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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19 19:49 수정 : 2014.10.19 21:02

전쟁 기간 김일성과 중국군 지휘부는 갈등이 많았다. 김일성은 중국에서 대규모 위문단이 왔을 때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최용건(앞줄 왼쪽 여섯째)을 대신 보내고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0) 복잡했던 중국의 한국전 참전 과정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북-중 관계는 한동안 악화됐다. 돈독해지기는커녕, 중국은 3년간 평양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쟁 기간에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관계도 원만치 못했다. 중국군의 참전 과정도 <삼국연의>(三國演義)의 한 장면처럼 복잡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지휘한 펑더화이는 원래 사령관 후보로 검토되지 않았다. 첫번째 동북 변방군 사령관 대상자였던 쑤위(粟裕)의 건강을 주시하던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동북에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자력으로 지위를 꿰찬 사람이다 보니 명령 한마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우한에 있던 린뱌오를 “신체검사를 받으라”며 베이징으로 호출했다. 1950년 9월 초, 베이징에 도착한 린뱌오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만난 자리에서 참전 반대를 분명히 했다. 세 사람이 나눴다는 대화가 모든 기록마다 거의 일치하기에 소개한다. 오랜만에 린뱌오를 만난 마오쩌둥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안색이 창백하다. 신체검사를 받아라. 전문가의 평가가 중요하다.”

린뱌오는 평소 남과 악수하기를 싫어했다. 세수는 가끔 하고, 목욕은 전혀 안 했지만 결벽증이 심했다.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손을 뺀 뒤 엉덩이에 손을 한번 문지르고 나서 입을 열었다고 한다.

“주석의 관심에 감사한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을 안 믿은 지 오래다. 그간 죽지 않은 게 별일이다. 이젠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배석한 저우언라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맞는 말이라며 웃어도 입술만 가볍게 움직일 뿐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마오가 본론을 꺼냈다. “조선반도에 전쟁이 벌어진 지 2개월이 지났다. 네 생각이 어떤지 듣고 싶다.”

린뱌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좀 창피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1950년 9월초 마오, 린뱌오 호출
동북으로 보내려 그를 떠봤다
린뱌오, 시큰둥한 반응 보이다
“북군 치명타 입을 날 멀지 않았다”
연합군 전력 정확히 분석하며
참전 반대 의사 분명히 밝혀

린뱌오의 태도가 마오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우려했던지 저우언라이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주석은 전쟁에 관한 너의 견해를 중요시해왔다. 조선 전쟁도 진작부터 네 의견을 듣고 싶어했다.”

마오도 저우언라이를 거들었다. “오랫동안 <손자병법>을 연구했다고 들었다. 나도 <손자병법>을 좋아한다. 백번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롭다. 김일성이 <손자병법>을 읽었는지 궁금하다.”

린뱌오는 이마에 난 땀을 한차례 닦고 말문을 열었다. “조선의 전황은 북군이 절절히 승리하고 남군은 밀리는 형국이다. 북군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위험하다. 치명타를 입을 날이 멀지 않았다.”

마오가 계속하라고 손짓을 했다. “현재 북군의 주력은 남방의 낙동강 일대에 집결해 있다. 반도의 중부와 북부가 텅 비어 있다. 보급선이 너무 길다. 미군이 반도의 중부에 상륙하면 북군의 주력은 남부에 고립된다. 돌아올 방법이 없다.”

연합군의 전력에 관해서도 린뱌오는 책을 읽는 사람처럼 막힘이 없었다. 역시 린뱌오였다. 숫자까지 열거하며 전황을 분석했다. 마오가 “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한다면 언제쯤 어느 곳에 대규모로 상륙할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도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맥아더라면 이달을 넘기지 않겠다. 지점은 서울 인근의 인천이 가장 적합하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주석이 허락하면 감히 한마디 하겠다. 만에 하나, 우리 부대를 파견한다면 38선 부근까지만 갔다가 철수해야 한다. 북조선 쪽에서 바라건 바라지 않건, 그건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그다음부터는 북조선 쪽에서 해결할 문제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경악했다. 전황과 적의 정황을 언제부터 상세히 파악했는지를 물었다.

“금년 봄부터 중남 군구에 외국 군사정보 자료실을 만들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에 능한 인재들을 양성했다. 매일 외국 방송을 청취하고, 일주일에 두번씩 어부로 가장시킨 정보원들을 어선에 태워 홍콩과 마카오로 파견했다. 이들이 구해 온 신문과 잡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발간한 군사와 관련서적을 읽으며 조선반도 상황을 분석했다. 나는 김일성의 성격을 잘 안다. 우리가 승리할 기미를 보이자 김일성도 무력통일을 구상했다.”

마오가 황급히 물었다. “의견을 더 듣고 싶다. 만약 미군이 인천이나 다른 지역에 상륙한다면 북조선 인민군은 패할 것이 분명하다. 38선 이북으로 퇴각해 압록강변까지 다다르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봤나?”

린뱌오는 단호했다. “우리가 수용함이 마땅하다. 동북전쟁 시절, 우리가 국민당군에게 밀려 압록강변에서 발을 구를 때 조선은 우리를 받아줬다. 단, 직언을 용서해라. 미군이 우리 동북 경내를 타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경솔하게 출전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성립된 지 1년도 채 안 된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엉덩이에 땀 마를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웃집 일에 간섭할 형편이 못 된다. 게다가 공군도 없고 해군도 없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사람들과 기껏해야 기관총 정도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북조선군을 추격한 미군이 동북에 진입했을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서서 전쟁을 치르겠다. 우리 땅에 남의 나라 군대가 들어오는 것은 단 한명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린뱌오의 말은 참전 거부나 마찬가지였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냥 머리만 수그린 채 밥만 먹었다.

린뱌오 예상대로 연합군 상륙하자
마오, 긴급회의 열어 참전 재촉
결국 펑더화이가 참전지휘관으로
“아무 준비 없이 치러야 할 전투
승리로 이끌 이는 그밖에 없다”

린뱌오의 예상은 적중했다. 9월15일 새벽 한·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전세가 역전됐다. 19일 심야, 마오는 자신의 거처인 중난하이 쥐샹수우(菊香書屋)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5명의 서기와 총참모장 외에 중앙군사위원회 작전국장 리타오(李濤)가 참석한 회의에서 마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조선 사태를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 1개월 내에 전화(戰火)가 압록강변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동북의 국경지대가 무사하리라고 아무도 장담 못한다.”

저우언라이는 “남에게 먼저 얻어맞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때리는 게 유리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다. 미 제국주의가 우리의 숨통을 조이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며 마오의 의견을 지지했다.

주더(朱德)는 신중론을 폈다. “동북변방군이 병력을 확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10월 말까지 기다려보자.” 류사오치(劉少奇)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 파견군이 동북을 침범하기도 전에 참전하는 것은 불구덩이에 제 발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우리를 공고히 한 후에 우방을 지지하자.”

런비스(任弼時)는 소련을 원망했다. “소련은 조선 문제를 좌시할 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소련의 육군과 공군의 현대화는 미군과 쌍벽을 이룬다. 우리는 육군이 고작이다. 공군과 해군은 허울뿐이다. 소련은 공군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하늘에 소련 비행기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반대에 직면한 마오는 날이 밝으면 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라고 지시했다.

펑더화이(왼쪽)와 류사오치. 국가 주석 류사오치는 가급적이면 한국전 참전 문제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9월20일 오후, 중난하이 화이런탕(懷仁堂)의 중형 회의실에 각 군구의 사령관과 정치위원 26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동북의 가오강은 불참했고, 서북의 펑더화이는 바쁘다는 이유로 정치위원 시중쉰을 대신 참석시켰다. 마오쩌둥이 개회사 비슷한 걸 했다.

“동한(東漢) 말년 천대대란이 발생했다. 난양(南陽)의 제갈량은 혼자 힘으로 천하를 삼분(三足鼎立)했다. 지금 수십명의 제갈량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방을 붉은색으로 물들일 방법들을 강구해보자.”

저우언라이가 뒤를 이었다. “지금은 삼족정립이 아닌 양족정립(兩足鼎立)의 시대다. 동방의 사회진영을 대표하는 소련과 서방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 두개의 다리(足)가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

류사오치도 끼어들었다. “사회주의 진영에도 소련과 중국 두개의 다리가 있다.”

한차례 덕담이 끝나자 마오쩌둥이 본론을 꺼냈다. 한국전 참전을 통보한 거나 같은 발언이기에 소개한다.

“지난 4월, 김일성 동지가 다녀간 이후 조선 문제를 놓고 회의를 거듭했다. 군사위원회의 보고대로 인천에 상륙한 연합국 파견군의 서울 점령이 임박했다. 지금쯤 서울에 입성했을지도 모른다. 평양 진입도 멀지 않았다. 전화가 우리 문턱에 다가왔다고 볼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 미국은 종이호랑이다. 도처에 파병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도 싸움을 걸어왔다. 나는 먼저 싸움을 걸어본 적이 없지만, 남이 거는 싸움을 피해본 적도 없다. 어제 중앙 서기처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의 주장은 나와 달랐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항상 소수파였다. 소련의 볼셰비키도 소수파였지만 결국은 승리했다.”

발언을 마친 마오쩌둥은 회의장을 떠났다. 저우언라이가 따라 나오자 펑더화이에게 전용기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아무 준비 없이 치러야 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사람은 전군에 펑더화이를 능가할 자가 없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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