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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한국전에 참전할 경우 런비스를 지원군 사령관에 임명할 생각이었다. 1949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요양 중인 런비스를 방문한 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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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19) 김일성과 마오쩌둥 ‘자존심 대결’
한 독자로부터 “우리의 한-미 관계처럼 북-중 관계도 6·25전쟁 참전을 계기로 돈독해졌다. 중국의 참전에 관한 설명을 좀 자세히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처음에는 반대했다. 마오쩌둥도 펑더화이를 한반도에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자신의 무력을 동원한 통일 구상을 스탈린이 지지할 줄 알았다. 스탈린은 노련했다. 3월5일 회담에서 김일성의 지원요청을 거절하며 중국 쪽으로 김일성의 등을 떠밀었다.
김일성의 특사 김일을 만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구상을 지지는 했지만, 당장은 비현실적이라며 동의는 하지 않았다. 이유도 분명했다. “지금 우리 군의 주력들은 남쪽에서 국민당군과 전투 중이다. 미국이 간섭할 경우 신속한 부대 이동이 불가능하다.” 단, “때가 되면 우리 병사들을 보내겠다. 조선인과 중국인은 모두 머리가 검다. 누가 중국인이고 조선인인지 구분이 안 된다”며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당시 중공은 대만문제 해결에 분주할 때였다. 한반도는 마오쩌둥의 관심 밖이었다. 그래도 김일성의 청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못했다.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족 병사들의 귀국 요청을 군말없이 동의했다.
4월18일, 조선족 2개 사단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하자 김일성은 전쟁을 결심했다. 실제로 중국 땅에서 북벌전쟁과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치르며 살아남은 조선족 부대는 6·25전쟁 초기 중요한 구실을 한 게 사실이다. 조선족 부대 2개 사단의 귀환으로 자신이 생긴 김일성은 9월 하순, 모스크바를 찾아갔지만 또 거절당하자 다시 중국 지도부 설득에 나섰다. 역시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1949년 말까지만 해도 중·소 양국의 입장은 일치했다.
1950년 5월13일 밤,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이 전쟁에 동의했다고 해도 마오쩌둥은 믿지 않았다. 오죽 의아했으면 회담을 중지하고 동석한 저우언라이를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로신에게 보낼 정도였다. 심야에 로신의 집무실을 노크한 저우언라이가 방문 이유를 설명하자 로신은 그 자리에서 모스크바에 전문을 보냈다. “방금 김일성이 중요한 발언을 했다. 중국의 지도부가 의혹을 표시했다. 모스크바 쪽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튿날인 14일 밤늦게야 모스크바에서 회신이 왔다. 스탈린이 중국 지도부한테 자신의 의중을 처음 표명한 전문이기에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조선 동지와의 회담에서 필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거울로 삼아 조선인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건의에 동의했다. 단,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조선과 중국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만약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토론을 거듭해 해결 방안을 찾도록 해야 한다. 우리와 나눈 자세한 내용은 조선 동지를 통해 듣도록 해라.”
전문 중 조선 동지는 김일성, 필리프 동지는 스탈린을 의미했다.
마오쩌둥은 어릴 때부터 남에게 간섭받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스탈린의 속내를 읽은 마오쩌둥은 내심 불쾌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였다.
‘스탈린 확답’ 김일성 말 못 믿어
마오, 모스크바로 ‘심야 전문’
“동의…최종적으론 북중 공동해결”
회신내용에 내심 불쾌했지만 수용
김일성, 마오 못지않게 자존심 강해
전쟁 계기로 중국이 간섭할까 걱정
소련 지원 무기, 굳이 해로로 옮기고
서울점령 뒤 중국에 전쟁 ‘공식통보’
5월15일, 다시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저런 충고를 했다. “속전속결로 끝내라. 대도시를 탐하지 마라. 적의 생산력부터 저하시켜야 한다. 공장 지역을 집중적으로 타격해라.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우리도 군대를 보내겠다. 일단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겠다.”
김일성도 마오쩌둥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하고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마오가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고 지지를 확실히 하자 자신이 생겼던지 마오를 안심시켰다.
“모든 요구에 대해 모스크바 쪽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변을 얻었다. 우리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 중국의 원조 제공도 바라지 않는다. 지지 하나로 족하다.”
전쟁 발발 전, 소련이 지원하는 무기 수송에 해로를 이용했다. 중국 철도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준비 상황을 중국 쪽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잔뼈가 굵은 김일성은 중국인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쟁을 계기로 중국이 간섭이라도 할까봐 우려했다. 젊은 시절 만주 벌판에서 중국의 도움 없이 일본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국공전쟁 시절 중공 쪽에 무조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의 자존심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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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지원을 독려하는 선전대원들. 중국 전역에서 이런 광경이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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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새벽, 인류가 20세기 50년대에 들어선 이후 가장 큰 사건이 한반도에서 발발했다. 소련제 티(T)-34 탱크로 무장한 탱크여단을 앞세운 북한군 2만8000명이 38선을 넘었다. 선봉은 항일전쟁을 치른 노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공전쟁에 참전했던 조선족 사병들과 신병들은 거의가 노동자와 농민 혹은 그 자제들이었다. 많은 병력은 아니었지만 “해질무렵, 말로만 듣던 서울의 종로 거리를 거닐고 싶다”던 이들의 전투 수준은 실전 경험이 없던 한국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중국을 무시하고 불신했다. 6월25일 남침 시작을 중국 쪽에 알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6월25일 한반도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프랑스 통신을 인용한 외국 신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한 뒤에야 장교 한 사람을 보내 중국 쪽에 정식으로 통보할 정도였다. 중국 지도부도 무심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건 말건 토지개혁법을 반포하고 전국적인 대규모 군중운동에만 몰두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 대표가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자 마오쩌둥이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무책임한 사람”이라며 스탈린을 원망하고, 6월28일 저우언라이가 외교부장 명의로 “미군이 조선과 대만해협을 넘볼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낸 게 고작이었다.
마오쩌둥은 자타가 공인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항상 그래 왔듯이 겉으로는 평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전쟁을 준비하는, 무력의 신봉자였다. 7월7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겸하던 저우언라이에게 국방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마오, 7월7일 국방회의 소집 지시
4개 군단과 3개 포병사단 비롯한
병력 25만여명 동북 배치 결정
저우언라이가 주재하고 주더(朱德), 녜룽전, 린뱌오, 리리싼(李立三)과 해군사령관 샤오징광(蕭勁光) 등이 참석한 국방회의는 동북변방군 설립을 의결했다. 4개 군단과 3개의 포병사단을 비롯해 공병단과 고사포 부대로 구성된 25만5천 병력을 동북의 단둥(丹東), 랴오양(遼陽), 퉁화(通化) 등에 배치했다.
“미군이 참전하면 북한은 오래가지 못하고 우리의 국경선이 위험하다. 그때는 변방군을 투입해야 한다. 지원군 복장으로 갈아입히고 지원군 깃발을 내걸면 된다.”
저우언라이로부터 회의 기록을 건네받은 마오쩌둥은 즉석에서 동의하며 빨리 실행하라고 재촉했다.
백만 대군도 지휘는 한 사람이 하는 법, 마오쩌둥은 6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만 공격을 준비 중이던 쑤위(粟裕)를 동북변방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부사령관과 부정치위원은 동북 국공전쟁 초기 북한과 인연을 맺었던 샤오징광과 샤오화(蕭華)가 적격이었다.
당시 쑤위는 환자였다. 항일전쟁 시절 머리에 박힌 파편 때문에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쑤위의 병세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총참모장 녜룽전과 함께 마오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동북변방군은 허난(河南)과 광둥(廣東) 일대에 주둔하던 병력입니다. 혼란이 우려됩니다. 쑤위의 병세가 호전될 때까지 동북과 조선 사정에 밝은 동북군구 사령관 가오강의 지휘하에 뒀다가 쑤위와 샤오징광이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마오는 두 사람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였다. 쑤위에게 동북의 칭다오(靑島)에 가서 양병(養病)하라는 서신을 발송하고 샤오징광에게는 가오강과 함께 한국전 참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칭다오로 이전한 쑤위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새로운 사령관을 물색했다.
중국 공청(공산주의 청년단)의 설립자 런비스(任弼時)와 국공전쟁 최대의 공로자이며 작전의 귀재인 린뱌오, 덩샤오핑을 놓고 저울질했다. 런비스의 건강은 쑤위보다 더 문제가 많았고 덩샤오핑은 장제스의 잔여 부대와 전쟁 중이라 전선을 떠날 수 없었다. 남은 사람은 린뱌오밖에 없었다. 펑더화이는 염두에도 두지도 않았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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