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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9 19:52 수정 : 2014.09.20 09:42

[토요판] 탁현민의 그놈의 유혹

연재의 마지막. 그동안 ‘그놈의 유혹’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랑이란 참 놀랍습니다. 자기를 가장 멋지게 만들어주고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게 해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를 치유해줍니다. 설사 그것이 사랑 때문에 생긴 상처라도 말입니다. 마지막 칼럼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저의 고백으로 대신합니다. 마흔둘에 이런 사랑에 빠지리라곤 저도 몰랐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게 될 줄은. 제주, 그 서쪽 마을. 그곳의 출렁이는 바다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한결같은 오름이 제각각 그리웠다. 때로는 그 모두가 어떤 형체를 만들며 한 사람처럼 그리웠다. 어쩔 수 없이 육지로 나와야 하는 날엔 심하게 앓았다. 마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몸도 그러했다. 밤새 콜록이며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감기라지만 감기와는 달랐다. 콧물이 눈물처럼 흘렀다.

신내림 같은 것이었을까? 어떻게 말해도 그리움은 여전했고 어떻게 써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바다에서도 하지 않던 멀미가 육지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계속되었다. 울렁거렸고 가끔 토했다. 이것은 연애였다. 뜨거운. 나를 포기한 연애, 이미 완벽하게 상대에게 무장해제된 연애, 질질 끌려가는,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연애. 돈 빌려달라면 빚을 내서라도 빌려주고 싶은 연애. 좋아 죽겠으나 절대 그대를 두고 죽을 수는 없는, 사랑해서 차라리 이 모든 게 여기서 멈춰버렸으면 싶은 그런 연애였다. 콧속의 뜨거운 기운과 달아오른 신열에, 몽롱하니 취한 듯 제주가 떠올랐다. 몇번이나 솟아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누군가, 대체 제주에 얼마나 살았길래, 이곳에서의 삶에 대해 무얼 알길래 그토록 그립고 절절한 것인지 물었다. 그러나 사랑에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5일간의 사랑이었고 <타이타닉>은 단 이틀 동안의 사랑이었고 <비포 선라이즈>의 사랑은 그래, 단 하루 동안이었다.

어쩌면 내게도 그런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진짜 사랑은 둘 사이의 감정만으로 시간을 멈추게 한다. 소리를 멈추게 하고 공간을 이동시킨다. 사람과의 사랑이 그러하다면 그곳, 제주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어느새 홍대 앞에서 해지는 금오름을 오르고 합정역을 지나며 일렁이는 모슬포 앞바다를 바라보게 되었다. 복잡한 시청광장에서 말없이 떠 있는 형제섬을 발견하기도 한다. 제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나는, 파리를 사랑한다는 사람과 뉴욕을 사랑한다는 사람, 지리산을 사랑한다는 사람과 서울을 사랑한다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게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탁현민 공연연출가
그 많은 시인들이 이야기했던, 나무도 풀도 꽃도 무엇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고 결국엔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아, 이제야 알겠다. 내가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듯 그들도 그러했던 것이었다. 세상에, 비루한 사람은 있어도 비루한 사랑은 없다. 저주받을 사람은 있어도 저주받을 사랑은 없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사랑은 없다. 그래서 그게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면 아름다워진다. 나는 내가 좀더 아름다워진 기분이 든다. 너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내가 좀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건 서로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며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사랑한다. 그대. 제주. <끝>

탁현민 공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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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탁현민의 그놈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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