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탁현민의 그놈의 유혹
제주, 섬에서 지낸 지 어느새 한달이 지났다. 섬 안에서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스스로 섬이 되어 오가는 모든 것을 그리워하며 지내는 것 같다. 섬에서 알게 된 몇몇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가끔 서로의 고민들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신통치는 않지만 신문지상에 연애칼럼이라는 걸 쓴다는 까닭으로 그들의 불면과 울렁거리는 사연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전화를 해서 잘 지내냐고 묻기도 하고, 뜬금없이 잠이 안 온다고 문자를 보냅니다. 묻지도 않은 자기 생활과 고민을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언제 밥 한번 먹자거나 커피 한잔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여행을 가고 싶다며 함께 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저녁 밤길을 산책한 적도 있습니다. 절… 좋아하는 건가요?” ‘썸’ 탄다고 했던가? 요즘 말로…. 여자는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고민의 실상은 이미 그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여자는 이미 좋은데, 남자가 뭔가 결정적인, 확정적인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니 애타는 마음이겠지.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두가지다. 하나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만을 가지고 말해주는 것. 전화해서 잘 지내냐 묻는 것은 그냥 전화를 한 것일 뿐이고 잠이 안 온다고 문자를 보낸 것은 잠이 안 왔을 뿐이고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것은 가장 할 말이 없을 때 하는 말이고 밤길을 함께 산책한 것은 그때 그랬을 뿐,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남자가 여자를 좋아했다면 그 모든 행동보다 먼저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을 거라고, 대개 그렇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여자는 “그렇죠? 그런 거죠, 그럴 줄 알았어요”라고 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상황을 감정적으로 풀어 말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여자를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왜 잘 지내는지 물었겠는가? 잠이 오지 않을 때 문자를 보낸 것은 당신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며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여자에게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자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데이트 신청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여자는 대개 “에이 설마요…” 하면서도 좋아한다. 아니 좋아서 죽겠다는 표정이 된다. 사실 나는 남자의 진심이 어디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혹여 맞히더라도 그건 우연이다. 변화무쌍한 사람의 마음을 무슨 재주로 읽어내고 또 제대로 읽어낸들 그 마음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가지 이야기 중 하나를 골라 말해주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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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 공연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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