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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소설 <잘 가, 언니>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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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소설 <1화>
낮 한 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마침내 시동이 걸립니다.
차가 출발하고 잠시 후, 저는 가방에서 차학경의 《딕테》를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칩니다. 버스의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날이 흐려서인지 글자는 자꾸만 이지러지고 뭉개집니다. 아니, 어쩌면 낯선 설렘으로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지난여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버클리대의 교내 박물관에 차학경의 아카이브가 마련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 이후로 저는 내내 이 시간을 기다려왔으니까요.
장거리를 달리는 버스의 매력 중 하나는 이동 시간 내내 향유할 수 있는 좌석 크기만큼의 고립감이라고 저는 생각하곤 합니다.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서로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타인들 속에서 완벽하게 혼자인 채 할당된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과 매우 흡사합니다. 물론 그런 걸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건 공포증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거겠지만요.
오 년여 전, 남편과 함께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가 고통스러운 호흡곤란을 경험한 뒤부터 저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미국처럼 영토가 큰 나라에서는 버스나 기차로는 갈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고소공포증은 아닙니다. 고층 빌딩이나 전망대에서는 신체의 이상 반응을 감지한 적 없습니다. 의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담을 마친 의사들은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니 비행기를 타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라는 식의 하나 마나 한 조언을 했을 뿐입니다.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는 여행이나 모임에 동행할 수 없는 이런 사정을 고백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갖고 있는 공포증이 실체도 없이 과장된 마음의 병이거나 감정의 교묘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진단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반박하기보다 차라리 침묵을 택합니다. 당신이라면 그런 침묵 속에서 말하고 있는 제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을까요. 천 개의 혀가 있다면 그 모든 혀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까요. 물론 당신은 한 번 정도는 웃을 게 분명합니다. 한때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비행기를 무서워하게 되었다니, 그 아이러니가 얄궂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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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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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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