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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신중국을 제일 먼저 승인한 국가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다음날 중국 주재 소련 대사는 마오쩌둥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기념사진을 남겼다. 1949년 10월2일 오후, 베이징 중난하이. 앞줄 왼쪽 여섯째가 초대 중국 주재 대사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로신. 중국 쪽에서는 마오와 저우언라이 외에 린보취(林伯渠), 녜룽전, 왕빙난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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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18) 한국전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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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회의는 한동안 침묵만 흘러
늘 그렇듯, 류사오치가 먼저 답해
“미국-소련, 직접 충돌 가능성 없다”
그 이유는 저우언라이가 설명했다
“2차대전서 기력 소진…회복 안돼
전쟁 발발땐 국지성 전쟁 확신” 국제정세를 분석한 저우언라이의 발언은 1세대 중국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미국과 소련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류사오치의 생각이 정확하다. 나도 동의한다. 미·소 쌍방은 조선반도 문제가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길 바라지 않는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서구에서 발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대치는 유럽을 벗어나지 않았다. 양국은 동독과 서독,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에 가장 민감한 군사분계선을 설치해 놓고 대치 중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라고 봐도 될 정도로 두 나라는 이곳에 최정예를 투입시켰다. 단,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소련이나 미국, 혹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모두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기력을 소진했다.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보통사람이나 정치인 할 것 없이 새로운 세계대전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문제는 미국이다. 그간 미국은 자신의 전쟁에 대리인을 내세우고 앉아서 어부지리를 취했다. 영국이 나치독일과 전쟁을 할 때도 한동안 관망하기만 했다. 아주(亞洲)가 연일 전쟁의 불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할 지경에 처했을 때도 무기 생산에만 열을 올리고 전략물자 공급으로 횡재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 해군이 진주만을 공습하는 바람에 태평양 함대가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미국민의 애국 열기가 일어나자 그제야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도 초기 2년간은 유럽과 아주 전선의 제한된 공간에만 병력을 투입하고 무기를 지원했다. 유럽 전선은 소련 적군이 독일군 주력과 싸우게 내버려 두고, 아주에서는 중국 군민이 일본군 주력과 싸우기를 재촉했다. 1944년 여름, 영국과 소련 등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미국은 정식으로 병력을 대량 투입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취했던 행동을 분석해 보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미국이 3차 세계대전까지 유발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일으키려고 해도 성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훗날 주더(朱德)에게 들었다는 주더 비서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의 전쟁관을 한차례 설파한 저우언라이는 목이 탔던지 단숨에 차를 냉수 마시듯이 들이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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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저우언라이.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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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륙때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당 지도부에 참전 통보나 마찬가지
김일성, 마오와 두 차례 더 만나
“단숨에 제주도까지” 호언장담
마오는 “항상 만일에 대비” 당부 마오쩌둥은 다시 비밀을 엄수하라고 지시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김일성이 우리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병력을 빌려줄 건지 말 건지, 빌려주게 되면 몇 명을 빌려줄 건지, 총사령관 주더는 연로하고, 류사오치는 당무(黨務)에 분주하니 나와 저우언라이, 가오강 세 사람에게 일임해 주기 바란다.” 당 지도부에게 참전을 통보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가오강과 함께 김일성을 두차례 더 만났다. 김일성은 단숨에 부산과 제주도까지 밀고 내려갈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마오는 충고를 많이 했다. “전쟁은 무조건 밀고 내려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군대는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있어야 한다. 예상도 못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벌어지는 것이 전쟁이다. 항상 만일에 대비해야 한다. 만에 하나 미군이 너희들 반도 중부지역 해안에 상륙하면 너희 군대는 허리가 잘린다. 연락이 단절된 군대는 없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대비를 철저히 해라.” 김일성은 파안대소하며 큰소리를 쳤다. “그 일은 우리가 가장 연구를 많이 한 부분이다. 현재 일본의 4개 섬과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국의 육해공군은 20여만에 불과하다. 그 정도라면 상륙하자마자 독 안에 든 쥐처럼 두들겨 팰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반침략의 전통이 강하다. 재차 군대를 보내도 불구덩이에 처넣을 수 있다.” 가오강이 ‘하오’(好)를 연발하자 마오가 말했다. “알았다. 준비가 완벽하고 미국만 출병한다면 우리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침략 전쟁을 지원하겠다.” 저우언라이는 말이 없었다. 마지막 만남은 김일성이 평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저우언라이의 제의로 마오쩌둥의 서재에서 이뤄졌다. 가오강은 이미 연병(練兵)을 이유로 선양(瀋陽)으로 돌아간 뒤였다. 저우언라이가 “가오강 휘하 동북군구의 조선족 간부와 조선말을 할 줄 아는 한족(漢族) 사병들로 구성한 부대를 만들어 정치공작 교육을 시키겠다”고 보고했다. 저우언라이도 참전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마오는 급히 김일성을 불렀다. 그가 이날 만남에서 20여만의 동북 변방군을 편성해 국경에 배치하겠다는 말을 김일성에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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