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1.09 19:45 수정 : 2014.11.09 22:04

1969년 10월 3일 중국 국가부주석 둥비우(董必武)의 안내로 시안의 반풔춘(半坡村) 박물관을 참관하는 최용건.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3) 문혁 전후 냉온탕 북-중 관계

한국전쟁 시절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지원군 1호로 참전해 사망했다. 북한은 마오의 뜻에 따라 마오안잉을 평안북도 회창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 맨 앞에 매장했다. 묘비 정면에 ‘마오안잉 동지의 묘’, 뒷면에 ‘중국인민의 영수 마오쩌둥 동지의 장남’이라고 새겨넣어 북-중 혈맹의 상징으로 삼았다.

문혁 시절 홍위병들은 소련과 중국에 양다리를 걸치던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베이징 시내 곳곳에 주자파 김일성을 체포하라는 대자보가 덕지덕지 나붙었다.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대로했다. 중공군 묘지에 있는 비석들을 다 때려부수라고 지시했다. 마오안잉의 비석도 산산조각이 났다. 중-소 관계의 파열과 김일성의 친소정책이 희극의 주원인이었지만 영토와 민족 문제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 북한은 중국의 조선족들을 방치하지 않았다. 국경 인근과 동북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너희들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조국관념과 “지도자는 김일성”이라는 영수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홍위병들이 보기에는 백두산 천지와 백두봉에 관한 문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시 홍위병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국경 지역에 위치한 천지와 백두봉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신성한 영토였다. 조선 쪽에서 우리에게 천지의 일부분을 요구했다. 김일성의 혁명사업의 발원지라는 이유 등을 대며 우리의 이해를 구했다. 우리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 천지의 반을 조선 쪽에 할애했다. 조선은 괘씸하다. 접수 다음날 백두봉의 명칭을 장군봉으로 바꿔버렸다.”

며칠이 지나자 북한 쪽은 베이징 주재 대사관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흑룡강성, 요녕성의 일부분과 길림성의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판도에 속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이 지역을 침범했지만, 현재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우리에게 귀환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쪽은 “우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역은 고구려와 무관하다. 무리한 요구”라며 거절했다.

1965년 초, 소련 수상 코시긴 일행이 평양을 방문해 조-소 양쪽의 우호를 강조했다. 북한도 소련 공산당 대회에 대표단까지 파견해 중국을 자극했다. 소련은 북한의 군사, 경제, 기술 지원 요청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북한과 소련이 가까워질수록 북-중 관계는 찬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문혁 직전인 1965년부터 국경 문제로 설전이 오갔고, 3년 뒤 중국은 북-중 경계지역의 중국 쪽 통로를 봉쇄했다. 1965년부터 69년까지 북·중 양쪽은 문화협정이나 경제협정에 서명을 하기는커녕 지도층의 방문도 주고받지 않았다. 북한 쪽은 베이징에 체류할 이유가 없다며 대사까지 평양으로 소환해버렸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도 북한은 소련을 지지하며 중국과 정반대의 행동을 취했다. 압록강을 경계로 밤만 되면 양쪽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방송이 그칠 날이 없었다.

대치가 극에 달하자 완화 분위기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물꼬를 텄다. 외국에 대사들을 다시 파견하고 외국 지도자들을 중국으로 초청했다. 1969년 9월 중국은 10월1일 천안문광장에서 거행될 개국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북한에 발송했다. 김일성은 즉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임박해서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했다. 베이징에 온 최용건은 환대를 받았다. 천안문 누각 위에서 마오쩌둥과 포옹을 나누고 회의실에서 장시간 얘기를 나눴다. 운남강무당과 황포군관학교를 거친 최용건의 중국 인맥은 화려했다. 오랜만에 만난 당 지도부와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북-중 관계가 회복될 기미였다.

1970년 4월 5일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과 함께 시가지를 통과하는 저우언라이.
이듬해 4월5일 총리 저우언라이가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과 최용건의 영접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귀국하기까지 3일간 문혁 이후 복잡했던 북-중 관계의 회복에 나섰다. 김일성도 문혁을 이해한다며 베이징 방문을 약속했다.

영토문제·북한의 친소정책 탓
65~69년 북-중 관계 파탄 위기
마오, 북 지도자 초청 ‘화해 물꼬’
70년엔 저우언라이를 평양 보내
김일성 베이징 방문 약속 받아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전주곡부터 요란했다. 그해 6월에 부수상 박성철을 파견하고 7월에 총참모장 오진우를 보내 중국의 의도를 탐색했다. 중공 지도부가 총동원돼 박성철과 오진우 일행을 환영하고 마오쩌둥이 두 사람을 접견한 뒤에야 베이징행을 결정했다. 이때 통역을 담당했던 초대 주한중국대사 장팅옌(張庭延)의 회상을 소개한다. “당시 나는 베이징에서 천리 밖에 있던 57간부학교에서 노동 중이었다. 갑자기 베이징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행장을 수습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꼬박 이틀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마오 주석의 말은 원래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나도 오랫동안 조선말을 안 쓰다 보니 통역에 애를 먹었다. 김일성은 비밀 방문을 원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만 만나면 된다. 저우 총리는 평양을 다녀갔지만 마오 주석은 평양에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주석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이니 널리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0년 10월8일 김일성의 베이징 방문을 마오쩌둥은 중요시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중난하이에서 환영연을 베풀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중국땅을 밟은 김일성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다. 직접 김일성의 숙소인 조어대(釣漁臺·댜오위타이)를 찾아가 저녁을 함께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김일성이 나이를 거론하며 펄쩍 뛰어도 듣지 않았다. “나이는 무슨 놈의 나이, 우리는 평등한 사이다.”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할 말이 많았다. 2시간이 넘도록 저녁을 먹으며 얘기가 그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먼저 그간 있었던 중국 쪽 과오를 인정했다. “우정이 첫번째고 오해는 그다음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집안이나 마찬가지다. 공동의 적에게 반대하고, 공동으로 각자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중, 방중 김일성 성대히 맞아
조선노동당 창당일까지 챙겨줘
‘감동’한 김일성 귀국뒤 교류 활기
부쉈던 마오 아들 묘 새단장하고
이듬해부터 해마다 중국 찾기도

이튿날 오후에 열린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회담은 7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모두 입술이 마를 정도였다.

10월10일은 조선노동당 창당 25주년 기념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인민대회당에 김일성과 수행원들을 초청해 성대한 경축연을 베풀며 국공전쟁 시절 김일성이 보내준 황색 다이너마이트 얘기를 그칠 줄 몰랐다. 감동한 김일성은 이날 이후 1년에 한두번은 꼭 중국을 찾았다.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별 재미가 없었던지 발길이 뜸했다.

김일성이 귀국하기가 무섭게 북-중 관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0월17일 저우언라이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정준택과 대외경제위원장 김영련을 접견하고,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만찬에 리셴녠(李先念)과 함께 참석해 우호를 만방에 확인시켰다.

워낙 사연이 많은 사이들이다 보니 맘만 먹으면 벌일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중국은 한국전 참전 20주년 기념대회도 열었다. 저우언라이와 캉성(康生),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예췬(葉群), 왕둥싱(汪東興), 궈모뤄(郭沫若)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총 출동한 성대한 집회였다.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은 허구한 날 중국 당·정 지도자들의 방문을 준비하느라 날밤을 새웠다고 한다. 북한 영화 <꽃파는 처녀>가 중국 전역에 상영되기 시작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간 미련한 짓들만 골라서 했다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다시 단장하고 마오안잉의 무덤 앞에 흉상까지 세우라고 지시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에도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 1971년 키신저가 몰래 중국을 방문했다. 회담을 마친 저우언라이는 북한의 반응을 우려했다. 키신저가 베이징을 떠나자 곧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을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다. 듣기를 마친 김일성도 저우언라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건 중대한 문제다. 나는 원칙적으로 중국의 구상에 찬성한다. 우리도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토의하겠다. 토론 결과는 베이징에 대표를 파견해 통보하겠다.”

당일로 돌아가려던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이 “안색이 안 좋다. 쉬며 개고기라도 먹고 가라”는 바람에 하루를 지체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날 김일성과 함께 먹은 개고기 코스 요리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을 했다.

김일성이 제1부수상 김일을 파견해 “중-미 관계 개선을 동의한다”는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의 입장을 통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일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평양을 방문한 체코 대통령에 대한 환영연설 중간에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을 지지한다고 밝혀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안심시켰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