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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7 09:57 수정 : 2014.02.10 13:33



*

밤 아홉 시 오십 분, 버스는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밀려옵니다. 아직 부화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알에서 나온 어린 짐승처럼 저절로 몸이 움츠러듭니다.

이럴 때면, 실 뭉치를 생각합니다.

김포공항 근처에서 살던 시절, 작아지거나 심하게 얼룩이 묻은 털옷은 우리에게는 귀한 장난감이었죠. 제가 털옷을 잡고 있으면 당신이 실을 뽑아 잡아당기며 둥근 실 뭉치를 만들었습니다. 실 뭉치가 만들어지는 동안, 우리는 마주 앉아 웃고 떠들고 때로는 침묵했습니다.

그 동네에서 살던 마지막 해의 어느 겨울밤, 그때도 우리는 어머니의 스웨터로 하나의 실 뭉치를 완성해갑니다. 밤이 깊어도 세계의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저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는 걸까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사이 스웨터는 작아지고 실 뭉치는 커져갑니다. 저는 자꾸만 졸음이 밀려와 눈이 감기고 있지만, 잠결에도 실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질 때마다 안도하곤 합니다. 당신의 손에 딸려가는 실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저는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만 같습니다. 그 실만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그 목적지가 나올 거라는 믿음은 그렇게 점점 둥글어지고 커져갑니다. 그러나…….

그러나 저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 눈을 뜨고 보고야 맙니다. 텅 빈 맞은편 자리를, 먼지가 앉은 그 온기 없는 방석 위를……. 완성된 실 뭉치는 어딘가로 굴러가고 저는 당신이 떠난 자리를 오래오래 건너다봅니다. 잘 가……. 한참을 서성이다가 돌아서서 시내 쪽으로 걷는데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갑니다. 손을 흔들며, 저는 뒤이어 속삭입니다.

잘 가, 언니.




* 흘림체는 《관객의 꿈》(콘스탄스 M. 르발렌 엮음, 김현주 옮김, 눈빛, 2003)에 수록된 차학경의 여동생 차학은의 편지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차학은의 편지*

학경 언니 학경 언니

당신이 나한테 말하였듯이

당신이 바랐었듯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듯이

다른 사람들이 내게 그랬듯이

지금까지

어떤 말이든

어떤 언급이든

난 당신을, 당신의 생각, 당신의 말, 당신의 행동, 당신의 소망들을 말해 왔어요

난 당신을, 당신의 말, 당신의 지식, 나의 목소리, 나의 피를 구분할 수 없었어요

우리의 침묵

지금까지

어떤 말이든

당신에 대한 어떤 언급이든

내 입술이 풀어가기 위한 말을 틀림없이 야기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나를 고립시켰을지도, 나를 당신의 존재로부터 떼어 놓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내 핏속에 흐르는 당신의 기억, 당신의 침묵

학경 언니 학경 언니

당신 바라듯이

당신이 그것을 가졌듯이

당신이 나한테 말하였듯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듯이

나는 들어요

떠올리기 위해 들어요

기억의 기억을 떠올려라

나는 떠올려요

이것이 내가 들은 거예요

나는 그렇게 들었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나의 기억

나의 기억이 떠올라요

어떤 면에서

혹은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게

문득 생각이 나듯이

그렇게 들었어요

그렇게 보았어요

그렇게 알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난 되풀이해요

나는 떠올려요

이것을, 난 들었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나의 기억

나의 기억이 떠올라요

문득 생각이 나듯이

다른 사람에게서 알았다는 것을

오직 나의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떠올려요

그녀는, 나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자기 등에 나를 업었어요

우리의 여행은 끝이 없는 듯했어요

나는 우리의 운명을 떠올리지 않아요

나의 얼굴 위에 덮여진 붉은 담요

그녀가 빠르게 걸을 땐 나는 그녀의 등에서 리듬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녀가 나를 올려서 업으려고 멈춰 서곤 했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울퉁불퉁한 땅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우리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는 결코

그녀는 강했어요

나는 떠올려요

그녀는 윤기나는 나무상자 안에, 거기에 드러누워 있었어요

우리는 소나무를 골랐어요

평온했어요

태양은 그녀의 손 위에서 빛나고 있었어요

그녀는 말이 없었어요

나는 그녀에게 되는 대로 말을 걸었어요

나는 떠올려요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을

태양은 저기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어요

그녀는 무언가를 가리켰어요

그녀는 말했어요, “저것 봐, 저것 봐!”

나도 가리켰어요

나는 떠올려요

하얗고 반투명한 커든 위로 던져진 우리의 그림자를

그녀가, 둥글게 잡고 있는 내 팔에서 잡아당긴 실을 감아 커다란 실뭉치를 만들 때

나는 지켜보았어요

그 마지막 조각이 내 손에서 떨어져 마루바닥을 가로질러서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서 그녀의 손으로 사라지는 것을

잘 가, 언니




* 이 글은 〈잘 가, 언니〉의 모티프가 되어준 《관객의 꿈》에 실린 차학은 씨의 편지입니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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