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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02 19:54 수정 : 2014.11.02 19:57

마오쩌둥과 회담하기 직전의 김일성. 오른쪽 첫째가 한국전 정전회담 북쪽 수석대표였던 남일, 오른쪽 둘째는 북한 부녀동맹 주석 박정애. 1958년 12월2일 우한(武漢).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2) 김일성의 중-소 줄타기 외교

1950년대 중반, 중국은 북한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북-중 관계는 거의 파멸 상태였다.

그 증거가 여러 곳에 드러난다. 56년 가을, 북한은 중국에 5천만위안(인민폐)가량의 무상원조를 요구했다. 중국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듬해에 열린 무역담판에서도 중국은 북한을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북한이 요청한 20만톤가량의 양식 지원 요청을 9만톤으로 깎아내렸다.

북한의 요청은 끈질겼다. 중국은 15만톤 이상은 불가능하다며 선을 그었다. 중국의 5개년 계획을 배우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김일성의 요청에도 중국은 1개월 동안 확답을 주지 않았다. 북한이 소련 쪽에 중국의 태도를 비난하자 중국도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는 노동당 간부들의 면담 요청은 물론이고 전화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다.

1957년 하반기부터 완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인은 중국의 경제 성장이었다. 자신이 생긴 마오쩌둥은 소련 공산당이 독점해온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도권을 같이 행사하려 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일성을 지지했다.

마오쩌둥은 그간 김일성이 취했던 반대자 탄압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북에는 북한에서 몸을 피해 온 연안파 출신들이 많았다. 한 회고담을 소개한다. 전 평양시위원회 조직부장 김충식이 조선 땅에 더 이상 못 살겠다며 창춘으로 이주했다. 길림성 서기였던 동북항일연군 출신 푸전성(富振聲)은 김충식과 가까운 사이였다. 하루는 김충식을 만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조선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한 것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간 우리는 간간이 너의 귀국을 종용했다. 네가 귀국을 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의 중국 체류를 막지는 않겠지만 조건이 있다. 중국은 북한의 내부 문제에 간섭할 의향이 전혀 없다.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무슨 이유건 조선인과 조선족과의 접촉을 피해주기 바란다. 서신 왕래나 전화 통화도 마찬가지다.”

김충식이 중공 중앙의 지시냐고 묻자 푸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1957년 중국 경제성장 따라
북-중 관계 개선되기 시작했다
방중 북 대표단에 물자지원 ‘선물’
중국군이 북에 남긴
1억8천만원 물자도 거저 넘겼다

1957년 11월2일, 마오쩌둥이 소련의 10월혁명 40돌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쑹칭링(宋慶齡), 펑더화이(彭德懷), 덩샤오핑(鄧小平) 등 대표단을 이끌고 온 마오쩌둥은 모스크바 대학 강당에 중국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서풍(西風)이 동풍(東風)을 압도하던 시대는 끝났다.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기염을 토했다. 소련에 와 있던 김일성과도 두차례 만났다. “1년 전에 있었던 내정간섭은 우리의 착오였다. 중국으로 도망온 연안파 출신 간부들의 사면과 귀국을 허락해 달라”고 건의했다. 김일성의 반응은 단호했다. “이미 조선에는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마오도 확답을 줬다. “중국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들을 내세워 조선을 반대하지 않겠다.”

귀국한 김일성은 맘놓고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서휘 등 연안파, 소련파 간부들을 숙청했다. ‘반당 종파분자’ 죄목도 간단했다. 중국 쪽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중국의 북한 지원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 만찬에 마오를 비롯한 중공 중앙 상무위 위원들이 참석하고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도 조선 노동당 고위 간부들의 출입이 잇따랐다.

중국은 북-중 우호관계를 전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1958년 11월9일, 베이징의 북한 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저우언라이가 북한 대사 이영호와 뭔가 귓속말을 나눴다. 만면에 화기가 돈 이영호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평양으로 달려갔다.

1958년 11월22일부터 12월9일까지 계속된 김일성의 두번째 중국 공식방문은 화려했다. 중국은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허룽(賀龍), 천이(陳毅)를 비롯해 리지선(李濟深), 궈모뤄(郭沫若) 등 민주인사들까지 총동원해 베이징역에서 김일성 일행을 맞이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무개차를 타고 연도에 늘어선 30만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에 도착한 김일성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김광협이 인솔하는 조선군사대표단도 김일성과 같은 열차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 부주석 주더(朱德)의 영접을 받았다. 평소 보기 힘들던 중국의 흑막 리커눙(李克農)도 이날만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저우언라이가 베푼 만찬에서 김일성은 대취했다.

1957년 11월2일, 러시아 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오른쪽 둘째). 쑹칭링(왼쪽 셋째)과 덩샤오핑(왼쪽 첫째)도 보인다.
이틀 뒤, 베이징 체육관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중공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펑더화이는 김광협과 함께 비엔나 가무단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우한(武漢)에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허룽의 안내로 우한에 도착한 김일성과 김광협은 공항에서 대기중인 류사오치(劉少奇), 천윈(陳雲), 덩샤오핑, 리셴녠(李先念)의 영접을 받았다. 10여년 전,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동북에서 김일성의 도움을 받았던 천윈은 포옹을 풀려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사정을 늘어놨다. 원자재 부족을 푸념하며 면화(棉花)를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오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큰소리쳤다. “우리 형제들이 추위에 떨면 안 된다. 필요한 양을 말해라. 뭐든지 다 보내주겠다.”

배석했던 저우언라이가 김일성을 거들었다. “조선은 석탄도 부족합니다. 100만톤을 지원하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마오는 잘했다며 저우언라이를 칭찬했다. 당시 중국은 600만톤가량 석탄이 부족할 때였다. 김일성은 중국도 풍부하지 않은 것들만 요구했다. 그래도 마오는 모두 승낙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남기고 온 1억8천만원 상당의 물자도 무상으로 북한 쪽에 이양하겠다며 김일성을 만족시켰다. 김일성도 듣기 좋은 말로 마오쩌둥을 흐뭇하게 했다. “중국의 강력한 힘이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국제사회에 거대한 작용을 하기 바란다.”

중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벌인 김일성의 외교는 성공적이었다. 1959년 10월 중-소 분쟁이 공개화됐다. 사회주의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중·소 양국은 북한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해 모든 이익을 취했다.

중국과 관계가 나빠진 소련도
북 끌어들이려 애써
모스크바 방문한 김일성에게
‘마오쩌둥이 김 비난’ 일러바치기도
중-소 틈새에 선 김일성은
두 나라에 대놓고 지원 요구

1960년 5월 애들 싸움이나 진배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베이징을 비밀 방문한 김일성은 흐루쇼프가 집권한 이후 소련과 있었던 일을 마오쩌둥에게 그대로 털어놨다. “5년 전, 흐루쇼프는 미국을 반대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치를 챈 흐루쇼프도 가만있지 않았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자 1956년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와 마오가 나눈 대화 기록을 김일성에게 건넸다. 마오가 김일성을 비난한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화가 난 김일성은 흐루쇼프에게 장담했다. “조선 노동당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는 소련 공산당의 방침을 따르겠다.”

그는 귀국 뒤 열린 간부회의 석상에서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중국은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 다시는 중국을 믿지 않겠다. 가지도 않겠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대놓고 지원을 요구했다. 두 나라는 김일성의 요구에 거의 응했다. 소련은 한국전쟁 시절 북한에 제공했던 군사차관 7억6천만루블의 탕감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경제차관 1억4천만루블의 상환기간 연장 요구도 동의했다. 중국도 뒤지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의 북한 지원 자금 중 약 31%를 차지할 정도였다.

중국에 대한 김일성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소 관계가 점점 악화되자 중립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1963년 1월, 그는 당 기관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친중노선을 분명히 했다. “조선노동당은 한 부분만 놓고 중국 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유는 사회주의 진영을 분열시키고 공동사업에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직접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다. “첫째, 우리 당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국과 흐루쇼프의 논쟁이 계속되면 우리는 중국 편에 설 것이다. 둘째, 우리는 방관만 하지 않겠다. 이미 논쟁에 참가할 준비를 마무리했다. 소련이 그 대상이다. 셋째,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로 충돌할 경우 우리는 중국을 지지할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전례에 없던 밀월기에 진입했다. 밀월관계는 가끔 기복은 있었지만, 문혁 시절 홍위병이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단정하고 체포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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