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소설 <8화>
눈발은 점점 굵어진다. 세상을 가득 메운 눈송이로 인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선명하던 세상이 흐려지고 멀어진다. 버스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대설이라 대설답게 중부 내륙과 서해안에 많은 눈이 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남자는 대설이라 대설답게 눈이 오는 중부 내륙과 서해안 어디쯤을 지나가는 셈이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며 남자는 대설이구나, 라고 중얼거린다. 아들이 태어나던 날도 눈이 많이 왔다. 지상 위의 모든 삶이 일시에 정지한 것처럼 조용해지던 어떤 순간. 눈삽을 든 채로 끝없이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던 사람들. 도로 위에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서 있던 차들. 화물 트럭에 부딪쳐 부러진 전신주 위로 쌓이던 눈들. 우아한 눈송이들. 부드러운 곡선 속에 몸을 숨긴 불안들. 어둡고 추운 실내에서 바라보던 바깥은 그랬다. 남자는 넋을 놓고 그 세상을 구경했다. 걱정과 기대가 눈의 결정처럼 주위를 떠돌았다. 마침내 그 차고 환한 침묵을 깨고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라고 했다. 그때 분만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건넨 사진 한 장을 남자는 오랫동안 지갑에 넣고 다녔다. 아들이 혀를 말고 첫울음을 터뜨리던 그 순간―앞과 뒤가 없는 어떤 찰나―은 남자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남자는 그 사진을 잃어버렸다. 아들이 태어난 날이 대설인지 아닌지도 분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사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을 영원히 남기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 순간이 어디에서 다가와 어디로 향하는 순간인지, 사진은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그건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기억 바깥의 기억이다. 남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건 사진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건 영혼과 전혀 상관없는, 분명했던 시간의 그림자가 전부였다. 눈덩이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어떤 시간의 분위기. 혹은 희고 차고 어두운 안개처럼 부유하는 기억들. 남자는 눈앞의 어린 연인들이 잊어버린 어떤 기념일에 대해 토닥거리는 대화를 엿들으며 자신이 잊고 있던 기념일들을 꼽아본다. 자신의 생일과 이 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부모와…… 아들의 기일이나 아내의 생일 같은 것 들.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기념일이라고 할 수 없는 날들이다. 떠난 자의 기일에만 떠난 자를 애도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태어난 날에 맞춰 요란스레 축하하는 것도 낯 뜨거운 일이었다. 남자는 그저 덤덤히 보이고 싶었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배려하고 적당히 참으며 살았다.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남모를 슬픔이 밀려들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유원지며 항구며 오래된 동네를 배회했다. 그사이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전후의 맥락이나 숫자의 감정 같은 것들. 아내라면 아들이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있을 거다. 엄마니까, 세상의 엄마들은 자식이 태어난 날을 잊지 않는 법이니까.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다. 집 전화번호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번호를 찍었다가 지우고 다시 찍기를 반복한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지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딜 간 거야, 대체. 남자는 보통 남자들처럼 나지막하게 투덜거리다가 아내가 어디 갈 리가 없는 여자라는 걸 떠올린다. 아마 화장실에 갔거나 낮잠에 빠졌거나 빨래를 걷고 있는 중일 거다. 끝없이 반복되는 통화음을 들으며 화장실 변기에 앉은 아내와 빨래를 걷는 아내와 낮잠을 자는 아내를 상상하던 남자는 그중 어느 모습도 자신이 실제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가 기억하는 아내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모습이 전부다. 어서 오세요, 여보. 테를 두른 듯 눈 주위가 붉고 물고기처럼 투명한 피부에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아내는 언제나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남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내에게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어느 한쪽의 탓만은 아니다. 다른 보통의 부부들이 그렇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멀어진 것일 뿐. 남자는 아내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는지 기억해내려 애쓴다. 지난주쯤, 지난주 어디쯤 아내가 했던 말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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