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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14 19:23 수정 : 2014.03.15 16:40

[토요판] 탁현민의 그놈의 유혹

누군가 물었다. “미안한데 이제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들었는데, 문득 ‘이 남자가 정말 내게 미안한 걸까?’, 그 마음이 진심인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재고의 여지 없이 거짓말이지. 미안하면 잘해주어야지 왜 그만 만나? 그 말의 진심은 아마도 ‘피곤하니 그만 만나자’와 ‘너 만나면 내가 힘들다’ 사이 어디쯤일 것이 분명하다.

가끔 보면 참 똑똑하고 센스 넘치는 여자들이 자기 남자나 연애와 관련해서는 대책 없이 순진해지고 속절없이 약해지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시작이 있으면 당연히 끝이 있듯,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연애의 끝도 느리든 빠르든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그 순간 남자든 여자든 서로에게 이별을 통보하려고 가능하면 덜 아프고 덜 피곤하고 덜 찝찝할 수 있도록 갖은 말을 만들곤 한다. 바로 그때, 말들의 모호함과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은 내 마음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게 비극이다.

그리하여 지난 한주간 헤어질 때 남자들이 하는 말들을 모았고 이제 그 말들의 속뜻에 대해 기술해 놓으니 이미 예감한 이별 앞에서 괜한 미련일랑 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채집(?)한 이별의 통보 가운데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말은 “잠시 시간을 갖자”였다. 이 말은 “오래 시간을 갖자, 혹은 이제 각자의 시간을 갖자”로 들으면 된다. “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는 너는 내게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는 것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헤어지고 싶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말도 있었다. “널 계속 만나면 다른 여잘 만나게 될 것 같아.” 오호! 이 말은 아마도 이미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일 테다. 그러고 보니 헤어지자는 말에도 유형이 있구나 싶다. 미안함을 기반으로한 ‘자학’형이 있는가 하면 상대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는 ‘가학’형도 있다는 말씀이다.

“너 질린다”, “내가 널 왜 만났는지 모르겠다”, “불쌍해서 만나줬더니”, “사랑? 우리 사랑 아니거든”, “내 인생에서 나가”, “너 기억이 안 나는데” 같은 가학형의 이별 통고는 그것을 받는 입장에서는 무척 아프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 하지 않고 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똑같이 독하게 내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싶기도 하다.

헤어지고 싶을 때 분명하게, 그러나 상처 주지 않고 서로 이해하며 헤어질 수 있는 방법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하게 실망했을 때밖에는 없다. 하지만 대개의 연애는 먼저 시작하는 놈이 있고 먼저 끝내는 년이 있기에 이게 절묘하게 ‘딱’ 시작하고 ‘확’ 끝나기란 어렵다 어려워.
탁현민 공연연출가

그러니 가학이든 자학이든 이별의 말들은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가학도 자학도 아니면서 그나마 미련 없이 끝낼 수 있는 이별의 말은, “헤어지자”가 아닐까 한다.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지자”는 것보다 더 맞는 말이 어디 있을까? 그 말에는 아쉬움과 단호함이 함께 묻어난다. 미안하며 동시에 원망스러운,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그 말은, 헤어지자는 그놈의 어떤 말들보다 솔직하지 않은가?

그러니 괜한 쓸데없는 말들일랑 집어치우고 이제 헤어지자 그대. “차가운 너의 이별의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마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가는 너를 지키고 있네”(임지훈, ‘사랑의 썰물’ 가사의 일부)

탁현민 공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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