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탁현민의 그놈의 유혹
누군가 물었다. “미안한데 이제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들었는데, 문득 ‘이 남자가 정말 내게 미안한 걸까?’, 그 마음이 진심인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재고의 여지 없이 거짓말이지. 미안하면 잘해주어야지 왜 그만 만나? 그 말의 진심은 아마도 ‘피곤하니 그만 만나자’와 ‘너 만나면 내가 힘들다’ 사이 어디쯤일 것이 분명하다. 가끔 보면 참 똑똑하고 센스 넘치는 여자들이 자기 남자나 연애와 관련해서는 대책 없이 순진해지고 속절없이 약해지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시작이 있으면 당연히 끝이 있듯,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연애의 끝도 느리든 빠르든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그 순간 남자든 여자든 서로에게 이별을 통보하려고 가능하면 덜 아프고 덜 피곤하고 덜 찝찝할 수 있도록 갖은 말을 만들곤 한다. 바로 그때, 말들의 모호함과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은 내 마음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게 비극이다. 그리하여 지난 한주간 헤어질 때 남자들이 하는 말들을 모았고 이제 그 말들의 속뜻에 대해 기술해 놓으니 이미 예감한 이별 앞에서 괜한 미련일랑 두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채집(?)한 이별의 통보 가운데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말은 “잠시 시간을 갖자”였다. 이 말은 “오래 시간을 갖자, 혹은 이제 각자의 시간을 갖자”로 들으면 된다. “내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는 너는 내게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는 것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헤어지고 싶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말도 있었다. “널 계속 만나면 다른 여잘 만나게 될 것 같아.” 오호! 이 말은 아마도 이미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일 테다. 그러고 보니 헤어지자는 말에도 유형이 있구나 싶다. 미안함을 기반으로한 ‘자학’형이 있는가 하면 상대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는 ‘가학’형도 있다는 말씀이다. “너 질린다”, “내가 널 왜 만났는지 모르겠다”, “불쌍해서 만나줬더니”, “사랑? 우리 사랑 아니거든”, “내 인생에서 나가”, “너 기억이 안 나는데” 같은 가학형의 이별 통고는 그것을 받는 입장에서는 무척 아프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 하지 않고 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똑같이 독하게 내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싶기도 하다. 헤어지고 싶을 때 분명하게, 그러나 상처 주지 않고 서로 이해하며 헤어질 수 있는 방법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하게 실망했을 때밖에는 없다. 하지만 대개의 연애는 먼저 시작하는 놈이 있고 먼저 끝내는 년이 있기에 이게 절묘하게 ‘딱’ 시작하고 ‘확’ 끝나기란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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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 공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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