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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13 09:38 수정 : 2014.02.19 10:51

김선재 소설 <4화>



아주 오래전 남자가 소년이었을 무렵, 그는 고물상 한쪽에 산처럼 쌓인 헌책들 앞에 서 있었다. 몸살을 앓듯 봄을 지나는 중이었다. 자주 배꼽 밑이나 갈비뼈 안쪽이 간질거렸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몰랐다. 그저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가 짜증스러웠고 주말 오후에 고작 고물상이나 지켜야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근처의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미제 고물들 탓에 아버지와 숙부가 운영하는 고물상은 풍요로웠다. 쌓여 있는 쇠붙이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고 헌책과 신문과 잡지 들은 한낮의 소음을 먹어 묵직했다. 소년이 그 틈에서 집어 든 것은 붉은 사각 테두리를 두른 〈life〉라는 제목의 잡지였다. 처음 보는 잡지를 집어 든 것도 역시 ‘life’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life’는 소년이 아는 몇 안 되는 영어 단어 중 하나였다. 손에 침을 발라 책장을 넘겼다. 얇고 흰 종이가 얇고 흰 종이와 마찰을 일으키며 넘어가는 소리가 주위에 경쾌하게 퍼졌다. 소년은 붉은 로고의 코카콜라 광고와 웨스턴 부츠를 신은 카우보이가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화보를 지나 술병을 가슴골에 끼운 금발의 미녀를 천천히 구경했다. 그 잡지 속에서 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life’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은 어떤 한 페이지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전동차 안에서 정면을 향해 서 있는 사진이었다.* 중절모를 쓴 주변 남자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여자를 향해 있었고 여자의 반쯤 뜬―혹은 반쯤 감은―눈은 소년을 향한 채였다. 땀구멍들이 순식간에 수축한 것처럼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백태가 낀 여자의 하얀 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진 전체에 드리워진 기이한 그림자에 매혹된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의 물결이 소년을 뒤덮었다. 두렵고 두근거렸고 슬프고 기뻤다. 몸을 떨며 사진 밑의 영어를 더듬더듬 읽었다. 눈먼 여가수. 사전을 뒤져 찾은 사진의 제목이었다. 여자의 벌린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이 소년에게 세상의 모든 목소리를 상상하게 했다. 쓸쓸하고 거친 목소리가 스모그처럼 꿈속으로 스며드는 밤이면 눈물도 조금 흘렸다. 삶이 뭔지는 몰랐지만 뭔가 큰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소년은 자주 뒤척이며 밤을 보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잊어버렸다.

아내를 보며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신 앞에서조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노래라니. 남자가 기다렸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아내는 초점 없는 눈을 반쯤 뜨고 죽어가는 새처럼 입을 달싹거렸다. 한 아이가 새를…… 두 사람이 죽은 새를…… 한 아이가 우리를…… 두 사람이 죽인 새를……. 아내의 목소리가 낯선 높낮이로 주변을 떠돌았다. 남자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늘 몸의 일부처럼 가지고 다니기는 했지만 사용할 일이 없던 카메라였다. 여보. 남자가 아내를 불렀다. 노래를 멈춘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다시 아내를 불렀다. 여보, 정신 차려. 아내는 보이지 않는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눈 주위는 여전히 새빨갰다. 남자는 다시 셔터를 눌렀다. 아내가 손을 뻗으며 남자를 불렀다. 여보, 당신 어디에 있어요? 남자가 느릿느릿 손을 내밀었다. 화장실에 사람이 너무 많았어. 아내는 방긋 웃었다. 알아요. 터미널은 원래 그런 곳이에요.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나 빤히 알 수 있는 사실인걸요. 남자는 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내에게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다. 아내의 말대로 작은 새는 영영 날아가 버렸다. 분명한 건 그것뿐이었다.




* Walker Evans: New York, 25 February 1938과 Paul Strand: Blind Woman, New York, 1916을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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