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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소설 <잘 가, 언니>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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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소설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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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주유소를 겸하고 있는 카페테리아 앞에 버스가 멈춥니다. 운전석에서 이십오 분의 시간을 줄 테니 화장실을 이용하고 저녁식사를 해결하라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잠에서 깨어난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도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고 사람들을 따라 버스에서 내립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십일월의 찬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오고, 카페테리아의 조명은 젖은 공기 사이로 묽게 번져 보입니다. 흐린 어둠 속을 헤치며 서둘러 카페테리아로 들어가 커피와 도넛을 사서 나오는데 마침 빗방울이 후드득, 콧등에 떨어집니다.
기억의 기억을 떠올려라.
어떤 문장은 주문(呪文)인 듯 우리를 이끌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하나의 문장에 실려 기억의 기억, 기억 속의 또 다른 기억들, 그 한가운데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에 대한 기억이라면, 저는 늘 이렇게 한 박자 먼저 투항하고 맙니다.
가을이고 늦은 밤입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건 비를 맞고 돌아온 당신입니다. 당신의 머리칼과 스커트에서 떨어지는 둥글고 투명한 빗방울을, 꽉 쥔 주먹과 숨을 내쉴 때마다 고요하게 오르내리는 볼록한 가슴을, 저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훔쳐보고 있어요. 자정이 될 때까지 빗속을 걸으며 당신이 무엇을 고민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려웠던 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당신의 저울 한쪽에 제가 놓여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당신은 어쩌면 저를 떠나기 위한 연습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고등학생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는 상의도 없이 제 취학 시기를 늦춘 가족들에게 화가 나서 언제나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다니는 여덟 살의 꼬마고요. 우리는 더 이상 비행기가 낮게 날아다니던 동네에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서울의 북동쪽, 개천이 흐르고 한옥을 쉽게 볼 수 있는 동네입니다. 그 무렵 당신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회화과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유학을 가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림이 없는 인생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손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당신의 꿈에 반대 표현을 합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홍대 앞과 인사동 화방을 돌며 비교적 싼 값에 구입한 화구들을 마당에 내다 버리고, 어머니는 미술 학원에 등록할 돈을 달라는 당신에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식사 도중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고 사라지는 아버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머니, 당신과 아버지 사이의 긴 싸움, 싸움 후 온 집 안에 깃드는 침울한 침묵……. 저는 어렸지만, 알 수 있었어요. 그건, 저 때문이란 것을요. 저를 검사하고 치료하고 수술 받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으므로 단 한 번도 부자인 적 없던 부모님이 상대적으로 건강한 당신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출을 했던 그날도 아버지와 당신 사이에서는 언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교사나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고, 당신은 그림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미대를 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대학을 포기하겠다고, 아니 인생 전체를 포기하겠다고 당신은 목소리를 높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강경해지면, 놀란 아버지는 언제나 절 들먹였죠. 부모는 자식보다 일찍 죽게 되어 있다, 부모가 없으면 네가 정아의 부모가 되는 거다, 정아는 누군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이고 그 보살핌에는 경제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때, 왜 내 귀는 심장과 달리 건강하기만 한 것일까, 원망하곤 했습니다.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책상 아래나 커튼 뒤에 웅크려 앉아 오직 그것만을 원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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