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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4월, 덩샤오핑은 중공 중앙 총서기 후야오방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김일성과 함께한 덩샤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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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24) 대북관계 전면 나선 덩샤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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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복직했지만 4인방이 ‘위협’
김일성이 ‘구세주’ 될 줄이야… 75년 김일성 ‘병문안차’ 방중
병석의 마오와 저우언라이
김일성에 덩샤오핑 직접 연결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소개
그 뒤 이틀간 내리 회담·여행도 덩샤오핑의 두번째 평양 방문은 1964년 봄이었다. 첫번째와 달리 비밀 방문이다 보니 무슨 의견을 교환했는지는 공개된 적이 없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몰락한 직후여서 소련 공산당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이런저런 의견들이 오갔으리라 짐작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은 덩샤오핑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듯하다. 북-중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부족한 방문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과 함께 몰락한 덩샤오핑은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1973년 복직에 성공했다. 2년 뒤,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을 겸했지만,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은 덩샤오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전부터 해오던 경험주의 비판에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정치국원들을 동원해 저우언라이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최종 목표가 덩샤오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 정도였다. 마오쩌둥도 4인방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죽을 맛이었다. 저우언라이는 8시간 동안 수술을 받는 등 병상에서 허덕이고 있었고 마오쩌둥과의 단독 대면은 거부되기 일쑤였다. 직접 만나 정치동향을 보고하고, 속내를 읽기 위해 지혜를 짜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김일성이 구세주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75년 4월2일 중공 원로 둥비우(董必武)가 세상을 떠나더니 4일 뒤엔 장제스(蔣介石)가 타이베이에서 숨을 거뒀다. 베이징과 평양에 장기 체류하던 시아누크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입성했다.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갈 징조였다. 이때 김일성이 “마오쩌둥 방문과 저우언라이의 병문안을 위해 중국을 공식방문하겠다”고 중국 쪽에 통보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노동신문 주편 이용익과의 회견에서 김일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 방문을 환영한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 9개월간 항저우에서 요양중이던 마오쩌둥도 김일성이 온다는 말에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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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마오쩌둥의 마지막 만남. 1975년 4월18일, 베이징 중난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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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내내 김일성과 붙어다녀
그의 마지막 외국방문도 평양
늘 북한의 체면 신경 써줬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그해 말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특사 파견을 제의했다. 중국 쪽이 사람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며 완곡히 거절하자 김일성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이 임박했다고 직감했다. 1월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공은 북한대사관에 제일 먼저 통보할 정도로 김일성에게 신경을 썼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을 보고받았을 때 김일성은 눈에 질병이 심해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지만 중국은 국가지도자의 영결식에 외국인이 참석한 전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울다 보니 눈이 퉁퉁 붓는 바람에 수술 날짜를 미룰 정도였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렸는지 김일성은 저우언라이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3년 뒤 북한 땅에 세운 유일한 외국인 동상 제막식이 흥남화학 비료공장에서 열렸다. 9개월 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김일성은 평양의 중국대사관에 설치된 영당(靈堂)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덩샤오핑의 세번째 평양 방문은 1978년 9월8일이었다. 저우언라이 사망 뒤 또 쫓겨났다가 4인방이 체포되자 정계에 세번째로 복귀했고, 당과 정부는 물론이고 군까지 장악한 덩샤오핑의 방문을 김일성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게다가 9월9일은 마오쩌둥 사망 2년째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덩샤오핑이 가는 곳마다 같이 다녔다. 돌아가는 날까지 1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온종일 단독회견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함흥을 방문한 날은 시민 8만명을 동원해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다. 덩샤오핑의 마지막 외국 방문지도 북한이었다. 1982년 4월에도 덩샤오핑은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과 함께 평양을 찾았다. 전통적 우의와, 국가와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를 세계에 재확인시켰다.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때 북-중 관계는 미묘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덩샤오핑은 북한의 체면에 신경을 썼다. 중요한 일은 꼭 북한 쪽에 먼저 통보했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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