵과 고기도 실컷 먹었다. 소련 교관들은 별 이상한 교육을 다 시켰다. 유격전에 대비한 교량폭파와 적진 침투에 필요한 낙하산 훈련은 필수였다. 촬영, 측량, 정찰까지 익히며 동북항일연군의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정식으로 ‘항일연군 교도여단’을 출범시켰다. 정식 명칭은 ‘소련 원동방면군 제 88보병여단’, 혹은 ‘8641보병특별여단’이었다. ‘88국제여단’이라고도 불렀다. 동북에 흩어져있던 김책, 안길, 최석천(1945년 최용건으로 개명), 김일성, 최현, 강신태 등이 몰려있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의 모체나 다름없었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작렬하는 폭파음에 산하가 진동하면, 도처에서 왕샤오밍 얘기로 시간 가는줄 모른다”던 왕샤오밍(王效明)을 비롯해, 펑중윈, 차이스룽(柴世榮) 등과 인연을 맺었다.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들은 틈만나면 동북에 침투해 소규모 유격전을 벌였다.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1260여차례에 걸친 유격전에서 인명 희생은 2백여명에 불과했다고한다. 여단 내에는 4명의 영장(營長)이 있었다. 제1영장이 김일성이었다. 차이스룽, 왕밍꾸이(王明貴), 왕샤오밍 등 나머지 세명의 영장 중 차이스룽은 1944년 소련에서 세상을 떠났고, 왕밍꾸이와 왕샤오밍은 1955년 소장 계급장을 받았다. 각 영의 정치위원 중 세명이 안길, 강신태, 김책 등 조선인이었다. 직급은 최석천이 여단의 부참모장으로 제일 높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자 88여단의 동북항일연군 소속 중국인 선발대는 57개 소조로 나뉘어 동북의 중소 도시로 잠입했다. 소련 군복에 소련군 군관 계급장을 착용한 선발대원들은 러시아어에 능했다. 동북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소련군과 협조가 잘됐다. 국민당이 발 빠르게 소련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중공의 홍군과 신4군이 동북으로 밀려오는 것을 묵인하기까지는 이들의 도움이 컸다. 이쯤되면 동북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중공이 김일성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김일성이 중공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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