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진 소설 <2화>
매년 4월 18일은 80연대의 ‘군기배수기념일’이었다. 연병장에서는 군인들은 물론이고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가해 ‘군기제’가 열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찬란한 군기, 하늘을 찢어놓을 듯 울려 퍼지는 군인들의 함성, 지축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 시민들의 응원은 온 세상 끝까지 대일본의 전진을 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함성 속에 있노라면 비록 장병이 아닐지라도 터질 듯이 끓어오르는 군인정신에 휩싸이게 마련이었다. 장병들은 물론이고 학생들까지 일체가 하나가 되어 위무도 당당하게 분열식을 행할 때,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 자신이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라는 사실, 기세 좋게 도심을 행군하는 병사들과 함께 천황 폐하를 우르르 모시고 있다는 사실, 귀신같은 아메리카와 짐승 같은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는 하나가 되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는 사실은 거대한 자부심이 되어 가슴을 묵직하게 채웠다. 뒷골목에서 쪼그리고 앉아 놀던 아이들도 병사들의 군가 소리를 들으면 어깨를 활짝 펴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올해 4월에 열린 군기제에서 사사키는 학생 대표로 연대장이 되어 봉고문(奉告文)을 낭독했다. 군기제 봉고문 낭독자로 결정된 후 사사키는 하루에 백 번도 더 봉고문 낭독 연습을 했다.
“우리 대구중학교 남녀 학생들은 자신을 엄격히 훈련하고, 상하가 일체로 단결하여 군인정신을 단련하고, 위무 당당하게 계림의 땅을 수호하고, 밤낮으로 노력과 전진을 즐거이 여기고, 명예로운 군기의 영예를 빛나게 하고, 천황 폐하와 대일본 제국의 영광을 받들어 모심에 한 치의 오차나 게으름이 없도록 할 것을 맹세합니다. 제80연대 만세! 대구중학교 만세! 대일본 제국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연대장인 사사키가 백군 응원단을 독려하며 열렬히 응원했지만 백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다. 첫 경기로 치러진 축구에서도 백군은 청군에 3대 1로 패했고, 두 번째 경기인 배구에서도 첫 세트를 내주었고, 두 번째 세트도 9대 3으로 청군에 뒤지고 있었다. 우메하라 게이이치 선생님은 그야말로 수말처럼 뛰어다녔다. 축구에서도 그는 혼자 두 골을 넣었고, 그가 속한 청군이 넣은 세 번째 골 역시 그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골이었다.
배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메하라는 큰 키와 늘씬한 몸으로 코트를 누볐다. 빈 곳을 향해 백군 선수가 강스파이크를 기막히게 질러 넣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우메하라 선생님이 늘씬한 몸을 날려 공을 걷어 올렸다. 우메하라가 있는 한 빈 곳을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의 거미줄망은 어떤 공도 놓치지 않았다. 두 달 전, 그가 우리 학교에 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지난해 교직원 체육대회까지만 해도 청군과 백군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주도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필 우메하라 선생님이 청군이 될 게 뭐람.”
백군 응원단 쪽에서 누군가 불만을 터뜨렸다.
리에는 자신의 학반이 우메하라 선생님이 속한 청군 응원단에 속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우메하라 게이이치 선생님이 얼마나 스포츠를 잘하는지는 오늘 아침까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청군이 아니라 우메하라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백군에 속했더라면 이겨도 불만이고, 져도 불만일 것 같았다. 운 좋게 청군에 속하고 보니 백군 여학생들을 골려주고 싶었다. 응원하고 싶지도 않은 편을 응원해야 하는 아이들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크크.
연대장 사사키가 목이 터져라 백군 응원단을 독려했지만 학생들은 좀처럼 힘을 내지 못했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편이 축구에서 진데다, 배구까지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우메하라 게이이치 선생님이 상대 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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