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소설 <9화>
창밖의 눈발은 더욱 세차게 날리고 버스는 달리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간신히 굴러가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각각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거의 다 왔어. 뒷좌석 어딘가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여보, 언젠가부터 새가 날아오지 않아요. 아내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겨울이잖아. 남자는 거울 앞에서 무심히 대답했다. 안 들려? 버스 뒤쪽에서 다시 누군가가 연거푸 말한다. 안 들리느냐고, 정말 안 들려? 안 그래도 붉은 눈 주위가 더 붉어진 아내가 불안한 듯 물었다. 정말 기다리면…… 돌아올까요? 그리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오, 여보, 이제 늙었나 봐요. 남자가 앉은 좌석의 손잡이를 잡은 청년이 전화기에 대고 낮게 화를 낸다. 내 탓이 아니잖아. 지금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남자는 대꾸하지 않고 아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지친 거 같아요. 기다리는 게 이제 너무 힘들어요. 아내가 중얼거렸다. 기다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청년은 내뱉듯 말하고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녀의 새 타령이 지겨웠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의 마지막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방문을 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아내는 거기서 말을 삼켰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나 다들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처럼 쏟아지는 창밖의 눈을 바라볼 뿐이다. 잘못, 다음의 말은 뭐였을까. 남자는 목도리를 고쳐 매고 카메라를 품속에 숨기고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낀 다음 일어선다. 뒤늦은 궁금증이 남자를 일으켜 세웠고 차라리 걸어가는 쪽을 택하게 한 거다. 눈 속을 걷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순간, 남자는 계단을 헛디딘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거친 눈이 시야를 가린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머리와 얼굴에 떨어진 눈이 금세 녹아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남자는 눈을 비비며 코트 깃을 곧추세우고 걸음을 뗀다. 도로를 지나는 차들과 행인은 눈에 띄게 줄었다. 상점들도 서둘러 문을 닫기 시작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 때문에 운신조차 어렵다. 이곳은 안에서 바라보던 바깥과는 다른 바깥이다. 이 눈이 모두 얼면 어떻게 될까. 언젠가 그랬듯 미끄러진 화물차가 전신주를 들이박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 일대가 온통 암흑천지로 변하지 않을까. 언 볼이 점점 뜨거워진다. 뜨겁다니. 남자는 볼을 감싸 쥔다.
아내는 걸핏하면 동상에 걸렸고 걸핏하면 화상을 입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만 좀 심했다. 부주의하다고 생각했다. 오, 여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내의 변명은 늘 그렇게 시작됐다. 구급상자를 더듬어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등에 바셀린을 바르면서도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굳이 변명할 필요 없는 일에 대해서까지 변명하려 애쓰는 아내를 보고 있자면 모든 게 그녀의 탓인 것만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화재는 누전 때문이었고 그사이 그녀는 운 좋게 집을 잠깐 비웠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아들을 잃은 대가로 시력을 잃은 게 그녀가 했던 일의 전부였다. 그걸 알면서도 남자는 갈팡질팡했다. 모든 것이 그녀 탓인 것만 같았다. 그건 남자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남자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모든 일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 아내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도대체 왜. 남자는 그렇게 물었다.
“……뜨겁거나 차가운 감각들에 집중하고 있으면 슬픔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아요.”
아내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여보, 그럴 때가 있잖아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걸 확인해야 하는 순간들 말이에요. 당신은 그런 순간들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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