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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16 20:07 수정 : 2014.11.16 20:53

1982년 4월, 덩샤오핑은 중공 중앙 총서기 후야오방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김일성과 함께한 덩샤오핑.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4) 대북관계 전면 나선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한반도 안정에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북한 어디서건 비난받은 적이 없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 1세대 지도자들처럼 북-중 관계도 원만했다.

덩샤오핑과 북한의 인연은 1961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4차 대회에 중공 대표단 단장 자격으로 참석하면서부터 시작됐다. 50년대에도 김일성이 중국에 왔을 때마다 접촉은 있었지만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평양에 온 덩샤오핑은 환대를 받았다. 단독으로 김일성과 여러 차례 회담하며 북한 지도층과도 안면을 텄다.

귀국한 뒤에도 덩샤오핑은 북한과의 인연을 계속 쌓아갔다. 1962년 6월16일, 박금철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당시 중공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은 박금철이 베이징을 떠나는 날까지 14일간 행동을 함께 했다. 우한(武漢)에 있는 마오쩌둥을 만나러 갈 때도 동행했고,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가 국부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과 함께 베푼 만찬 석상에서도 박금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총리 저우언라이가 한밤에 박금철의 숙소를 방문했을 때도 덩샤오핑은 배석했다.

덩샤오핑, 문혁때 몰락했다
73년 복직했지만 4인방이 ‘위협’
김일성이 ‘구세주’ 될 줄이야…

75년 김일성 ‘병문안차’ 방중
병석의 마오와 저우언라이
김일성에 덩샤오핑 직접 연결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소개
그 뒤 이틀간 내리 회담·여행도

덩샤오핑의 두번째 평양 방문은 1964년 봄이었다. 첫번째와 달리 비밀 방문이다 보니 무슨 의견을 교환했는지는 공개된 적이 없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몰락한 직후여서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이런저런 의견들이 오갔으리라 짐작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은 덩샤오핑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듯하다. 북-중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부족한 방문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과 함께 몰락한 덩샤오핑은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1973년 복직에 성공했다. 2년 뒤,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을 겸했지만,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은 덩샤오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부터 해오던 경험주의 비판에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치국원들을 동원해 저우언라이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최종 목표가 덩샤오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 정도였다. 마오쩌둥도 4인방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죽을 맛이었다. 저우언라이는 8시간 동안 수술을 받는 등 병상에서 허덕이고 있었고 마오쩌둥과의 단독 대면은 거부되기 일쑤였다. 직접 만나 정치동향을 보고하고, 속내를 읽기 위해 지혜를 짜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김일성이 구세주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75년 4월2일 중공 원로 둥비우(董必武)가 세상을 떠나더니 4일 뒤엔 장제스(蔣介石)가 타이베이에서 숨을 거뒀다. 베이징과 평양에 장기 체류하던 시아누크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입성했다.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갈 징조였다. 이때 김일성이 “마오쩌둥 방문과 저우언라이의 병문안을 위해 중국을 공식방문하겠다”고 중국 쪽에 통보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노동신문 주편 이용익과의 회견에서 김일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 방문을 환영한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

9개월간 항저우에서 요양중이던 마오쩌둥도 김일성이 온다는 말에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마지막 만남. 1975년 4월18일, 베이징 중난하이.
덩샤오핑과 김일성을 직접 연결해준 사람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였다. 17일 오후, 국경도시 단둥에 도착한 김일성은 대기하고 있던 외교부장 차오관화(喬冠華)의 안내로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역에서 덩샤오핑,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 천시롄(陳錫聯) 등의 영접을 받은 김일성은 중국 쪽이 짜놓은 일정에 구애받지 않았다. 곧바로 마오를 만나겠다고 덩샤오핑에게 요구했다. 김일성이 오진우와 함께 마오를 만난 자리에 배석한 중국 지도층은 덩샤오핑이 유일했다.

2003년에 공개된 당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담화 내용을 소개한다. 마오쩌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총리가 병이 났다. 그것도 암인지 뭔지 아주 고약한 병이다. 1년간 3번 수술했다. 방광에 이상이 있어서 두번 칼을 댔더니 대장에도 이상한 물건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또 칼질을 했다.”

김일성이 “덩샤오핑 부주석을 통해 알고 있다”고 하자 덩샤오핑이 보충설명했다. “총리가 수술할 때마다 현준극 대사를 통해 김 주석에게 보고했습니다.”

덩샤오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오는 잘했다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말을 계속했다. “둥비우가 세상을 떠났다. 총리도 환자고 나도 환자다. 캉성(康生)과 류보청(劉伯承)도 병 때문에 고생이 심하다. 이제 멀쩡한 건 너희 둘밖에 없다”며 김일성과 덩샤오핑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내 나이 이미 82세, 거동 못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땐 너희들에게 의지할 생각이다.”

김일성은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하고, 덩샤오핑은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날따라 마오는 말이 많았다. 자신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생각은 정상이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김일성이 말을 받았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주석이 오래 사시는 겁니다.”

마오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하자 김일성이 이유를 물었다. 마오가 “염라대왕이 자꾸 한잔하자며 초청장을 보낸다”며 웃자 김일성도 웃었다. “가지 마십시오.”

마오쩌둥은 북한의 유전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아직도 석유를 못 찾았느냐? 빨리 찾아라. 석유와 원자탄이 제일 중요하다. 그거 두개만 있으면 어디 가도 큰소리칠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잘난 척해도 국제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이날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덩샤오핑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며 손으로 덩샤오핑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간 많은 일을 한 옛 친구고 동지입니다.” “전쟁도 할 줄 안다.” “전쟁뿐 아니라 정치공작에도 능합니다. 지금은 사상투쟁을 진행중입니다. 10년간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홍위병에게 한동안 쫓겨났었다. 지금은 별일이 없다. 고꾸라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지금 우리는 저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도 환영합니다.”

마오쩌둥의 거처를 나선 김일성과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의 병실로 직행했다. 저우언라이도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배석한 덩샤오핑을 김일성에게 소개했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의논할 일이 있으면 이 사람과 상의해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의중을 파악한 김일성과 덩샤오핑은 이틀간 내리 회담하고 3일간 난징(南京) 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78년 덩샤오핑 평양방문 ‘성대’
1주일 내내 김일성과 붙어다녀
그의 마지막 외국방문도 평양
늘 북한의 체면 신경 써줬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그해 말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특사 파견을 제의했다. 중국 쪽이 사람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며 완곡히 거절하자 김일성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이 임박했다고 직감했다. 1월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공은 북한대사관에 제일 먼저 통보할 정도로 김일성에게 신경을 썼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보고받았을 때 김일성은 눈에 질병이 심해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지만 중국은 국가지도자의 영결식에 외국인이 참석한 전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울다 보니 눈이 퉁퉁 붓는 바람에 수술 날짜를 미룰 정도였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렸는지 김일성은 저우언라이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3년 뒤 북한 땅에 세운 유일한 외국인 동상 제막식이 흥남화학 비료공장에서 열렸다. 9개월 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김일성은 평양의 중국대사관에 설치된 영당(靈堂)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덩샤오핑의 세번째 평양 방문은 1978년 9월8일이었다. 저우언라이 사망 뒤 또 쫓겨났다가 4인방이 체포되자 정계에 세번째로 복귀했고, 당과 정부는 물론이고 군까지 장악한 덩샤오핑의 방문을 김일성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게다가 9월9일은 마오쩌둥 사망 2년째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덩샤오핑이 가는 곳마다 같이 다녔다. 돌아가는 날까지 1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온종일 단독회견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함흥을 방문한 날은 시민 8만명을 동원해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다.

덩샤오핑의 마지막 외국 방문지도 북한이었다. 1982년 4월에도 덩샤오핑은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과 함께 평양을 찾았다. 전통적 우의와, 국가와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를 세계에 재확인시켰다.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때 북-중 관계는 미묘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덩샤오핑은 북한의 체면에 신경을 썼다. 중요한 일은 꼭 북한 쪽에 먼저 통보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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