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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소설 <아무도 거기 없었다>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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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소설 <1화>
“한 걸음 한 걸음마다/넘어질 수도 있다” ―보르헤스
하늘은 흐리고 대기는 축축하다. 남자는 생전 처음 마주한 풍경을 바라보듯 눈앞을 오래 응시한다. 대관람차는 언제나 그렇듯 잿빛 나무 가지 사이에 걸려 있다. 거기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작 남자는 그걸 타본 적이 없다. 언제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풍경은 대개 그런 식으로 지나간다. 거기 있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것. 그러다가 가까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 잊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것. 남자가 아는 풍경은 그런 것이다. 크게 아쉬울 일은 아니다. 풍경이 중요했던 적은 없으니까.
주위를 돌아본다. 오가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얄궂은 음악 소리만 빈 공간에 쩡쩡 울린다. 성한 것보다 고장 난 것이 많은 이곳을 찾는 사람은 지난 일 년 사이에 눈에 띄게 줄었다. 희뿌연 냉기가 젖은 대기를 떠다닌다. 비가, 내리는 것이다. 겨울비라니, 망할. 남자는 작게 중얼거리며 옷깃을 여민다. 날을 세워 입고 나온 양복바지는 후줄근해진 지 오래고 올 성긴 모직 코트도 몸을 옥죈다. 개시도 못 한 채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부두 쪽으로 나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그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주머니 속에 든 지폐 몇 장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오르골 소리 때문이다. 맞은편에서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한다. 손님이 든 모양이다. 남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줄을 고쳐 매고 손가락 관절들을 번갈아 주무르며 회전목마 부스 쪽으로 걸어간다. 사진 한 장으로 추억을 만드세요, 가 나을지 이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세요, 가 나을지 따위를 궁리하며 말이다.
여보, 당신 어디 있어요? 아들이 죽은 후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남자를 찾았다. 화재가 났을 때 아들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현관에서 시작된 불이 바람을 따라 베란다 창문 쪽으로 번져가던 그 시간에 자신은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남자는 밤마다 기억을 더듬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밤, 남자는 마침내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손님이 맡긴 어떤 필름을 현상하던 순간이 떠오른 거였다. 적보라색으로 타는 구름과 물 위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이 현상액 속에서 분명해지던 그때 아들은 불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을 아무렇게나 일그러뜨리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가까운 미래에 자신도 아들과 함께 그곳에 가보리라고 다짐하던 순간이 아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화재 진압 후 아들은 냉장고 안에서 발견됐다. 불길을 피해 냉장고 안으로 기어든 거 같다고 했다. 부검이 필요하다는 경찰의 말에 남자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겨우 흐느낌이 잦아든 건 아들의 부검이 끝난 뒤였다. 이미 쓸데없는 질문이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화재가 나기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담당 형사는 말했다.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고의로 방화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부검의는 화재에 의한 질식사라는 최종 소견을 밝혔다. 죽음의 사유가 분명해지자 남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화염으로 새까맣게 타버렸을 아들의 폐를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밤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에서 깨야 했다. 자신도 불구덩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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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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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2006년 〈실천문학〉을 통해 소설을, 2007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시집 《얼룩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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