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소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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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지금, 세 시간째 미국 서부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입니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는 같은 주(州)에 속해 있지만 버스로 가려면 일곱 시간이 넘게 걸릴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규칙적으로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이 다섯 종류가 넘고,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과로를 하면 호흡곤란으로 쇼크사할 확률이 보통 사람의 열두 배에 이르는 까다로운 인간이 다녀오기엔 사실 부담스러운 거리이긴 합니다. 게다가 저는 낯선 곳에서는 깊게 잠들지 못하는, 쓸데없이 예민한 습성을 갖고 있지요. 아주 짧은 일정이라도 토막잠으로 버티다 보면 체력은 금세 바닥나고 여행은 곧 유형(流刑)의 시간으로 바뀌고 맙니다. 지금도 저는 피곤함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띄엄띄엄 앉은 승객들은 거의 대부분 잠들었는데, 제 머릿속은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도시로의 여행은 오 년 만입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한 J가 차학경의 《딕테》를 소포로 보내온 건 지난여름의 일이었습니다. 책과 함께 동봉한 엽서에는 미국에 정착한 이민 여성으로서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요. 실은……. J는 이어 썼습니다. 실은, 오래전부터 이 책을 소개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쉽지 않았어. 너는, 이해하겠지? J의 주저와 고민이 만져질 듯 그대로 전해져서 저는 엽서에 적힌 그 질문 앞에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딕테》를 쓴 저자이면서 동시에 행위예술가였고 설치예술과 영화, 사진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차학경은 그 무한한 재능을 다 펼쳐 보이기도 전인 1982년, 뉴욕에서 건물 관리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해 차학경은 만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매사에 사려 깊고 조심스러운 J는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차학경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내게 그녀를 소개하는 것을 미루어왔을 것입니다.
아무려나 《딕테》는 ‘살아 있는 소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정수’, ‘독보적인 디아스포라 산문’ 등으로 칭송되어온 텍스트답게 대단히 아름다운 작품이었어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뮤즈의 이름과 각각의 뮤즈가 담당한 예술 분야로 장(章)을 분류하고 그에 맞게 인물, 배경, 문체를 변주하여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도 독창적이었지만 진정 경이로웠던 건 다양한 주제였습니다. 차학경은 그리 두껍지 않은 한 권의 책에 역사, 언어, 여성 등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담았는데 그 성찰의 깊이나 폭은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불과 열한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 후 한국을 방문한 건 딱 한 번뿐이었는데도 한국 역사를 해석하는 그녀의 시선에는 섬세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이민자 여성이라는 미국 내 소수자가 갖는 언어적 고통이라든지 소통의 한계를 표현하는 부분은 실험적인 기법과 문체가 돋보였고요. 저는 단숨에 차학경의 글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J가 염려한 것처럼 차학경의 죽음은 저에게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그리고 매몰된 적도 없는―기억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서 종종 책을 읽다 말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가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곤 했지만, 그렇다고 차학경이 남긴 거의 유일한 예술 텍스트인 《딕테》로 빠져드는 저 자신을 제어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더 많이, 더 더 깊이 차학경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읽게 되었습니다. 한 통의 편지를, 그 안의 문장들을, 그녀의 이야기를…….
차학경의 여동생이 요절한 언니에게 쓴 그 편지를 읽지 않았다면, 하고 가정해봅니다. 그랬다면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칠 수밖에 없는 이 여행을 저는 계획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친밀한 사람들과 풍경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며칠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단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가령 이런 문장 앞에서 저는 번번이 무너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어떤 말이든 어떤 언급이든 나는 당신을, 당신의 생각, 당신의 말, 당신의 행동, 당신의 소망들을 말해왔어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어느 순간 저는 깨달았지요. 제가 오랫동안 당신을,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소망들을 잊고 살았다는 걸, 갑작스럽고도 차분하게. 그 믿어지지 않는 무심함이 커다란 아픔으로 저에게 되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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