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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5 19:32 수정 : 2014.09.15 19:32

중국의 한국전쟁 파병을 기념해 펼쳐진 조선협주단의 공연을 안경을 쓴 채 관람하는 마오쩌둥. 그의 양옆에 협주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 북한 총정치국 부국장 장소환(왼쪽)과 초대 주중 북한대사 이주연(오른쪽)이 보인다. 장소환의 왼쪽에는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 이주연의 오른쪽엔 류사오치가 앉아 있다. 1960년 10월25일 밤, 베이징 인민대회당.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16) 한국전쟁 (상)

언제까지 지속될진 몰라도, 중국의 국공내전에 이어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공식명칭은 6·25전쟁)은 북-중 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1948년 8월15일과 9월9일, 한반도에는 25일 간격으로 남북에 정권이 들어섰다. 중국도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었다. 린뱌오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이 동북에서 국민당군을 궤멸시켰다. 여세를 몰아 화베이에서 승리한 중공은 49년 1월31일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에 무혈입성했다.

중공의 승리를 확신한 김일성은 무력을 동원한 한반도 통일을 서둘렀다. 3월 초, 소련으로 달려간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무력을 통한 통일 계획안을 설명했다. 스탈린은 냉철했다. 김일성에게 승낙은커녕 희망적인 메시지조차 주지 않았다. 군대를 동원해 남한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할 정도였다. 단, “소규모 충돌을 자주 일으켜라. 남한 군대가 반격해오면 38선을 넘는 것은 가능하다”며 여지는 남겼다. 건의도 잊지 않았다. “중국의 지지를 받아내라.”

1949년 초, 중공 승리 확신한 김일성
무력 통한 한반도 통일 서둘렀다
소련·중국 처음에는 ‘회의적’
2번이나 김일성 지지 요청 거절
1년 뒤에야 “마오쩌둥 동의 받아야”
단서 달고 스탈린 대답 얻어냈다

3월23일, 마오쩌둥도 마지막 농촌지휘부가 있던 시바이포(西柏坡)를 출발해 베이핑 교외에 안착했다. 정확한 귀국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북한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중국에 파견할 특사로 김일(金一)을 선정했다.

김일성이 김일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북한이 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외교관이라고 해도 좋을 김일은 소련과 중국 양쪽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본명이 박덕산인 김일은 1931년 21살 때 연변(옌볜)에서 반제동맹(反帝同盟)에 참가해 동북항일연군 사단 정치부 주임과 문화부장 등을 역임한 동북지역 항일 무쟁투쟁의 정통파였다. 게다가 소련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소련통이기도 했다.

5월 초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특사 자격으로 베이핑을 방문한 김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필요한 경우 중국은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지원하겠다.” 마오쩌둥의 비서였던 스저(師哲)의 회고록에 두사람의 만남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마오쩌둥과 김일의 대화는 간단했다. 회담 중 마오쩌둥은 유사시 조선에 파병하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우리는 머리가 검다. 조선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말도 했다. 김일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오쩌둥은 시종일관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일성의 구상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장 무력을 사용해 통일하겠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가까운 시기에 남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지금 우리 군대의 주력은 양쯔강 이남에 있다. 일단 미국이 끼어들면 신속한 대응이 불가능하다.”

1949년 9월에도 북한은 모스크바 쪽에 무력통일을 지지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다시 중국에 매달렸지만 중국도 당장은 곤란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김일성, 1950년 5월 극비리 방중
5대 서기 줄 산삼 선물 건넸다
그중 마오쩌둥 것 크기 굉장해
“10만 병력 빌려달라” 본격 요청에
마오쩌둥 “걱정 마라”며 손잡더니
다음날 중앙서기처 회의 소집했다

1950년 새해가 밝았다. 1월19일,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김일성은 무력을 통한 통일 문제를 거론하며 스탈린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같으면 당장 답신이 왔겠지만, 소련 쪽에서는 지지부진 연락이 없었다. 1월31일이 돼서야 기다리던 회답이 왔다. “조선 쪽의 계획에 동의한다. 모스크바로 오기 바란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군사계획에 동의했지만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당시 마오쩌둥도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스탈린은 마오에게는 일언반구 내색도 안 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에 충실했다. 주중대사 이주연을 통해 마오쩌둥 면담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중국에 오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3월 말 이주연에게 “만일 통일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서라면, 극비리에 오라”고 통보했다.

4월17일, 린뱌오 휘하의 야전군 도해(渡海)부대가 목선을 개조한 군함을 타고 하이난섬(海南島)에 상륙했다. 남해 도서에 산재해 있던 국민당군의 방어체제는 완전히 와해됐다. 김일성은 그 뒤인 5월 베이징에 도착했다.

김일성은 신중국 선포 반년 만에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외국 국가원수였다. 중공은 서태후가 여자 손님들에게 연회를 베풀던 중난하이(中南海)의 하이옌탕(海晏堂)에 김일성의 숙소를 마련했다. 비밀 방문이다 보니 의장대 사열이나 국가 연주는 물론, 공식적인 연회도 베풀 처지가 못 됐다. 중난하이 내부에서도 하이옌탕에 귀한 손님이 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누구인지는 몰랐다.

마오쩌둥과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 런비스(任弼時) 등 중공의 5대 서기(書記)는 김일성의 방문에 관심이 없었다. 대접은 극진히 했지만 만나기를 꺼렸다. 이유는 2개월 전 모스크바에서 보여준 스탈린과 김일성의 처신 때문이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베리야, 몰로토프 등과 중-소 우호조약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김일성도 몰래 모스크바에 와서 스탈린과 여러 차례 회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소련이 중국 쪽에 김일성이 와 있다는 소식을 봉쇄했다 할지라도 김일성이 마오를 찾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 마오쩌둥이 “가까이 있는 친구가 멀리 있는 친구보다 못하단 말인가. 조선인들은 남북 할 것 없이 코 큰 사람들 뒤만 따라다닌다”며 불쾌해한 것이 엊그제였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만 배석시키고 김일성과 마주했다. 김일성은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통역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이 5대 서기에게 줄 선물이라며 기다란 상자 5개를 건넸다. 상자마다 산삼이 한뿌리씩 들어 있었다. 특히 마오쩌둥 것은 크기가 굉장했다.

조선노동당 3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중국 대표단 단장 녜룽전(왼쪽 넷째)과 소련 대표단 단장 브레즈네프. 왼쪽 둘째가 김일성이다.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은 북한 부녀연맹 주석 박정애. 1956년 4월, 평양.
징푸쯔(京夫子)는 역작 <북경재상>(北京宰相)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생생히 묘사했다. “선물 증정을 마친 김일성은 본론을 꺼냈다. ‘스탈린 동지가 나의 통일전쟁 구상을 지지했다. 무상으로 무기 지원과 공중엄호를 약속했다. 미국과 서방국가가 간섭 못 하게 속전속결로 3주일 내에 전쟁을 끝내고 통일된 조선공산당 국가를 선포하라고 내게 요구했다. 우리 당과 정부는 이 문제를 신중히 고려했다. 중국 동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1개 병단을 우리에게 빌려주기 바란다. 그들에게 조선 복장을 입혀 조선 인민군의 주력부대로 삼고 싶다. 통일이 되면 즉각 봉환하겠다. 우리 당과 정부는 평양이나 서울에 우의를 영원히 기념할 수 있는 탑과 기념관을 세워 대대손손 중국 동지들의 사심 없는 도움을 기념하겠다.’”

마오쩌둥은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일성의 말이 끝나자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눈짓을 했다. 저우언라이가 입을 열었다. “비밀 방문이라 열렬한 의식을 거행하지 못했다. 우리는 형제나 마찬가지다. 사실 그대로 말해줘서 고맙다. 소련, 특히 스탈린 동지가 너희들의 통일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것처럼, 우리의 당과 정부도 마땅히 지원해야 한다. 지원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한 바가 없다. 1개 병단이면 10여만의 병력을 의미한다. 빠른 시간 내에 답변을 주겠다. 이틀 뒤에 다시 만나자.”

마오쩌둥은 형제를 강조하며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는 저우언라이의 어투에 만족했다. 박수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혁명이건 전쟁이건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전쟁도 중요하지만 먹는 건 더 중요하다. 우선 밥부터 먹자. 우리 집에 귀빈을 위한 음식을 차려놨다. 저우언라이가 마오타이주도 준비했다”며 김일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김일성은 술엔 관심이 없었다. “주석과 총리께 한마디만 더 하겠다. 평양에 할 일이 많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도 너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모두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저우언라이는 무슨 일이건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한다. 걱정 마라.”

다음날 마오쩌둥은 중앙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병중인 런비스를 제외한 네명의 서기 외에 동북의 가오강(高崗)과 총참모장 대리 녜룽전까지 참석한 회의였지만, 우한(武漢)에 체류중인 린뱌오는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예전에 부상당한 상처가 재발했다는 핑계로 병원에 입원해 버렸다.

마오쩌둥과 주더, 가오강을 제외한 나머지 참석자들은 뭐든지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선언했다. “비밀을 요하는 아주 중요한 회의다. 필기를 금한다. 모두 머릿속에 기록해라.”

그는 이어서 수천년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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