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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9월말 베이징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중국, 북한, 소련의 최고지도자들. 저우언라이(앞줄 왼쪽 셋째)와 주더(朱德)의 가운데에 자리한 김일성의 표정이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말해주는 듯하다. 중국 국가주석 류사오치(앞줄 왼쪽 일곱째)와 마오쩌둥 사이가 소련의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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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1) 한국전 내내 덜컹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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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부에도 거의 방문 안해
중국지원군 남하 거부 결정 땐
펑더화이 집무실 집기 때려부숴
서로 권총 빼들기 전에 안 말렸다면… 그날따라 압록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 단둥의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그칠 줄을 몰랐다. 등화관제가 실시된 강변에 군인과 차량이 가득했다. 강 건너 신의주 쪽에서 터지는 포탄 소리가 은은했다. 가끔 조명탄이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압록강대교 인근에서 간단한 의식이 열렸다. 펑더화이의 보좌관이었던 양펑안(楊鳳安)도 구술을 남겼다. “덩화(鄧華), 훙쉐즈(洪學智), 한셴추(韓先楚), 두핑(杜平) 등 역전의 맹장들과 악수를 나눈 펑더화이는 나와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부교를 건넜다. 통신처장이 황급히 무전병과 함께 뒤를 따랐다. 대부대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전에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우리는 적의 동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험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압록강을 건넌 펑더화이는 그 누구의 마중도 받지 못했다. 보좌관 양펑안이 사람이 올 때까지 잠시 쉬자고 하자 고개를 흔들었다. “지형과 적의 동향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길 안내자 한 사람 없이 남의 나라 전쟁터에 들어왔구나! 수십년간 전쟁터만 돌아다녔지만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다. 김일성과 맥아더, 이승만이라는 이름 외에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맥아더에 관한 책을 두 권 읽어 봤다.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가다 보면 사람을 만나겠지.” 펑더화이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김일성과 연락이 됐다. 부랴부랴 달려온 박헌영의 안내로 김일성과 대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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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9월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부총참모장 겸 베이징군구 사령관 부임을 앞둔 지원군 총사령관 양융의 송별식에 참석한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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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댐 건설 나서고 나무도 심어
그런데도 김일성이 계속 홀대하자
저우언라이도 섭섭함 드러낼 정도
친중 연안파 숙청·지원 철군 요구로
관계는 더욱 냉랭해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김일성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평양에 전쟁전람관을 만들면서 중국지원군에 관한 내용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12개의 전람실 중 11개가 북한 인민군의 업적으로 가득한 반면, 중국지원군의 공적은 1개만 배려했다. 중국 정부도 북한의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 외부에 발표는 않았지만 평양 주재 대사직을 3년간 공석으로 내버려뒀다. 저우언라이도 섭섭함을 드러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이 초대한 만찬에 참석은 해도 북한 주재원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귀갓길에 불편을 토로했다. “그간 우리는 정말 하느라고 했다. 조선의 산수와 초목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라 조국과 매한가지로 파괴된 조선의 회복에 열정을 다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우리를 믿지 않고 감격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저우언라이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정전 3개월 뒤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와 건설에 집중했다. 철도를 복구시키고 크고 작은 교량 1300여개를 새로 만들거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했다. 평양은 물론이고 함흥, 원산 등에 대규모 공병대를 투입해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새롭게 변모시켰다. 58년 철수 때까지 북한 재건에 참여한 연인원만 1000만명이 넘는다고 중국 쪽은 기록했다. 펑더화이의 후임으로 지원군 사령관을 역임한 양융(楊勇)의 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참전 이후 8년간 조선 인민들을 위해 공공건물 881개와 주택 4만5000여채를 우리 손으로 직접 지었다. 제방 4000여개와 댐 건설도 지원군이 나서서 추진했다. 심은 나무가 3600여만그루에 달하고 인분 1300여만톤을 우리가 직접 밭에 뿌리는 바람에 지원군 병사들 근처에만 가도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원군 병사들은 조선 형제들을 위해 의식주도 절약했다. 양식 2100여만근(斤)과 의류 59만점을 주둔지 인근 주민들에게 제공해 이들을 재난에서 구했다.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의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인근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느라 우리 병사들은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중국지원군에게 의지한 북한 재건은 생각지도 않았던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노동당 내의 일부 간부들 중에서 소련과 중국 주도의 전후 복구를 비판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 조짐이 보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꼈다. 1956년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다음부터 김일성 비판은 하루가 다를 정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김일성은 고위층 간부들에게 칼날을 세웠다. 중국과 가까운 연안파부터 손을 댔다. 마오쩌둥도 북한의 옛 동지들이 체포되거나 당에서 쫓겨나자 “스탈린과 다를 게 없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단 한마디도 듣기 싫어한다. 상대가 누구건 반대만 하면 무조건 죽여 없애려 한다”고 직접 김일성을 비난했다. 이어서 펑더화이를 평양에 파견했다. 연안파 숙청과 지원군 철군 문제로 북-중 관계는 급랭했다. 미코얀과 함께 평양으로 간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뜻”이라며 연안파를 숙청한 조선노동당의 결의안을 취소하라고 김일성을 압박했다. 김일성은 조건을 달았다. “지원군을 철수해라. 수십만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무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마오는 김일성의 철군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라며 김일성을 몰아붙였다.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김일성을 티토와 히틀러에 비유하며 호되게 매도했다. “김일성이 지원군 철수를 요구한다. 그 사람은 티토의 길을 가려고 한다. 나치의 길을 갈 가능성도 크다.” 당시는 중-소 밀월기였다. 소련도 “중국지원군이 조선에 계속 주둔하는 것이 조선 인민과 모든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며 중국지원군이 북한에 계속 주둔하는 것을 지지했다. 6·25 전쟁 정전 이후 중국지원군은 철수를 주저했다. 1954년 7개 사단이 철수하고, 55년 3월에 6개 사단이 북한을 떠났다. 1956년 4월 북-중 관계가 심각해졌을 때도 44만의 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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