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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3일 중국 국가부주석 둥비우(董必武)의 안내로 시안의 반풔춘(半坡村) 박물관을 참관하는 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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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3) 문혁 전후 냉온탕 북-중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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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5일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과 함께 시가지를 통과하는 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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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9년 북-중 관계 파탄 위기
마오, 북 지도자 초청 ‘화해 물꼬’
70년엔 저우언라이를 평양 보내
김일성 베이징 방문 약속 받아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전주곡부터 요란했다. 그해 6월에 부수상 박성철을 파견하고 7월에 총참모장 오진우를 보내 중국의 의도를 탐색했다. 중공 지도부가 총동원돼 박성철과 오진우 일행을 환영하고 마오쩌둥이 두 사람을 접견한 뒤에야 베이징행을 결정했다. 이때 통역을 담당했던 초대 주한중국대사 장팅옌(張庭延)의 회상을 소개한다. “당시 나는 베이징에서 천리 밖에 있던 57간부학교에서 노동 중이었다. 갑자기 베이징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행장을 수습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꼬박 이틀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마오 주석의 말은 원래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나도 오랫동안 조선말을 안 쓰다 보니 통역에 애를 먹었다. 김일성은 비밀 방문을 원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만 만나면 된다. 저우 총리는 평양을 다녀갔지만 마오 주석은 평양에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주석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이니 널리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0년 10월8일 김일성의 베이징 방문을 마오쩌둥은 중요시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중난하이에서 환영연을 베풀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중국땅을 밟은 김일성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다. 직접 김일성의 숙소인 조어대(釣漁臺·댜오위타이)를 찾아가 저녁을 함께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김일성이 나이를 거론하며 펄쩍 뛰어도 듣지 않았다. “나이는 무슨 놈의 나이, 우리는 평등한 사이다.”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할 말이 많았다. 2시간이 넘도록 저녁을 먹으며 얘기가 그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먼저 그간 있었던 중국 쪽 과오를 인정했다. “우정이 첫번째고 오해는 그다음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집안이나 마찬가지다. 공동의 적에게 반대하고, 공동으로 각자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중, 방중 김일성 성대히 맞아
조선노동당 창당일까지 챙겨줘
‘감동’한 김일성 귀국뒤 교류 활기
부쉈던 마오 아들 묘 새단장하고
이듬해부터 해마다 중국 찾기도 이튿날 오후에 열린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회담은 7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모두 입술이 마를 정도였다. 10월10일은 조선노동당 창당 25주년 기념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인민대회당에 김일성과 수행원들을 초청해 성대한 경축연을 베풀며 국공전쟁 시절 김일성이 보내준 황색 다이너마이트 얘기를 그칠 줄 몰랐다. 감동한 김일성은 이날 이후 1년에 한두번은 꼭 중국을 찾았다.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별 재미가 없었던지 발길이 뜸했다. 김일성이 귀국하기가 무섭게 북-중 관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0월17일 저우언라이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정준택과 대외경제위원장 김영련을 접견하고,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만찬에 리셴녠(李先念)과 함께 참석해 우호를 만방에 확인시켰다. 워낙 사연이 많은 사이들이다 보니 맘만 먹으면 벌일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20주년 기념대회도 열었다. 저우언라이와 캉성(康生),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예췬(葉群), 왕둥싱(汪東興), 궈모뤄(郭沫若)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총 출동한 성대한 집회였다.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은 허구한 날 중국 당·정 지도자들의 방문을 준비하느라 날밤을 새웠다고 한다.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가 중국 전역에 상영되기 시작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간 미련한 짓들만 골라서 했다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다시 단장하고 마오안잉의 무덤 앞에 흉상까지 세우라고 지시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에도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 1971년 키신저가 몰래 중국을 방문했다.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는 북한의 반응을 우려했다. 키신저가 베이징을 떠나자 곧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을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다. 듣기를 마친 김일성도 저우언라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건 중대한 문제다. 나는 원칙적으로 중국의 구상에 찬성한다. 우리도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토의하겠다. 토론 결과는 베이징에 대표를 파견해 통보하겠다.” 당일로 돌아가려던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이 “안색이 안 좋다. 쉬며 개고기라도 먹고 가라”는 바람에 하루를 지체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날 김일성과 함께 먹은 개고기 코스 요리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을 했다. 김일성이 제1부수상 김일을 파견해 “중-미 관계 개선을 동의한다”는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의 입장을 통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일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평양을 방문한 체코 대통령에 대한 환영연설 중간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을 지지한다고 밝혀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안심시켰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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