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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18 09:45 수정 : 2014.02.19 10:52

김선재 소설 <7화>



기다리던 버스가 마침내 느릿느릿 눈을 헤치고 다가온다.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떨며 버스에 올라탄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돌아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 때가 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시간도 있다. 상황과 장소를 맞추는 사소한 일들이 왜 이토록 어렵게 느껴질까. 남자의 삶은 정말 그랬다. 상황과 장소를 적당히 가릴 수 있었다면 남자의 인생은 아주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과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떠올리는 것이 남자의 오래된 버릇이듯 아내에게도 입버릇이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아내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여보, 제게 그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캄캄한 방을 더듬으며 남자가 투덜거릴 때마다 아내는 그렇게 변명했다. 하긴,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불을 켜고 끈다는 것도 이상했다. 아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덕분에 그 일은 언제나 남자의 몫이었다. 불을 켜면 언제나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아내가 남자를 향해 방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여보. 남자는 그럴 때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 아내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자신을 향해 웃는 아내가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아내는 날이 갈수록 더 아름다워졌다. 불빛에 비친 아내의 볼은 점점 발그레해졌고 피부는 물고기처럼 투명하고 윤기가 돌았다. 보푸라기가 인 홈드레스나 해진 스웨터도 일부러 골라 입은 것처럼 어울렸다. 그게 사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내의 눈빛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는커녕 날이 갈수록 의혹도 커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여자의 눈이 한겨울의 별처럼 반짝거리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가끔 거울 앞에서 남자는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방긋 웃기만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로 고마워요, 여보. 남자에게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내의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건 매우 못난 짓이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매일 집을 나와 사진관 주위를 서성거리며 아내를 살폈다. 창문 밑에서 한참을 숨죽이고 서 있기도 했다. 사랑이나 질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모든 걸 끝낼 계기가 필요했다. 아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 자신의 의혹이 순결하다는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그런 순간. 그런 상황들에 거의 다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오래지 않아 아내에게 주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뭘 사러 나가지도 않았고 누굴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통화 내역까지 뽑아봤지만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도 없었다.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 저녁에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아내는 철저히 혼자였다. 어둠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남자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찾는 아내를 볼 때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도망갈까 두려운 마음이 교차했다.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다. 친정집에라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꺼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아내는 눈빛을 흐렸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 집은 여긴걸요. 당신만 괜찮다면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그런 금슬은 흔치 않다우. 남자에게 아내의 눈먼 사정을 들은 린다 씨가 건넨 첫 말은 그거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굳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선들을 의식해서 아내와 함께 사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남자는 아내와 헤어질 마음이 없었다. 아내는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마음을 가진 여자였다. 뭘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고 남자가 물었을 때 아내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여보,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남자는 사는 것처럼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을 이따금 서글프게 떠올리며 특별히 기쁘거나 슬프지 않게, 적당히 사는 것이 사는 것일까.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수가 선택한 삶이 삶의 옳은 태도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자는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산다고 냉장고 속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서 냉장고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까. 새장 밖으로 날아가 버린 우리의 작은 새가, 돌아올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말은 남자가 먼저 꺼내야 하는 말이었다. 그 말만은, 아내가 먼저 해서는 안 됐다.

“다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거뿐이야. 당신도…… 알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만이 남자가 말할 수 있는 진심이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이 지옥 같은 나날들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까지 아내는 기다려야만 했다. 그게 그녀가 할 일이었다. 아들이 죽고 칠 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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